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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요일 1:1-5)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요한이 기록한 서신서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는 교회 안팎으로 믿는 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정치권력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내부적으로는 이방세속문화가 교회문화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핍박을 받으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이때에 사도요한은 서신을 통해 교회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을 보면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요한은 어려운 시대에, 소망이 없어 보이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현실은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소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현실에서 도피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이상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 속에서 어려운 현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러면 해결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이미 영생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영생은 현실의 어려움, 핍박, 혼란 등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요한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생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면 이 영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이미 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을 펼쳐도 소망 없는 곳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빈 그물만 거두었습니다. 배에는 잡은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에 오르셔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한마디로 인해 빈 그물, 빈 배만 몰고 다니던 어부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놀랍게 쓰임을 받는 사도 베드로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을 하던 사울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는 도중 다메섹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음성을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안의 생명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생명을 받아들인다면 빈 배와 같은 삶,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1장 1절을 읽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요한은 이 ‘생명의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우리가 가보지 않은 미래에도 계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동일하게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 마디로 ‘신실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서로 불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과 주변 환경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늘 바뀌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새 변하고 퇴색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황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것과 반대로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시기에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과거에 있었던 안타까운 문제로 지금 힘들어 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과거를 알고 계신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내 과거의 아픔들을 모아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미래가 불안하십니까? 과거에도 나와 함께 계셨던 주님이 미래에도 함께 하실 것을 신뢰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둘째, 사도요한은 이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주목했고 우리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 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생명의 말씀이 문자,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듣고 보고 직접 체험했던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 단순히 누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예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실제로 예수님의 호흡을 느끼고 박동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할 때 사도요한을 통해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의 숨결을 느끼고 심장의 박동 수를 느꼈던 바로 그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높고 위대한 그곳에만 서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며 울고 웃으며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요한의 증언입니다. 그림으로 본 것도 아니요 영화로 본 것도 아닌, 자신이 직접 품에 안겼던 예수님을 체험한 그대로 선포한 것입니다.
생명은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뚜렷하고도 온전한 증거를 보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즘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깨달음, 응답, 증거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계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삶의 중심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기만 하면 내 안에 계신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능력이 기적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주어진 생명
2절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서는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나 다 외면하는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당시 하찮은 직업인 목수란 직업을 가지셨고, 화려한 예루살렘성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수없이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외로이 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상처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그분께서 오신 것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처럼 사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위해 오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친구
3절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은 ‘이것을 전하는 것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미 콜롬비아에서 미전도종족을 위한 성경을 번역하는 한 선교사님께서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라는 구절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할 때 “내가 너를 용서하였다 나와 친구가 되자”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친구가 되자’라고 말씀하신 것보다 더 위대한 언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태초부터 계신 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찾아와 친구가 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친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계 중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사무엘상 18장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아름다운 친구의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마음이 연락되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되었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친구는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친구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3~15)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났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시 살아났고 삶이 변했습니다. 삭개오, 세리 마태, 남편 다섯 있는 여인,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 이 말씀 앞에 있는 우리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친구가 되어야 우리 삶의 근본 본질이 변화되고 바뀝니다. 사도요한은 이 사귐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또 하나,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통한 회복의 은혜는 온 땅, 온 세계로 흘러 넘쳐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귄다’는 것은 상대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채워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사귐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내게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면 무엇을 전하고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내 호주머니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이 빈 깡통 같은데 무엇을 털어서 남을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경험, 예수님으로 인한 용서의 체험, 예수님을 만나서 내 생애의 변화의 경험이 없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혹시 인생의 위기 앞에서 쉽게 좌절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믿음이 싸구려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에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렁설렁 만났기 때문에 그분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날 한분이 저를 심각하게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른데서 계속 전화가 왔습니다. 그 후에 또 다시 만났는데 그 다음 약속 때문에 제가 시계를 힐끔힐끔 보았더니 그분이 “목사님 제가 불편하시죠. 그래서 목사님과 저 사이에는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핸드폰 끄고 시계도 풀러 놓고 만났습니다.
그냥 무심코 넘기는 책장처럼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겠습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만이 나를 용서하시는 온전한 분이시다.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과 이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영적 체험 없이 우리가 무엇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영적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 순간마다 사건마다 상황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우리를 불같이 일으켜 세우고 이끌고 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할 찌어다
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진정한 사귐은 완전한 기쁨을 선물로 줍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귐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우리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 그분 때문에 우리는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 참된 사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기쁨이 우리 안에 흘러넘칩니다. 예수 안에 참된 기쁨이 있고, 예수 안에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예수가 우리 삶 중심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이 온 땅으로 흘러 넘쳐 온 땅을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과 이 백성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예수 안에 생명의 소망을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존귀케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능력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하용조목사 설교 중에서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요한이 기록한 서신서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는 교회 안팎으로 믿는 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정치권력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내부적으로는 이방세속문화가 교회문화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핍박을 받으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이때에 사도요한은 서신을 통해 교회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을 보면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요한은 어려운 시대에, 소망이 없어 보이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현실은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소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현실에서 도피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이상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 속에서 어려운 현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러면 해결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이미 영생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영생은 현실의 어려움, 핍박, 혼란 등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요한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생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면 이 영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이미 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을 펼쳐도 소망 없는 곳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빈 그물만 거두었습니다. 배에는 잡은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에 오르셔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한마디로 인해 빈 그물, 빈 배만 몰고 다니던 어부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놀랍게 쓰임을 받는 사도 베드로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을 하던 사울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는 도중 다메섹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음성을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안의 생명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생명을 받아들인다면 빈 배와 같은 삶,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1장 1절을 읽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요한은 이 ‘생명의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우리가 가보지 않은 미래에도 계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동일하게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 마디로 ‘신실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서로 불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과 주변 환경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늘 바뀌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새 변하고 퇴색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황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것과 반대로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시기에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과거에 있었던 안타까운 문제로 지금 힘들어 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과거를 알고 계신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내 과거의 아픔들을 모아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미래가 불안하십니까? 과거에도 나와 함께 계셨던 주님이 미래에도 함께 하실 것을 신뢰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둘째, 사도요한은 이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주목했고 우리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 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생명의 말씀이 문자,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듣고 보고 직접 체험했던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 단순히 누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예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실제로 예수님의 호흡을 느끼고 박동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할 때 사도요한을 통해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의 숨결을 느끼고 심장의 박동 수를 느꼈던 바로 그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높고 위대한 그곳에만 서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며 울고 웃으며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요한의 증언입니다. 그림으로 본 것도 아니요 영화로 본 것도 아닌, 자신이 직접 품에 안겼던 예수님을 체험한 그대로 선포한 것입니다.
생명은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뚜렷하고도 온전한 증거를 보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즘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깨달음, 응답, 증거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계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삶의 중심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기만 하면 내 안에 계신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능력이 기적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주어진 생명
2절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서는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나 다 외면하는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당시 하찮은 직업인 목수란 직업을 가지셨고, 화려한 예루살렘성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수없이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외로이 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상처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그분께서 오신 것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처럼 사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위해 오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친구
3절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은 ‘이것을 전하는 것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미 콜롬비아에서 미전도종족을 위한 성경을 번역하는 한 선교사님께서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라는 구절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할 때 “내가 너를 용서하였다 나와 친구가 되자”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친구가 되자’라고 말씀하신 것보다 더 위대한 언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태초부터 계신 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찾아와 친구가 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친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계 중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사무엘상 18장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아름다운 친구의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마음이 연락되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되었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친구는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친구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3~15)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났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시 살아났고 삶이 변했습니다. 삭개오, 세리 마태, 남편 다섯 있는 여인,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 이 말씀 앞에 있는 우리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친구가 되어야 우리 삶의 근본 본질이 변화되고 바뀝니다. 사도요한은 이 사귐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또 하나,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통한 회복의 은혜는 온 땅, 온 세계로 흘러 넘쳐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귄다’는 것은 상대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채워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사귐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내게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면 무엇을 전하고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내 호주머니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이 빈 깡통 같은데 무엇을 털어서 남을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경험, 예수님으로 인한 용서의 체험, 예수님을 만나서 내 생애의 변화의 경험이 없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혹시 인생의 위기 앞에서 쉽게 좌절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믿음이 싸구려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에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렁설렁 만났기 때문에 그분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날 한분이 저를 심각하게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른데서 계속 전화가 왔습니다. 그 후에 또 다시 만났는데 그 다음 약속 때문에 제가 시계를 힐끔힐끔 보았더니 그분이 “목사님 제가 불편하시죠. 그래서 목사님과 저 사이에는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핸드폰 끄고 시계도 풀러 놓고 만났습니다.
그냥 무심코 넘기는 책장처럼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겠습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만이 나를 용서하시는 온전한 분이시다.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과 이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영적 체험 없이 우리가 무엇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영적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 순간마다 사건마다 상황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우리를 불같이 일으켜 세우고 이끌고 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할 찌어다
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진정한 사귐은 완전한 기쁨을 선물로 줍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귐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우리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 그분 때문에 우리는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 참된 사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기쁨이 우리 안에 흘러넘칩니다. 예수 안에 참된 기쁨이 있고, 예수 안에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예수가 우리 삶 중심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이 온 땅으로 흘러 넘쳐 온 땅을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과 이 백성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예수 안에 생명의 소망을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존귀케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능력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하용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