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7
복음 진리의 말씀 (골 1 : 1 - 8)
오늘 저녁은 5절의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는 말씀 그대로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 정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이라 할 때는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그 말 자체의 뜻은 '복된 소식'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된 소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도 하고, 들어왔고, 또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즉 예수님의 말씀만이 복음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곧 복음이며 예수님 전부가 복음입니다. 가령 나에게는 가장 믿음직스런 남편이 있습니다. 이때 그 남편이 나에게는 큰 복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복인데 남편이 하는 말만 나에게 복이겠습니까? 남편 자체가 복입니다. 또 가장 사랑스런 아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말만이 복일 수는 없습니다. 아내 전부가 나의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말씀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부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기에 오늘은 『복음 진리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축복의 복음(1-2절)
첫째, 직분의 축복(1절)
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이 가장 큰 영광이요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에는 장로라는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직분은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존속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기를 위해 주셨던 직분은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는 장로라는 직분만 있습니까? 그것은 대표적인 기록일 뿐이고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셨던 모든 직분은 다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의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직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천하에 있는 금덩어리를 다 중다고 하여도 사도라는 직분은 결코 바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엄청난 유산도 다 포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으며 또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요, 바리새파 중에서도 바리새파인지라 그 당시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명예와 부를 다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직 하나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도직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큰 축복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축복인 줄 알아서 바울 사도처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관계의 축복(2절 상반절)
2절에 보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실한 형제란 말은 곧 믿음의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도' 와 '믿음의 형제' 라는 말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형제라고 하는 말 속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너와 나와의 관계에서 주어진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너와 나와의 관계, 이 관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은 관계성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처녀와 총각이 있습니다. 처녀와 총각이 전혀 관계가 없을 때는 완전히 남남입니다. 그러나 처녀와 총각이 관계를 가지게 되면 아내와 남편이 되고 부부가 됩니다. 부부가 되면 촌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1촌이라는 촌수가 있고 형제 사이는 2촌이 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리 가까워도 옷을 벗은 상태가 되면 서로가 부끄러워 합니다. 또 어머니와 딸 사이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부부지간에는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촌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또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원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앞에 지은 죄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가 되어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이 죄는 마귀에 속하는 것이며 마귀는 또한 지옥에 속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히 마귀에 속한 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옥의 자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엡 2:3)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만민 중에서 선택하사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 영이 생명의 근원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즉 부자 관계가 이루어 집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도라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성도가 됩니다. 이런 새로운 관계를 어디가서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성도라는 이름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큰 축복인지 모르고 또 성도들끼리는 믿음의 형제가 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 자녀지간의 관계는 세상에 살 동안 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내 아내 네 아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 동안만 아내와 남편의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의 관계는 영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며 또한 우리는 성도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관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관계의 축복이 그렇게 귀하고 고맙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고 또 형제가 아니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의 영으로 형제가 되었다는 이 새로운 관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전인적인 축복(2절 하반절)
2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은 두가지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없는 육신뿐이라면 이것은 송장입니다. 짐승과 다름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없는 영이라면 역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과 육이 합쳐질 때에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두 축복을 받을 때 완전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영적으로 받는 축복을 은혜라 했고, 육신적으로 받는 축복을 평강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영적으로는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육신적으로 축복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혹 영적인 축복은 받았어도 육신적인 축복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축복은 많이 받았는데 십수 년을 예수 믿었어도 미지근해서 안믿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복을 못받은 것이기 때문인데 참 불행한 일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은혜가 넘치고 육신적으로는 평강이 넘쳐서 영육간의 온전한 축복인 전인적인 축복, 이것이 가장 귀한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축복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복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이 성경 아닙니까?(고후 8:9) 축복의 복음은 직분의 축복, 관계의 축복 그리고 전인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2. 감사의 복음(3-5절)
첫째, 믿음에 대한 감사(3-4절 상반절)
3절과 4절 상반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가 기도할 때마다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원인과 내용은 바로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감사할 조건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의 다른 조건은 다 가졌는데도 믿음이 없다 혹은 믿음이 잘 되질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것을 다 가지고도 믿음이 없다고 할때 다 가진 이 세상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복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이 세상것은 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 좋고 거기에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있다고 할 때 더 이상 감사할 조건이 없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믿음은 복 중에 최고의 복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 중에 첫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이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예수 밖에서 하나님을 믿었다가 큰 변을 당했고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몹쓸 인간이요,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사울이었던 바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는 대답을 듣고 거기서 거꾸러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후부터 예수님의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 하나님께 믿음을 가졌다가 이렇게 혼이 난 후에 골로새 교인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안에 있는 믿음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사랑에 대한 감사(4절 하반절)
4절 하반절에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라고 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말재간이 좋아서 말 재주를 잘 부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준 말 가운데 '사랑' 이라는 것은 한마디 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해도 사랑이고, 아내를 사랑해도 사랑이고, 친구나 제 자식을 사랑해도 사랑이라고 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남녀간의 사랑을 말할 때는 '에로스' 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는 번역을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에로스라는 말은 한 번도 안나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할 때, 어머니가 딸을 사랑할 때 즉 부모자녀간에 사랑할 때는 '스톨케' 라는 말을 씁니다. 이 스톨케라는 말도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 번역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는 꼭 이 말을 쓰는데 이 스톨케라는 말도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안나옵니다. 세번째로는 친구와 친구사이에 사랑을 이야기할 때 '휠로스' 라고 합니다. 이 말도 역시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는 번역할 수 없습니다.
네번째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 "아가페"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는 전부 손해보는 사랑입니다. 밑지는 사랑이요, 베푸는 사랑이요,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페라는 말은 "희생적인 사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사랑이라고 번역하지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번역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너희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라는 귀절속에 아가페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전부 손해보고 밑지고 희생하는 사랑을 너희도 나누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너를 위해서 내가 손해보고, 너를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너를 위해서 내가 항상 밑진다는 그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교회 분위기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골로새 교회의 분위기가 뜨겁고 간절하고 좋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회 즉 이런 사랑이 있는 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 때문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부산 지방에선 2년째 교회 안에서 난장판이 벌어진면서 싸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때문에 전국적으로 전도가 안될 정도입니다. 지난 8월 그 교회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장면을 전부 비디오로 찍은 테잎 두 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내가 보아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교회란 싸우면 믿음을 다 잃어 버리고 마귀만 춤을 춥니다. 여기에 비해 골로새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내가 손해보고 내가 밑질 때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좋은 골로새 교회와 같은 교회에서 믿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너희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이것은 사랑에 대한 바울의 감사입니다.
셋째, 소망에 대한 감사(5절)
5절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에 참 숨은 학자요, 훌륭한 분인데도 그 이름이 묻혀 있는 분이 계십니다. 이성휘 박사(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요즘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양 지방에서 피난오신 연세 많으신 분들은 혹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성휘 목사님은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학을 하고 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나왔습니다. 그 후 숭실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교수를 하시다가 8·15 해방된 후 공산치하에서 6·25사변이 나기 전까지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후에 공산당들에게 붙잡혀 가서 순교를 당하시고 말없이 숨은 순교자가 되셨습니다.
그 분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제가 진남포에서 비석리 교회를 다녔는데 한번은 낮 예배 시간에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한달 반을 걸려 미국으로 가고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너무 좋았으나 날이 갈수록 자꾸만 불안해 졌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미국 땅이 가까워 질수록 점점 생기가 나며 좋아하고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는 미국이 전혀 생소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되지만 그 친구는 부모님이 먼저 미국에 이민을 가 계셨기 때문었습니다. 그 부모님이 이민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숭실대학을 졸업하면 미국에 와서 공부를 계속하되 한국에서 먼저 배우고 한국혼을 키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열심히 공부해서 숭실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부모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시니 그 친구는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미국이 전혀 생소하고 또 불안하여 애가 탔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가 많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미국 땅이 아무리 좋기로 하늘 나라보다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갈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다 준비를 해놓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하늘나라가 가까와 올수록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을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불안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함께 설명할 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문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의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바울 사도는 감사하였습니다. 궁극적인 소망이 하늘 나라이기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늘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거기에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소망은 항상 우리에게 새 힘을 주고 있기 때문에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믿음에 대한 감사요 사랑에 대한 감사이며 소망에 대한 감사이어야 합니다.
3. 은혜의 복음(6-8절)
첫째, 깨달음의 은혜(6절 상반절)
6절 상반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깨달음의 은혜를 말하는데 이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은혜를 아무리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이 얼마나 큼 은혜인지 모릅니다. 골로새서 1장을 열 번이나 읽으면서도 내 가슴에 부딪혀 온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뜨거워져 온다거나 또는 열 번이나 읽으며 들으며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말씀의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예배시간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깨달아 질 때에는 즐겁고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이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의 은혜는 큰 축복이요 복 중의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며 이 은혜야말로 믿음의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라남의 은혜(6절 하반절)
6절 하반절에는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자라나는 은혜란 골로새 교인들처럼 믿음이 자라고 또 자라 충만해져서 자기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 교회까지 소문이 퍼진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웃 교회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골로새 교인들처럼 믿어야겠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골로새 교회는 지금 성경공부에 불이 붙었고, 기도에 불이 붙었으며, 전도에 불이 붙어서 이웃 교회들에게 그 불이 번져 나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의 본이 큰 영향을 주며 자라나서 전세계에 열매를 맺고 맺어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날 골로새 교회의 그 믿음 생활의 은혜가 전 세계에 그리고 온 천하에 영향을 준것처럼 우리 광성교회의 믿음과 은혜가 서울 장안에 그리고 전 세계에 퍼져나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자라남의 은혜인 것입니다.
셋째, 잘 만남의 은혜(7-8절)
7절과 8절에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 만남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만남들을 경험합니다. 어려서 태어날 적에는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조금 크면 친구를 만납니다. 그 다음엔 결혼을 해서 남편을 만나고, 아내를 만납니다. 학교에 가서는 스승을 만나고 사업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을 상대해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서 살아가긴 하는데 잘 만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 교회를 보십시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라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입니다. 이 에바브로는 사도 바울에게서 전도를 받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였던 것입니다.
에바브라가 다른 데에 갔으면 큰 영광을 받고 또 대접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가서 헌신하고 희생하였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바울 사도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전해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에바브라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 너희 고향 출신 중에서 이런 사람이 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잘 만나는 은혜가 바로 큰 축복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에바브라와 같은 스승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라고 하는 스승을 만난 것을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은헤 중의 은혜요 축복인 줄 믿으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축복의 복음과 감사의 복음 그리고 은혜의 복음인 이 세가지의 복음이 바로 우리가 평생 받아 즐길 수 있으며 누릴 수 있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이요 복음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5절의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는 말씀 그대로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 정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이라 할 때는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그 말 자체의 뜻은 '복된 소식'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된 소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도 하고, 들어왔고, 또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즉 예수님의 말씀만이 복음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곧 복음이며 예수님 전부가 복음입니다. 가령 나에게는 가장 믿음직스런 남편이 있습니다. 이때 그 남편이 나에게는 큰 복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복인데 남편이 하는 말만 나에게 복이겠습니까? 남편 자체가 복입니다. 또 가장 사랑스런 아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말만이 복일 수는 없습니다. 아내 전부가 나의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말씀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부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기에 오늘은 『복음 진리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축복의 복음(1-2절)
첫째, 직분의 축복(1절)
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이 가장 큰 영광이요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에는 장로라는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직분은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존속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기를 위해 주셨던 직분은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는 장로라는 직분만 있습니까? 그것은 대표적인 기록일 뿐이고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셨던 모든 직분은 다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의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직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천하에 있는 금덩어리를 다 중다고 하여도 사도라는 직분은 결코 바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엄청난 유산도 다 포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으며 또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요, 바리새파 중에서도 바리새파인지라 그 당시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명예와 부를 다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직 하나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도직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큰 축복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축복인 줄 알아서 바울 사도처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관계의 축복(2절 상반절)
2절에 보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실한 형제란 말은 곧 믿음의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도' 와 '믿음의 형제' 라는 말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형제라고 하는 말 속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너와 나와의 관계에서 주어진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너와 나와의 관계, 이 관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은 관계성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처녀와 총각이 있습니다. 처녀와 총각이 전혀 관계가 없을 때는 완전히 남남입니다. 그러나 처녀와 총각이 관계를 가지게 되면 아내와 남편이 되고 부부가 됩니다. 부부가 되면 촌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1촌이라는 촌수가 있고 형제 사이는 2촌이 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리 가까워도 옷을 벗은 상태가 되면 서로가 부끄러워 합니다. 또 어머니와 딸 사이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부부지간에는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촌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또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원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앞에 지은 죄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가 되어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이 죄는 마귀에 속하는 것이며 마귀는 또한 지옥에 속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히 마귀에 속한 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옥의 자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엡 2:3)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만민 중에서 선택하사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 영이 생명의 근원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즉 부자 관계가 이루어 집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도라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성도가 됩니다. 이런 새로운 관계를 어디가서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성도라는 이름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큰 축복인지 모르고 또 성도들끼리는 믿음의 형제가 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 자녀지간의 관계는 세상에 살 동안 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내 아내 네 아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 동안만 아내와 남편의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의 관계는 영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며 또한 우리는 성도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관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관계의 축복이 그렇게 귀하고 고맙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고 또 형제가 아니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의 영으로 형제가 되었다는 이 새로운 관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전인적인 축복(2절 하반절)
2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은 두가지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없는 육신뿐이라면 이것은 송장입니다. 짐승과 다름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없는 영이라면 역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과 육이 합쳐질 때에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두 축복을 받을 때 완전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영적으로 받는 축복을 은혜라 했고, 육신적으로 받는 축복을 평강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영적으로는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육신적으로 축복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혹 영적인 축복은 받았어도 육신적인 축복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축복은 많이 받았는데 십수 년을 예수 믿었어도 미지근해서 안믿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복을 못받은 것이기 때문인데 참 불행한 일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은혜가 넘치고 육신적으로는 평강이 넘쳐서 영육간의 온전한 축복인 전인적인 축복, 이것이 가장 귀한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축복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복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이 성경 아닙니까?(고후 8:9) 축복의 복음은 직분의 축복, 관계의 축복 그리고 전인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2. 감사의 복음(3-5절)
첫째, 믿음에 대한 감사(3-4절 상반절)
3절과 4절 상반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가 기도할 때마다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원인과 내용은 바로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감사할 조건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의 다른 조건은 다 가졌는데도 믿음이 없다 혹은 믿음이 잘 되질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것을 다 가지고도 믿음이 없다고 할때 다 가진 이 세상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복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이 세상것은 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 좋고 거기에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있다고 할 때 더 이상 감사할 조건이 없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믿음은 복 중에 최고의 복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 중에 첫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이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예수 밖에서 하나님을 믿었다가 큰 변을 당했고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몹쓸 인간이요,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사울이었던 바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는 대답을 듣고 거기서 거꾸러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후부터 예수님의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 하나님께 믿음을 가졌다가 이렇게 혼이 난 후에 골로새 교인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안에 있는 믿음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사랑에 대한 감사(4절 하반절)
4절 하반절에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라고 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말재간이 좋아서 말 재주를 잘 부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준 말 가운데 '사랑' 이라는 것은 한마디 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해도 사랑이고, 아내를 사랑해도 사랑이고, 친구나 제 자식을 사랑해도 사랑이라고 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남녀간의 사랑을 말할 때는 '에로스' 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는 번역을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에로스라는 말은 한 번도 안나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할 때, 어머니가 딸을 사랑할 때 즉 부모자녀간에 사랑할 때는 '스톨케' 라는 말을 씁니다. 이 스톨케라는 말도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 번역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는 꼭 이 말을 쓰는데 이 스톨케라는 말도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안나옵니다. 세번째로는 친구와 친구사이에 사랑을 이야기할 때 '휠로스' 라고 합니다. 이 말도 역시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는 번역할 수 없습니다.
네번째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 "아가페"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는 전부 손해보는 사랑입니다. 밑지는 사랑이요, 베푸는 사랑이요,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페라는 말은 "희생적인 사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사랑이라고 번역하지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번역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너희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라는 귀절속에 아가페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전부 손해보고 밑지고 희생하는 사랑을 너희도 나누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너를 위해서 내가 손해보고, 너를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너를 위해서 내가 항상 밑진다는 그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교회 분위기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골로새 교회의 분위기가 뜨겁고 간절하고 좋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회 즉 이런 사랑이 있는 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 때문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부산 지방에선 2년째 교회 안에서 난장판이 벌어진면서 싸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때문에 전국적으로 전도가 안될 정도입니다. 지난 8월 그 교회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장면을 전부 비디오로 찍은 테잎 두 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내가 보아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교회란 싸우면 믿음을 다 잃어 버리고 마귀만 춤을 춥니다. 여기에 비해 골로새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내가 손해보고 내가 밑질 때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좋은 골로새 교회와 같은 교회에서 믿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너희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이것은 사랑에 대한 바울의 감사입니다.
셋째, 소망에 대한 감사(5절)
5절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에 참 숨은 학자요, 훌륭한 분인데도 그 이름이 묻혀 있는 분이 계십니다. 이성휘 박사(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요즘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양 지방에서 피난오신 연세 많으신 분들은 혹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성휘 목사님은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학을 하고 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나왔습니다. 그 후 숭실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교수를 하시다가 8·15 해방된 후 공산치하에서 6·25사변이 나기 전까지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후에 공산당들에게 붙잡혀 가서 순교를 당하시고 말없이 숨은 순교자가 되셨습니다.
그 분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제가 진남포에서 비석리 교회를 다녔는데 한번은 낮 예배 시간에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한달 반을 걸려 미국으로 가고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너무 좋았으나 날이 갈수록 자꾸만 불안해 졌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미국 땅이 가까워 질수록 점점 생기가 나며 좋아하고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는 미국이 전혀 생소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되지만 그 친구는 부모님이 먼저 미국에 이민을 가 계셨기 때문었습니다. 그 부모님이 이민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숭실대학을 졸업하면 미국에 와서 공부를 계속하되 한국에서 먼저 배우고 한국혼을 키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열심히 공부해서 숭실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부모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시니 그 친구는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미국이 전혀 생소하고 또 불안하여 애가 탔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가 많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미국 땅이 아무리 좋기로 하늘 나라보다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갈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다 준비를 해놓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하늘나라가 가까와 올수록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을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불안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함께 설명할 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문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의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바울 사도는 감사하였습니다. 궁극적인 소망이 하늘 나라이기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늘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거기에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소망은 항상 우리에게 새 힘을 주고 있기 때문에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믿음에 대한 감사요 사랑에 대한 감사이며 소망에 대한 감사이어야 합니다.
3. 은혜의 복음(6-8절)
첫째, 깨달음의 은혜(6절 상반절)
6절 상반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깨달음의 은혜를 말하는데 이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은혜를 아무리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이 얼마나 큼 은혜인지 모릅니다. 골로새서 1장을 열 번이나 읽으면서도 내 가슴에 부딪혀 온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뜨거워져 온다거나 또는 열 번이나 읽으며 들으며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말씀의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예배시간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깨달아 질 때에는 즐겁고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이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의 은혜는 큰 축복이요 복 중의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며 이 은혜야말로 믿음의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라남의 은혜(6절 하반절)
6절 하반절에는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자라나는 은혜란 골로새 교인들처럼 믿음이 자라고 또 자라 충만해져서 자기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 교회까지 소문이 퍼진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웃 교회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골로새 교인들처럼 믿어야겠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골로새 교회는 지금 성경공부에 불이 붙었고, 기도에 불이 붙었으며, 전도에 불이 붙어서 이웃 교회들에게 그 불이 번져 나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의 본이 큰 영향을 주며 자라나서 전세계에 열매를 맺고 맺어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날 골로새 교회의 그 믿음 생활의 은혜가 전 세계에 그리고 온 천하에 영향을 준것처럼 우리 광성교회의 믿음과 은혜가 서울 장안에 그리고 전 세계에 퍼져나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자라남의 은혜인 것입니다.
셋째, 잘 만남의 은혜(7-8절)
7절과 8절에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 만남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만남들을 경험합니다. 어려서 태어날 적에는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조금 크면 친구를 만납니다. 그 다음엔 결혼을 해서 남편을 만나고, 아내를 만납니다. 학교에 가서는 스승을 만나고 사업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을 상대해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서 살아가긴 하는데 잘 만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 교회를 보십시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라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입니다. 이 에바브로는 사도 바울에게서 전도를 받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였던 것입니다.
에바브라가 다른 데에 갔으면 큰 영광을 받고 또 대접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가서 헌신하고 희생하였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바울 사도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전해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에바브라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 너희 고향 출신 중에서 이런 사람이 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잘 만나는 은혜가 바로 큰 축복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에바브라와 같은 스승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라고 하는 스승을 만난 것을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은헤 중의 은혜요 축복인 줄 믿으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축복의 복음과 감사의 복음 그리고 은혜의 복음인 이 세가지의 복음이 바로 우리가 평생 받아 즐길 수 있으며 누릴 수 있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이요 복음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