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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믿음 (삿11:34-40)
현재 미국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대표적인 단체가운데 ‘미국총기협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협회는 1871년 남북전쟁이후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표적인 보수단체입니다. 현재 43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면서 정계에 가장 많은 정치자금을 퍼붓는 이익단체요, 실질적인 파워단체입니다. 실례로 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 때 백악관 공보비서 제임스 브래디가 머리에 총탄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 후, 총기구입 이유 명시와 전과 조회 의무화를 규정한 소위 ‘브래디법’이 통과됐으나 이 협회의 막강한 로비력에 부딪쳐 위헌판결을 받은바 있습니다. 또 2000년 미국 대선 때는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민주당의 앨 고어후보 대신, 총기휴대 권리를 지지했던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를 밀어 당선시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미국을 움직이는 실세중의 실세로서 정치인들이 가장 눈치를 많이 보고, 무서워하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모든 국민은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함으로서 개인과 가족을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지원으로 미국은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단돈 2만원이면 얼마든지 총기를 구입합니다. 현재 총기의 숫자가 2억 5천 개를 넘겼습니다. 미국인구와 같은 숫자입니다. 특히 911 테러 이후에 총기판매량이 30% 가량 늘었다고 합니다. 총기규제가 안되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총기를 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총기소지가 미국국민들의 개인과 가족을 보호하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한해 총기사고로 약 3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4천명은 어린아이입니다. 지금도 3시간에 한 명은 총기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총이 자기를 보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처음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은 하나님만이 보호하고 지켜주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빠지고 권력이, 돈이, 무기가 자기를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워진 나라인데 점점 하나님은 빠지고 삶에서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것만이 위험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하고, 믿음이 우리를 지킵니다. 그런 관점에서 믿음을 생각하고, 한 시대를 살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오늘은 삼손에 이어 ‘입다’라는 사사입니다. 입다는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첫째, 어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가운데 언급된 사사는 모두 4명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 볼 입다는 4명 가운데, 아니 모든 사사가운데 가장 어려운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그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있었는가에 대하여 11장 초반부에 몇 가지로 알려줍니다. 우선, 그는 서자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었으나 다른 여자를 좋아하였고,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입다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기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생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점잖은 해석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창녀입니다. 입다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불우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버린 자식이었고, 그의 어머니의 신분으로 늘 좋지 않은 시선 속에서 자라나야만 했습니다. 입다의 어려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합니다. 그의 형제들이 입다를 좋게 볼 리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눈치를 주고, 구박하고,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당시 기생의 자녀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상속만이 아니라 집에서 쫓아내도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입다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머문 곳은 돕이라는 땅이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잡류들 소위 깡패와 함께 생활합니다. 모두가 가족과 사회의 불만을 품고 집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거기에서 입다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며 밑바닥의 인생을 삽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입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다가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에게 신앙이 들어가자 그의 어둡고 추악한 과거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삐뚤어서 도저히 회복되기가 힘든 꼬인 인생, 버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아무리 팔자와 같은 참담한 운명이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든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어떤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고, 심지어는 운명도, 팔자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운명을 탓하고, 팔자를 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처지와 형편을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생각하며 체념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환경이나 운명이나 팔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얼마든지 팔자를 고칠 수 있고, 운명도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예수 믿고 팔자를 고친 사람들이요,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 아닙니까? 믿음은 바로 이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의 삶에도 종종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되고, 만사가 형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눈물과 한숨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힘들어도 믿음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제 입다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팔자도 고치고, 운명도 바뀌고, 어떤 어려움도 잘 극복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약속을 지키는 믿음입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특이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그의 성급한 맹세입니다. 입다는 사사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암몬 족속과 싸웁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약속을 합니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기를 가장 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맹세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당시 문화와 시대의 배경이 그렇다고 해도 잘 용납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히브리서 11장에 선별하여 언급된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형제들에게 쫓겨나 돕이라는 땅에 살면서 이방인의 관습과 사상에 물들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입다는 암몬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암몬 사람들은 몰렉을 신으로 숭배하고 종종 그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다도 그들과 싸우면서 성급하게 하나님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입다는 성급한 서원을 했더라도 끝까지 약속을 지킵니다. 본문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에 올 때 그를 가장 먼저 영접한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입다는 가슴을 치고 통곡합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는 분명 성급한 서원을 했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돌이키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입다는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킵니다. 약속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특별한 모습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받아드리기 힘든 일입니다. 그는 이처럼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사회가 어려워지고, 시대가 타락할수록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마음이 상하고, 상처받고,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문제요, 지금 시대의 모습입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나 심지어는 나라까지도 제대로 지켜지는 약속이 있는가 보십시오. 아무리 도장을 찍고, 각서를 쓴다하더라도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기에 믿는 자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한 작은 약속도 지키고,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켜야 할 두 번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히 지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한마디로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약속을 하셨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어쩌면 성경이 두껍고 긴 이유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약속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약속할 때와 그것을 이행해야 할 때의 마음이 달라져 지키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혹은 마음은 있어도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말도 잊지 않으시고,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며,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기에 모든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약속을 소홀히 생각하고, 지키지 않으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급히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입다와 같이 약속을 지키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좋은 영향을 주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입다의 귀한 믿음과 함께 사실 딸의 믿음도 알려줍니다. 입다가 자기 딸을 바치려고 결단을 내릴 때 딸은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죽이는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죽는 딸은 더 용감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아버지의 믿음도 뛰어나지만, 딸의 믿음은 더욱 돋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도망가도 벌써 도망갔을 것입니다. 미친 아버지라고 경찰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당시 입다의 딸도 얼마든지 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급한 약속에 왜 자기가 희생되어야 하는지, 사람을 드리는 일에 타당한 것인지, 아무리 약속을 해도 이것을 지키는 것이 도덕과 윤리에 맞는 일인지, 조목조목 따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딸은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사고는 아버지가 치고, 수습은 딸이 한 것입니다. 아버지도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지만, 딸이 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딸이 아버지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딸은 지금까지 살면서 아버지,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딸의 인생과 신앙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입니다. 딸이 어디서 믿음을 생각하고, 알았을까요? 딸이 어디에서 하나님을 알았고, 자존감과 순종을 배웠을까요? 과연 어디에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의 가정, 부모가 아닐까요? 딸은 자라면서 가정에서, 삶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놀라운 신앙을 부모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딸은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부모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창세기 22장에도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도 뛰어나지만, 이삭의 순종도 뛰어납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디서 이런 믿음이 가능합니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대가 이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영향을 받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신앙인이 됩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영향을 받으면 자기도 힘들고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 혼자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난주간 미국에서 들려온 총기사건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너무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끔찍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8년 전에 있었던 콜롬바인 사건의 악몽이 사라지기도 전에,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총기사건이기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더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인은 미국 내에서 소수민족이지만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번 사건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가정과 교회의 영향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아들의 우울한 성격과 정신질환에 대하여 몇 차례 기도부탁을 했고, 자신도 누나도 교회생활을 착실히 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예수를 알았고, 교회를 다녔고, 성경을 접하고 배웠을진대, 결국 좋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보는 이번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문의 논설에 이번 사건을 ‘아메리칸 드림의 참담한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의미 있는 글을 남겼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15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오직 자식들 교육을 위해 부모는 공사장과 세탁소 등에서 일하며 남매를 대학에 보냈지만, 그들의 꿈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정신분석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정신차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다중살인의 폭력적 환상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어느 단계에서 정신적 성장이 정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도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기독교가, 성경이, 부모가, 친구가, 한 사람의 소중한 인격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좋은 영향을 받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영향을 주고,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바로 그것의 기초를 놓는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우리의 새로운 성전, 우리의 자녀교육이 한 인격체를 지속적이고 정상적인 성장을 위한 생명력을 주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는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입다의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믿음, 약속을 지키는 믿음, 그리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승리의 길을 향해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현재 미국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대표적인 단체가운데 ‘미국총기협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협회는 1871년 남북전쟁이후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표적인 보수단체입니다. 현재 43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면서 정계에 가장 많은 정치자금을 퍼붓는 이익단체요, 실질적인 파워단체입니다. 실례로 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 때 백악관 공보비서 제임스 브래디가 머리에 총탄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 후, 총기구입 이유 명시와 전과 조회 의무화를 규정한 소위 ‘브래디법’이 통과됐으나 이 협회의 막강한 로비력에 부딪쳐 위헌판결을 받은바 있습니다. 또 2000년 미국 대선 때는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민주당의 앨 고어후보 대신, 총기휴대 권리를 지지했던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를 밀어 당선시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미국을 움직이는 실세중의 실세로서 정치인들이 가장 눈치를 많이 보고, 무서워하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모든 국민은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함으로서 개인과 가족을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지원으로 미국은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단돈 2만원이면 얼마든지 총기를 구입합니다. 현재 총기의 숫자가 2억 5천 개를 넘겼습니다. 미국인구와 같은 숫자입니다. 특히 911 테러 이후에 총기판매량이 30% 가량 늘었다고 합니다. 총기규제가 안되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총기를 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총기소지가 미국국민들의 개인과 가족을 보호하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한해 총기사고로 약 3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4천명은 어린아이입니다. 지금도 3시간에 한 명은 총기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총이 자기를 보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처음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은 하나님만이 보호하고 지켜주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빠지고 권력이, 돈이, 무기가 자기를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워진 나라인데 점점 하나님은 빠지고 삶에서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것만이 위험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하고, 믿음이 우리를 지킵니다. 그런 관점에서 믿음을 생각하고, 한 시대를 살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오늘은 삼손에 이어 ‘입다’라는 사사입니다. 입다는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첫째, 어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가운데 언급된 사사는 모두 4명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 볼 입다는 4명 가운데, 아니 모든 사사가운데 가장 어려운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그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있었는가에 대하여 11장 초반부에 몇 가지로 알려줍니다. 우선, 그는 서자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었으나 다른 여자를 좋아하였고,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입다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기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생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점잖은 해석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창녀입니다. 입다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불우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버린 자식이었고, 그의 어머니의 신분으로 늘 좋지 않은 시선 속에서 자라나야만 했습니다. 입다의 어려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합니다. 그의 형제들이 입다를 좋게 볼 리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눈치를 주고, 구박하고,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당시 기생의 자녀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상속만이 아니라 집에서 쫓아내도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입다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머문 곳은 돕이라는 땅이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잡류들 소위 깡패와 함께 생활합니다. 모두가 가족과 사회의 불만을 품고 집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거기에서 입다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며 밑바닥의 인생을 삽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입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다가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에게 신앙이 들어가자 그의 어둡고 추악한 과거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삐뚤어서 도저히 회복되기가 힘든 꼬인 인생, 버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아무리 팔자와 같은 참담한 운명이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든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어떤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고, 심지어는 운명도, 팔자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운명을 탓하고, 팔자를 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처지와 형편을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생각하며 체념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환경이나 운명이나 팔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얼마든지 팔자를 고칠 수 있고, 운명도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예수 믿고 팔자를 고친 사람들이요,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 아닙니까? 믿음은 바로 이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의 삶에도 종종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되고, 만사가 형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눈물과 한숨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힘들어도 믿음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제 입다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팔자도 고치고, 운명도 바뀌고, 어떤 어려움도 잘 극복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약속을 지키는 믿음입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특이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그의 성급한 맹세입니다. 입다는 사사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암몬 족속과 싸웁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약속을 합니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기를 가장 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맹세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당시 문화와 시대의 배경이 그렇다고 해도 잘 용납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히브리서 11장에 선별하여 언급된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형제들에게 쫓겨나 돕이라는 땅에 살면서 이방인의 관습과 사상에 물들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입다는 암몬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암몬 사람들은 몰렉을 신으로 숭배하고 종종 그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다도 그들과 싸우면서 성급하게 하나님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입다는 성급한 서원을 했더라도 끝까지 약속을 지킵니다. 본문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에 올 때 그를 가장 먼저 영접한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입다는 가슴을 치고 통곡합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는 분명 성급한 서원을 했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돌이키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입다는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킵니다. 약속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특별한 모습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받아드리기 힘든 일입니다. 그는 이처럼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사회가 어려워지고, 시대가 타락할수록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마음이 상하고, 상처받고,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문제요, 지금 시대의 모습입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나 심지어는 나라까지도 제대로 지켜지는 약속이 있는가 보십시오. 아무리 도장을 찍고, 각서를 쓴다하더라도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기에 믿는 자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한 작은 약속도 지키고,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켜야 할 두 번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히 지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한마디로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약속을 하셨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어쩌면 성경이 두껍고 긴 이유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약속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약속할 때와 그것을 이행해야 할 때의 마음이 달라져 지키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혹은 마음은 있어도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말도 잊지 않으시고,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며,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기에 모든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약속을 소홀히 생각하고, 지키지 않으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급히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입다와 같이 약속을 지키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좋은 영향을 주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입다의 귀한 믿음과 함께 사실 딸의 믿음도 알려줍니다. 입다가 자기 딸을 바치려고 결단을 내릴 때 딸은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죽이는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죽는 딸은 더 용감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아버지의 믿음도 뛰어나지만, 딸의 믿음은 더욱 돋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도망가도 벌써 도망갔을 것입니다. 미친 아버지라고 경찰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당시 입다의 딸도 얼마든지 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급한 약속에 왜 자기가 희생되어야 하는지, 사람을 드리는 일에 타당한 것인지, 아무리 약속을 해도 이것을 지키는 것이 도덕과 윤리에 맞는 일인지, 조목조목 따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딸은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사고는 아버지가 치고, 수습은 딸이 한 것입니다. 아버지도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지만, 딸이 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딸이 아버지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딸은 지금까지 살면서 아버지,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딸의 인생과 신앙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입니다. 딸이 어디서 믿음을 생각하고, 알았을까요? 딸이 어디에서 하나님을 알았고, 자존감과 순종을 배웠을까요? 과연 어디에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의 가정, 부모가 아닐까요? 딸은 자라면서 가정에서, 삶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놀라운 신앙을 부모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딸은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부모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창세기 22장에도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도 뛰어나지만, 이삭의 순종도 뛰어납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디서 이런 믿음이 가능합니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대가 이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영향을 받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신앙인이 됩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영향을 받으면 자기도 힘들고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 혼자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난주간 미국에서 들려온 총기사건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너무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끔찍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8년 전에 있었던 콜롬바인 사건의 악몽이 사라지기도 전에,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총기사건이기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더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인은 미국 내에서 소수민족이지만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번 사건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가정과 교회의 영향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아들의 우울한 성격과 정신질환에 대하여 몇 차례 기도부탁을 했고, 자신도 누나도 교회생활을 착실히 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예수를 알았고, 교회를 다녔고, 성경을 접하고 배웠을진대, 결국 좋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보는 이번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문의 논설에 이번 사건을 ‘아메리칸 드림의 참담한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의미 있는 글을 남겼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15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오직 자식들 교육을 위해 부모는 공사장과 세탁소 등에서 일하며 남매를 대학에 보냈지만, 그들의 꿈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정신분석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정신차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다중살인의 폭력적 환상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어느 단계에서 정신적 성장이 정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도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기독교가, 성경이, 부모가, 친구가, 한 사람의 소중한 인격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좋은 영향을 받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영향을 주고,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바로 그것의 기초를 놓는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우리의 새로운 성전, 우리의 자녀교육이 한 인격체를 지속적이고 정상적인 성장을 위한 생명력을 주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는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입다의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믿음, 약속을 지키는 믿음, 그리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승리의 길을 향해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