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4
믿음으로 에녹은 (히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어느 대학촌 주변에 30층짜리 고층APT가 있었습니다. 그 맨 꼭대기 층에 가난한 세 사람의 대학생이 함께 어울려서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맨 꼭대기층이 값이 제일 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법학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철학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슈퍼마켙에 들러서 간단하게 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정전이 되어서 엘리베이터가 가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리실에 물어보니까 몇 시간 뒤에라야 전기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서,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서 아파트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10층씩 나누어서 자기가 전공하는 과목을 다른 두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먼저 법학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사회에 있어서 질서는 필수적이다. 이 세상에 질서가 없다고 상상해 보아라. 얼마나 혼란스럽겠느냐? 그러니 질서를 잡아주는 법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러면서 그는 법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을 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철학도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만 계속해서 쏟아놓았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철학도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질문들, 자신도 시원하게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학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신학의 우월성에 대해서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다. 그 이유는 신학은 절대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어느덧 꼭대기 30층까지 다 이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신학도가 정신이 번쩍 난 듯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사람들 다 보겠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아파트 문을 여는 열쇠라네."
그들은 관리실에 아파트 열쇠를 맡겨놓고서 그냥 빈손으로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시금 걸어서 밑에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이라는 본향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가 없으면 우리의 인생 길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천국의 열쇠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천국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요3:16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녹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에녹의 믿음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역순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습니다. 5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우리가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길래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습니다.
5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대할 때 언뜻 머리에 연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하면 "노예 해방"이 연상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스데반하면 "천사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하면 "눈물의 선지자"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녹이라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연상이 됩니까? "승천한 사람," 곧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사람"이 연상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창5장에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계보가 일정한 양식에 의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일생을 마무리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가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 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런데 에녹만큼은 예외입니다. 창5:24의 말씀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사람입니다.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운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왕하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엘리야가 그의 제자 엘리사와 더불어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더니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서 하늘로 올리워졌습니다.
요단강 맞은편에서 이 모습을 보던 선지 생도들은 엘리야가 승천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믿기워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휩쓸려 올라갔다가 어디론가 그 시체가 땅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사를 강권했습니다. 엘리야의 시체를 찾기 위해 용사 오십 인을 보냈습니다. 사흘동안이나 엘리야의 시체를 부지런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가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다는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너무나도 극적인 사건입니다. 에녹은 그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에 매여서 더 이상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우리를 결코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의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들도 사망의 권세를 이미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사망을 향해서 담대하게 외칠 수가 있습니다. 고전15:55의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7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물론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사망의 관문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망은 단지 우리를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예수님께서 영광가운데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면,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것처럼 우리 모두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우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에녹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반드시 저 영화로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옮긴다"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에녹이 스스로 옮겨 다닌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의 삶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의 삶을 인도해주시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에녹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들도 반드시 영화로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대소요리문답은 공히 이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이러합니다.
"Me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살지 않아서 쳐다보는 것만 해도 지긋 지긋하다고 이혼을 해버립니다. 이토록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아울러 사람이 누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일입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히 구제를 하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심히 금식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못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에녹아, 나는 너를 쳐다보기만 해도 참으로 기뻐."
그래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우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까? 유다서 14절∼15절의 말씀입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몹시도 타락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에녹은 동시대 사람들의 경건치 않은 일과 경건치 않은 말을 정죄하면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죄악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이었습니다. 경건한 셋의 후예였습니다. 똑같이 아담이 칠세 손으로서 불경건한 가인의 후예가 있었습니다. 라멕이었습니다. 그는 창4:23∼24에서 자기 아내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에녹과 똑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던 라멕은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뽐내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 라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었습니다. 야발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풍성했을 것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잡는 자의 조상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감미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도 기계 문명도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노아의 홍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에녹은 세상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년동안이나 하나님과 더불어서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아벨은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 곧 예배드리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에녹은 믿음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는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Sunday Christian"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명목적인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Everyday Christian"이었습니다. 에녹은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으로 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선생님의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면 선생님이 구원을 얻을까요?"
아이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선생님은 자기반 아이들에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또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구원을 받으려면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교회 와서 유리창이나 닦고 청소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
아이들은 또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요, 저요! 선생님이 구원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먼저 죽으셔야 해요."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일리 있는 말입니다.
에녹은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녹은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의에 대해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녹은 육신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영에 대해서 산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두운 이 세상, 부패한 이 세상에 물들지 맙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도 에녹처럼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들도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물과 배경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에녹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길래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 결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영화로운 천국으로 옮겨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에녹의 믿음의 내용은 어떠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에녹의 믿음을 두 가지로 요약을 했습니다.
첫째,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은 것입니다.
둘째,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믿음의 첫 걸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도 짓고, 나쁜 짓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요즈음 짓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는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관리실에서 환하게 쳐다봅니다. 몰래카메라가 없을 때는 엘리베이터안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코도 후비고, 머리도 가다듬고, 여드름을 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몰래카메라를 통해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점잖은 척 하면서 서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함부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소년원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예배를 인도하던 중 낯이 익은 소년 하나가 보였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소년은 소매치기를 하다가 붙잡혀서 복역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만기 출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소년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 목사님은 그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너 왜 또 들어왔니?"
그러자 소년은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목사님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네가 나 때문에 이곳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냐?"
그 소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출소하자 전에 같이 일하던 형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른 것을 배운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형들과 다시금 소매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매치기를 할 때마다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든지 계셔서 모든 사람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소매치기 할 때마다, 정말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말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자연히 제 손놀림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 목사님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모든 사람을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인색하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그러길래 에녹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300년동안이나 변함없이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어떠한 상을 주십니까?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하난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구속의 은총과 기쁨과 감격을 허락해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도 주십니다. 하늘의 평강도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들입니다.
우리는 롬8:32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셨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왕따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왕따란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왕따를 당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녹처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손 붙들고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어느 대학촌 주변에 30층짜리 고층APT가 있었습니다. 그 맨 꼭대기 층에 가난한 세 사람의 대학생이 함께 어울려서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맨 꼭대기층이 값이 제일 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법학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철학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슈퍼마켙에 들러서 간단하게 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정전이 되어서 엘리베이터가 가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리실에 물어보니까 몇 시간 뒤에라야 전기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서,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서 아파트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10층씩 나누어서 자기가 전공하는 과목을 다른 두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먼저 법학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사회에 있어서 질서는 필수적이다. 이 세상에 질서가 없다고 상상해 보아라. 얼마나 혼란스럽겠느냐? 그러니 질서를 잡아주는 법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러면서 그는 법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을 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철학도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만 계속해서 쏟아놓았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철학도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질문들, 자신도 시원하게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학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신학의 우월성에 대해서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다. 그 이유는 신학은 절대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어느덧 꼭대기 30층까지 다 이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신학도가 정신이 번쩍 난 듯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사람들 다 보겠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아파트 문을 여는 열쇠라네."
그들은 관리실에 아파트 열쇠를 맡겨놓고서 그냥 빈손으로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시금 걸어서 밑에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이라는 본향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가 없으면 우리의 인생 길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천국의 열쇠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천국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요3:16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녹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에녹의 믿음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역순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습니다. 5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우리가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길래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습니다.
5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대할 때 언뜻 머리에 연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하면 "노예 해방"이 연상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스데반하면 "천사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하면 "눈물의 선지자"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녹이라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연상이 됩니까? "승천한 사람," 곧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사람"이 연상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창5장에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계보가 일정한 양식에 의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일생을 마무리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가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 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런데 에녹만큼은 예외입니다. 창5:24의 말씀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사람입니다.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운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왕하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엘리야가 그의 제자 엘리사와 더불어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더니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서 하늘로 올리워졌습니다.
요단강 맞은편에서 이 모습을 보던 선지 생도들은 엘리야가 승천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믿기워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휩쓸려 올라갔다가 어디론가 그 시체가 땅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사를 강권했습니다. 엘리야의 시체를 찾기 위해 용사 오십 인을 보냈습니다. 사흘동안이나 엘리야의 시체를 부지런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가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다는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너무나도 극적인 사건입니다. 에녹은 그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에 매여서 더 이상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우리를 결코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의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들도 사망의 권세를 이미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사망을 향해서 담대하게 외칠 수가 있습니다. 고전15:55의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7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물론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사망의 관문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망은 단지 우리를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예수님께서 영광가운데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면,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것처럼 우리 모두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우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에녹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반드시 저 영화로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옮긴다"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에녹이 스스로 옮겨 다닌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의 삶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의 삶을 인도해주시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에녹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들도 반드시 영화로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대소요리문답은 공히 이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이러합니다.
"Me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살지 않아서 쳐다보는 것만 해도 지긋 지긋하다고 이혼을 해버립니다. 이토록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아울러 사람이 누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일입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히 구제를 하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심히 금식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못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에녹아, 나는 너를 쳐다보기만 해도 참으로 기뻐."
그래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우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까? 유다서 14절∼15절의 말씀입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몹시도 타락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에녹은 동시대 사람들의 경건치 않은 일과 경건치 않은 말을 정죄하면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죄악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이었습니다. 경건한 셋의 후예였습니다. 똑같이 아담이 칠세 손으로서 불경건한 가인의 후예가 있었습니다. 라멕이었습니다. 그는 창4:23∼24에서 자기 아내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에녹과 똑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던 라멕은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뽐내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 라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었습니다. 야발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풍성했을 것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잡는 자의 조상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감미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도 기계 문명도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노아의 홍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에녹은 세상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년동안이나 하나님과 더불어서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아벨은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 곧 예배드리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에녹은 믿음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는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Sunday Christian"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명목적인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Everyday Christian"이었습니다. 에녹은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으로 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선생님의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면 선생님이 구원을 얻을까요?"
아이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선생님은 자기반 아이들에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또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구원을 받으려면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교회 와서 유리창이나 닦고 청소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
아이들은 또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요, 저요! 선생님이 구원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먼저 죽으셔야 해요."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일리 있는 말입니다.
에녹은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녹은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의에 대해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녹은 육신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영에 대해서 산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두운 이 세상, 부패한 이 세상에 물들지 맙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도 에녹처럼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들도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물과 배경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에녹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길래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 결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영화로운 천국으로 옮겨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에녹의 믿음의 내용은 어떠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에녹의 믿음을 두 가지로 요약을 했습니다.
첫째,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은 것입니다.
둘째,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믿음의 첫 걸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도 짓고, 나쁜 짓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요즈음 짓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는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관리실에서 환하게 쳐다봅니다. 몰래카메라가 없을 때는 엘리베이터안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코도 후비고, 머리도 가다듬고, 여드름을 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몰래카메라를 통해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점잖은 척 하면서 서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함부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소년원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예배를 인도하던 중 낯이 익은 소년 하나가 보였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소년은 소매치기를 하다가 붙잡혀서 복역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만기 출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소년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 목사님은 그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너 왜 또 들어왔니?"
그러자 소년은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목사님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네가 나 때문에 이곳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냐?"
그 소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출소하자 전에 같이 일하던 형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른 것을 배운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형들과 다시금 소매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매치기를 할 때마다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든지 계셔서 모든 사람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소매치기 할 때마다, 정말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말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자연히 제 손놀림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 목사님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모든 사람을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인색하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그러길래 에녹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300년동안이나 변함없이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어떠한 상을 주십니까?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하난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구속의 은총과 기쁨과 감격을 허락해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도 주십니다. 하늘의 평강도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들입니다.
우리는 롬8:32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셨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왕따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왕따란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왕따를 당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녹처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손 붙들고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