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4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중국 진나라 때의 고전인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쩌다가 그의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옆집에 사는 아이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의 얼굴표정이나 하는 몸짓을 보아서 자기의 도끼를 훔쳐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무꾼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자기가 잃어 버린 도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은 자기가 실수로 그곳에 도끼를 떨어뜨려 놓고서는 괜히 옆집에 사는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이나 하는 몸짓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댈 아이로는 전연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애당초부터 이 아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나무꾼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가 고쳐야 할 고질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처음으로 왔을 때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의료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양반이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몸에는 심한 종기가 돋아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몸이 아프니까 염치 불구하고 선교사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자기의 환처를 선교사님에게 보이면서, 그는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보시다시피 제 몸에 심한 종기가 생겼습니다. 듣자하니 선교사님에게는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체면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저를 좀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님은 그에게 페니실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개발된 아주 좋은 항생제입니다. 이것을 드시면 몸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서 물었습니다.
"약값은 얼마입니까?"
선교사님은 선교할 목적으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공짜입니다. 그냥 드릴 테니까 집에 가셔서 드십시오."
그는 그것을 받아 쥐고 나오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공짜로 주는 것을 보니까 아무래도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인가보다.'
그러면서 그는 그 귀한 약을 모두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쓸데없는 의심이 일어나서 그 약을 먹지 않았으니 그의 병이 어찌 쉽게 나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다른 대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으면 삽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죽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정탐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 땅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어서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십시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열 정탐꾼은 불신앙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 때문에 축복의 땅을 밟지를 못했습니다. 자기들만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상실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만 불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 이전의 세 인물, 아벨, 에녹, 노아의 믿음을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15:6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믿음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직접적으로 사용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세 인물 아벨, 에녹, 노아에 대해서는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자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의 삶을 믿음의 시각을 통해서 조명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창세기가 직접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의 본시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곳은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속한 메소포타미아지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아브라함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수24:2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그곳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곳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75세였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도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나이에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 나이에 떠나기는 어디를 떠납니까?"
아브라함은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합니까?"
아브라함은 이것저것을 재거나, 따져보거나, 계산하면서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그 즉시 무조건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를 못했지만 이삿짐을 다 챙겨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은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첫 번째의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아니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후손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창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도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자기의 본토를 떠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와 그의 후손을 위한 기업으로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자신의 친척과 아비집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도 택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우리의 갈대아 우르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우리의 가나안은 어디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죄와 우상의 나라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앞서 가시면서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홍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때, 하나님은 홍해를 친히 가르셨습니다. 그들이 주릴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 축복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과학자였던 벤자민 플랭클린은 그의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첫째, 나의 삶이라고 해서 내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내 삶을 온전히 주관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셋째,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만큼 내게는 행복이 있었고, 내게는 성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우리의 믿음에 아름다운 보상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그 땅을 즉시 소유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행7:5에서 스데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 그곳에서 발 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샀던 막벨라 밭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마치 이방인처럼, 외국인처럼 그곳에서 우거했습니다.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지도 못했습니다. 장막에 거하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녔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 이삭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손자 야곱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낙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울려고 내가 왔단 말인가? 웃으려고 내가 왔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늘 머물러 살았습니다. 결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9절 말씀도 역시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을 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지만 언제나 그 땅 안에서 맴 돌았습니다. 비록 기근에 의해서 애굽땅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는 곧 다시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창2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자기의 본토 메소포타미아에 보냈습니다. 자기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그곳에서 구해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종이 떠나면서 물었습니다.
"만일 신붓감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려고 하면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인님의 아들을 제가 그곳으로 데리고 가리이까?"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가지 말지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실 때에 이 땅을 나와 내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니라."
아브라함은 결코 그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생토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야곱 때 야곱의 가족들이 모두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400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다시금 되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두 번째의 아름다운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조급하지 않습니까? 축복도 당장 받아야 되고, 기도의 응답도 당장 받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일생은 고사하고 십 년, 아니 일 년도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처럼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앤드루 존슨이 미국의 17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입니다. 러시아가 미국에 알래스카를 720만 불에 사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그 땅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회에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의 대부분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아니, 우리도 남북전쟁으로 인해서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그런 쓸모없는 눈 덮인 땅을 사서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하는가?"
그때 국무장관 윌리암 슈워드가 나서서 의원들을 잘 설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래스카의 눈 덮인 모습을 보고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땅에 묻혀져 있는 무궁무진한 보물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생각하면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곡한 설득으로 인해 의회가 그 땅을 사는데 동의를 했습니다.
지금의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최고로 큰 주입니다. 소득도 제일 높습니다. 석유를 비롯한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이 땅 속에 매장이 되어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윌리암 슈워드는 긴 안목으로 미래를 꿈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래스카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알래스카의 중앙을 관통하는 큰 고속도로의 이름을 William Seward Highway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히11:1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믿음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머나먼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만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현실에만 안주하지 마십시다.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를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아브라함처럼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을 사모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 새 예루살렘 성, 천성, 곧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행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상의 낙원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땅엣 것에 집착하지 않고 위엣 것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세 번째 믿음이었습니다.
창13장에는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질 때의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롯아,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그러니 네가 좋아하는 쪽을 먼저 택하도록 하여라."
한 쪽은 비옥한 땅입니다. 그러나 한 쪽은 험한 산지입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요단들을 바라보면서 비옥한 땅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험한 산지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연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야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섬기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우에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좌에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행인의식, 나그네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그곳을 목적지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6:19∼21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떠나는 것입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땅에 너무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마십시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남겼던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로 죽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돈을 벌기만 하고 남겨놓고 죽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자기의 말대로 그가 벌어 놓았던 많은 돈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돈을 많이 번 대재벌이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자선사업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고 값있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빌3:20의 말씀대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스스로를 돈 벌레로 격하시키지 맙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하나님의 손 붙들고 날마다 나아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갈대아 우르가 어디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처럼 우직스럽게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비록 더디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놓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우리에게는 최선의 길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날마다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인생길이 때로는 험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아브라함처럼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면서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귀한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중국 진나라 때의 고전인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쩌다가 그의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옆집에 사는 아이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의 얼굴표정이나 하는 몸짓을 보아서 자기의 도끼를 훔쳐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무꾼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자기가 잃어 버린 도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은 자기가 실수로 그곳에 도끼를 떨어뜨려 놓고서는 괜히 옆집에 사는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이나 하는 몸짓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댈 아이로는 전연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애당초부터 이 아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나무꾼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가 고쳐야 할 고질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처음으로 왔을 때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의료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양반이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몸에는 심한 종기가 돋아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몸이 아프니까 염치 불구하고 선교사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자기의 환처를 선교사님에게 보이면서, 그는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보시다시피 제 몸에 심한 종기가 생겼습니다. 듣자하니 선교사님에게는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체면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저를 좀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님은 그에게 페니실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개발된 아주 좋은 항생제입니다. 이것을 드시면 몸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서 물었습니다.
"약값은 얼마입니까?"
선교사님은 선교할 목적으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공짜입니다. 그냥 드릴 테니까 집에 가셔서 드십시오."
그는 그것을 받아 쥐고 나오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공짜로 주는 것을 보니까 아무래도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인가보다.'
그러면서 그는 그 귀한 약을 모두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쓸데없는 의심이 일어나서 그 약을 먹지 않았으니 그의 병이 어찌 쉽게 나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다른 대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으면 삽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죽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정탐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 땅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어서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십시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열 정탐꾼은 불신앙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 때문에 축복의 땅을 밟지를 못했습니다. 자기들만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상실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만 불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 이전의 세 인물, 아벨, 에녹, 노아의 믿음을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15:6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믿음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직접적으로 사용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세 인물 아벨, 에녹, 노아에 대해서는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자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의 삶을 믿음의 시각을 통해서 조명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창세기가 직접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의 본시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곳은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속한 메소포타미아지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아브라함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수24:2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그곳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곳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75세였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도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나이에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 나이에 떠나기는 어디를 떠납니까?"
아브라함은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합니까?"
아브라함은 이것저것을 재거나, 따져보거나, 계산하면서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그 즉시 무조건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를 못했지만 이삿짐을 다 챙겨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은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첫 번째의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아니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후손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창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도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자기의 본토를 떠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와 그의 후손을 위한 기업으로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자신의 친척과 아비집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도 택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우리의 갈대아 우르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우리의 가나안은 어디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죄와 우상의 나라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앞서 가시면서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홍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때, 하나님은 홍해를 친히 가르셨습니다. 그들이 주릴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 축복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과학자였던 벤자민 플랭클린은 그의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첫째, 나의 삶이라고 해서 내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내 삶을 온전히 주관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셋째,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만큼 내게는 행복이 있었고, 내게는 성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우리의 믿음에 아름다운 보상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그 땅을 즉시 소유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행7:5에서 스데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 그곳에서 발 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샀던 막벨라 밭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마치 이방인처럼, 외국인처럼 그곳에서 우거했습니다.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지도 못했습니다. 장막에 거하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녔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 이삭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손자 야곱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낙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울려고 내가 왔단 말인가? 웃으려고 내가 왔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늘 머물러 살았습니다. 결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9절 말씀도 역시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을 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지만 언제나 그 땅 안에서 맴 돌았습니다. 비록 기근에 의해서 애굽땅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는 곧 다시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창2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자기의 본토 메소포타미아에 보냈습니다. 자기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그곳에서 구해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종이 떠나면서 물었습니다.
"만일 신붓감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려고 하면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인님의 아들을 제가 그곳으로 데리고 가리이까?"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가지 말지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실 때에 이 땅을 나와 내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니라."
아브라함은 결코 그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생토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야곱 때 야곱의 가족들이 모두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400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다시금 되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두 번째의 아름다운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조급하지 않습니까? 축복도 당장 받아야 되고, 기도의 응답도 당장 받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일생은 고사하고 십 년, 아니 일 년도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처럼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앤드루 존슨이 미국의 17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입니다. 러시아가 미국에 알래스카를 720만 불에 사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그 땅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회에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의 대부분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아니, 우리도 남북전쟁으로 인해서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그런 쓸모없는 눈 덮인 땅을 사서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하는가?"
그때 국무장관 윌리암 슈워드가 나서서 의원들을 잘 설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래스카의 눈 덮인 모습을 보고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땅에 묻혀져 있는 무궁무진한 보물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생각하면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곡한 설득으로 인해 의회가 그 땅을 사는데 동의를 했습니다.
지금의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최고로 큰 주입니다. 소득도 제일 높습니다. 석유를 비롯한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이 땅 속에 매장이 되어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윌리암 슈워드는 긴 안목으로 미래를 꿈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래스카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알래스카의 중앙을 관통하는 큰 고속도로의 이름을 William Seward Highway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히11:1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믿음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머나먼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만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현실에만 안주하지 마십시다.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를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아브라함처럼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을 사모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 새 예루살렘 성, 천성, 곧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행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상의 낙원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땅엣 것에 집착하지 않고 위엣 것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세 번째 믿음이었습니다.
창13장에는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질 때의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롯아,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그러니 네가 좋아하는 쪽을 먼저 택하도록 하여라."
한 쪽은 비옥한 땅입니다. 그러나 한 쪽은 험한 산지입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요단들을 바라보면서 비옥한 땅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험한 산지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연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야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섬기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우에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좌에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행인의식, 나그네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그곳을 목적지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6:19∼21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떠나는 것입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땅에 너무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마십시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남겼던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로 죽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돈을 벌기만 하고 남겨놓고 죽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자기의 말대로 그가 벌어 놓았던 많은 돈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돈을 많이 번 대재벌이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자선사업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고 값있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빌3:20의 말씀대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스스로를 돈 벌레로 격하시키지 맙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하나님의 손 붙들고 날마다 나아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갈대아 우르가 어디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처럼 우직스럽게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비록 더디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놓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우리에게는 최선의 길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날마다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인생길이 때로는 험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아브라함처럼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면서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귀한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