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4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히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오늘 본문 13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고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얼마나 깊이 명상을 하는지, 그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주변에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공원을 청소하던 사람이 그를 보고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기에 아직도 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소?"
그 소리를 듣고서 쇼펜하우어는 정신이 든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바로 내 문제입니다. 나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요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덧입고 있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곳은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심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주셨습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고, 믿음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마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지병이 악화가 되어서 응급실에 실려 가셨습니다. 목사님은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깨어보니까 자기가 수혈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키고 있는 가족들과 때마침 문병을 온 장로님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숨이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즈음은 피가 부족해서 죽어가는 젊은이들도 많다는데, 나야 곧 죽을 몸이 아니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소중한 피를 집어넣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 그만 합시다."
그러더니 스스로 주삿바늘을 뽑아버렸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 있는 가족들의 손을 한 사람씩 차례대로 잡고서 간절하게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장로님의 손을 붙들고 교회를 위해서 또 교인들을 위해서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얼마 안 있어서 목사님은 평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목사님의 장례식 날, 장로님은 그때의 장면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명설교가였습니다. 목사님은 평소에도 강단에서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만,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훌륭하고 영감있는 설교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런 푯대가 없이 방황하는 방랑자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간략하게 소개를 해 주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들이 보여주었던 나그네 의식입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사모했던 더 나은 본향입니다. 14절∼1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그들이 받게 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16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믿음을 따라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믿음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나그네 의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이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음을 기꺼이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히11:1에서 믿음을 이렇게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오늘 본문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을 어떻게 설명을 했습니까?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똑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삶 속에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봅니다. 명절이 되면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몸은 아직도 고향에 당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으로 이미 마음은 설레고 있습니다. 또 어떤 아가씨가 마음으로 한 총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총각이 그 아가씨에게 구혼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직도 결혼 날짜는 두 달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가씨 마음에는 결혼을 해서 누리는 행복보다도 어쩌면 더 진한 행복감이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약속만 하셨습니다. That was enough!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이미 자신들의 삶 속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장막을 치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꺼이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컨대 창23:4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한 말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또 창47:9입니다. 야곱이 애굽 왕 바로에게 한 말씀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이 나그네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나그네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혀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왕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늘 행복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늘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발사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예, 저는 늘 제 삶에 대해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그 이발사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발사가 어떻게 자기의 삶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아마도 그 이발사는 99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 금화 99냥을 하사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도 달라질 것입니다."
왕은 그 신하의 말을 듣고서 그 이발사를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금화 99냥을 담은 주머니를 하사했습니다. 이발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기뻐하면서 주머니 속에 든 금화를 책상 위에 쏟았습니다. 그리고는 금화의 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아무리 세고 또 세어도 99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 냥을 더해서 100냥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사에 욕심이 생기고 인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줄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행복한 마음이 사라지지 시작했습니다. 눈에는 핏발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얼굴도 수척해졌습니다. 어깨도 축 처져서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은 그도 99의 덫에 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땅에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그네이다. 나는 어차피 빈손으로 가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값있게 다 쓰고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무엇인가 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다 펴고 죽습니다.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인생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여관이다. 그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집에 잠시 묵고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그리고 우리의 연수는 그 집의 전세 기한과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로서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떠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잠깐 가지고 있다가 버려야 할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다. 믿음을 따라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더 나은 본향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4절∼1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본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온 바 본향입니다. 땅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는 과거적인 본향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둘째, 더 나은 본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는 미래적인 본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서 영원토록 살 곳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 지향적입니다. 땅엣 것에 집착합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걸어갈 때를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몸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출애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온 바 애굽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깃 국물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누워 자던 푹신한 잠자리를 그리워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만 일삼았습니다.
롯의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히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하실 때, 자기의 나온 바 자신의 집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과거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의 나온 바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그곳으로 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잠시 애굽 땅에 내려가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모두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두번 다시 그것들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줄달음질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십시다. 과거 지향적인 삶이 아니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생토록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은퇴를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와 퇴직금을 넣어 둔 은행 통장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큰 아들이 장가갈 때 50평짜리에서 35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차액으로 아들 부부에게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몇년 후 그는 딸을 시집 보내면서 다시금 20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는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과 내가 가지고 있는 은행 통장을 상속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죽는 그날, 이 집은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리고 통장에 있는 돈도 내가 천국에 갈 때 노잣돈으로 다 써야겠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아라."
그리고서 그 장로님은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가 건축할 때 하나님께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물론 자녀들도 장로님의 뜻에 기꺼이 따랐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18세기 후반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귀족이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을 본떠서 호숫가에 큰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음악을 몹시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이름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고용했습니다.
어느 여름철 그는 대대적인 축제를 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주를 했습니다. 드디어 축제가 끝났습니다. 단원들은 고향에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 귀족은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를 못하고 그들을 계속 붙들어 놓았습니다.
단원들은 악장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귀족에게 좀 휴가를 요청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악장은 단원들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의 특이한 교향곡을 작곡을 했습니다. 드디어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귀족은 시종 미소를 띤 채 흐뭇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인가 이상한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주자들이 자기의 연주가 끝나면,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서는 슬그머니 악기를 들고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무대 밖으로 퇴장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4악장 맨 마지막에는 바이올린 연주자만 남았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아주 슬픈 가락으로 가냘프게 연주를 하고 끝맺었습니다.
그 귀족은 단원들의 마음을 곧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튿날 단원 모두에게 원하는 휴가를 보내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란츠 죠셉 하이든의 교향곡 제 45번, 일명 "고별교향곡"의 유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늘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우리의 역할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한 사람씩 차례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두신 찬란한 성,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마십시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험난하고 고달플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늘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6절 하반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나그네로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역시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출3:6에서 보는바 대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실력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을 때 그것을 얼마나 자랑거리로 생각을 합니까?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 만 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날마다 동행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고, 우리의 삶 전폭을 책임져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감격스럽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미 그 성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따끔씩 어떤 손님이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귀빈이라고 부릅니다. "귀찮은 빈대"라는 뜻입니다. 말로는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되어 속으로는 내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25:3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곳은 이미 창세 전부터 예비된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이 성은 히11:10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성입니다. 얼마나 영화로운 성이겠습니까?
어떤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일찌기 홀로 되셨습니다. 그는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습니다. 자녀들도 잘 자라서 이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예전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구차한 삶을 계속해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자녀들이 권사님을 찾아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혼자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말고 우리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사십시다."
권사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애원하니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너희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날 위해서 이런 집을 한 채 지어다오. 바닥은 온통 유리로 깔아라. 집의 기둥은 열두 개를 세워라. 그리고 기둥에는 각기 다른 보석을 박도록 하여라. 문도 열 두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문은 진주로 장식을 하도록 해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녀들이 픽 웃었습니다.
"어머니, 농담이시지요?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 권사님의 말씀은 걸작이었습니다.
"왜 그런 집이 없니?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그런 집을 분양받아 놓았다. 나는 곧 그곳에 가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그보다 못한 집으로 이사 가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예루살렘성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찬란한 성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되는 순간, 우리는 그곳에 올라가서 세세무궁토록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십시다.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또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 예루살렘 성, 천성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일은 3.1절입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평안도의 어느 도시에 있는 일본 헌병대의 대장이 부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호통을 쳤습니다.
"만세 주동자들을 얼른 잡아와야 될 것 아니야? 도대체 뭘하고 있어?"
부하들은 시내를 한 바퀴 삥 돌고서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때 만세를 불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헌병대장이 또 다시 호통을 쳤습니다.
"이런 멍청한 친구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라도 잡아오면 될 것 아니야?"
그러자 부하들이 반문을 했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이고, 누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일요일까지는 기다려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헌병대장이 기가 막힌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심한 친구들! 기독교인들은 붙들고 물어보면 자기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아. 그리고 그들은 만세를 불렀으면 불렀다고 정직하게 대답해. 그러니 가서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붙들어 와."
그렇습니다. 3.1운동 때 만세를 부른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만세를 불러서 희생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신의 장막 집을 벗고 나면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길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떳떳하게 자기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따라서 살아왔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을 따라서 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나그네 된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마감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오늘 본문 13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고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얼마나 깊이 명상을 하는지, 그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주변에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공원을 청소하던 사람이 그를 보고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기에 아직도 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소?"
그 소리를 듣고서 쇼펜하우어는 정신이 든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바로 내 문제입니다. 나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요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덧입고 있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곳은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심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주셨습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고, 믿음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마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지병이 악화가 되어서 응급실에 실려 가셨습니다. 목사님은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깨어보니까 자기가 수혈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키고 있는 가족들과 때마침 문병을 온 장로님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숨이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즈음은 피가 부족해서 죽어가는 젊은이들도 많다는데, 나야 곧 죽을 몸이 아니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소중한 피를 집어넣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 그만 합시다."
그러더니 스스로 주삿바늘을 뽑아버렸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 있는 가족들의 손을 한 사람씩 차례대로 잡고서 간절하게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장로님의 손을 붙들고 교회를 위해서 또 교인들을 위해서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얼마 안 있어서 목사님은 평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목사님의 장례식 날, 장로님은 그때의 장면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명설교가였습니다. 목사님은 평소에도 강단에서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만,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훌륭하고 영감있는 설교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런 푯대가 없이 방황하는 방랑자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간략하게 소개를 해 주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들이 보여주었던 나그네 의식입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사모했던 더 나은 본향입니다. 14절∼1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그들이 받게 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16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믿음을 따라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믿음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나그네 의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이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음을 기꺼이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히11:1에서 믿음을 이렇게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오늘 본문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을 어떻게 설명을 했습니까?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똑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삶 속에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봅니다. 명절이 되면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몸은 아직도 고향에 당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으로 이미 마음은 설레고 있습니다. 또 어떤 아가씨가 마음으로 한 총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총각이 그 아가씨에게 구혼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직도 결혼 날짜는 두 달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가씨 마음에는 결혼을 해서 누리는 행복보다도 어쩌면 더 진한 행복감이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약속만 하셨습니다. That was enough!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이미 자신들의 삶 속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장막을 치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꺼이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컨대 창23:4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한 말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또 창47:9입니다. 야곱이 애굽 왕 바로에게 한 말씀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이 나그네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나그네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혀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왕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늘 행복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늘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발사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예, 저는 늘 제 삶에 대해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그 이발사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발사가 어떻게 자기의 삶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아마도 그 이발사는 99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 금화 99냥을 하사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도 달라질 것입니다."
왕은 그 신하의 말을 듣고서 그 이발사를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금화 99냥을 담은 주머니를 하사했습니다. 이발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기뻐하면서 주머니 속에 든 금화를 책상 위에 쏟았습니다. 그리고는 금화의 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아무리 세고 또 세어도 99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 냥을 더해서 100냥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사에 욕심이 생기고 인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줄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행복한 마음이 사라지지 시작했습니다. 눈에는 핏발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얼굴도 수척해졌습니다. 어깨도 축 처져서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은 그도 99의 덫에 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땅에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그네이다. 나는 어차피 빈손으로 가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값있게 다 쓰고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무엇인가 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다 펴고 죽습니다.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인생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여관이다. 그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집에 잠시 묵고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그리고 우리의 연수는 그 집의 전세 기한과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로서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떠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잠깐 가지고 있다가 버려야 할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다. 믿음을 따라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더 나은 본향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4절∼1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본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온 바 본향입니다. 땅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는 과거적인 본향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둘째, 더 나은 본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는 미래적인 본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서 영원토록 살 곳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 지향적입니다. 땅엣 것에 집착합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걸어갈 때를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몸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출애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온 바 애굽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깃 국물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누워 자던 푹신한 잠자리를 그리워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만 일삼았습니다.
롯의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히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하실 때, 자기의 나온 바 자신의 집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과거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의 나온 바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그곳으로 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잠시 애굽 땅에 내려가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모두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두번 다시 그것들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줄달음질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십시다. 과거 지향적인 삶이 아니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생토록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은퇴를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와 퇴직금을 넣어 둔 은행 통장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큰 아들이 장가갈 때 50평짜리에서 35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차액으로 아들 부부에게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몇년 후 그는 딸을 시집 보내면서 다시금 20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는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과 내가 가지고 있는 은행 통장을 상속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죽는 그날, 이 집은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리고 통장에 있는 돈도 내가 천국에 갈 때 노잣돈으로 다 써야겠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아라."
그리고서 그 장로님은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가 건축할 때 하나님께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물론 자녀들도 장로님의 뜻에 기꺼이 따랐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18세기 후반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귀족이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을 본떠서 호숫가에 큰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음악을 몹시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이름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고용했습니다.
어느 여름철 그는 대대적인 축제를 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주를 했습니다. 드디어 축제가 끝났습니다. 단원들은 고향에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 귀족은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를 못하고 그들을 계속 붙들어 놓았습니다.
단원들은 악장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귀족에게 좀 휴가를 요청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악장은 단원들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의 특이한 교향곡을 작곡을 했습니다. 드디어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귀족은 시종 미소를 띤 채 흐뭇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인가 이상한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주자들이 자기의 연주가 끝나면,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서는 슬그머니 악기를 들고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무대 밖으로 퇴장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4악장 맨 마지막에는 바이올린 연주자만 남았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아주 슬픈 가락으로 가냘프게 연주를 하고 끝맺었습니다.
그 귀족은 단원들의 마음을 곧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튿날 단원 모두에게 원하는 휴가를 보내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란츠 죠셉 하이든의 교향곡 제 45번, 일명 "고별교향곡"의 유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늘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우리의 역할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한 사람씩 차례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두신 찬란한 성,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마십시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험난하고 고달플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늘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6절 하반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나그네로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역시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출3:6에서 보는바 대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실력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을 때 그것을 얼마나 자랑거리로 생각을 합니까?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 만 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날마다 동행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고, 우리의 삶 전폭을 책임져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감격스럽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미 그 성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따끔씩 어떤 손님이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귀빈이라고 부릅니다. "귀찮은 빈대"라는 뜻입니다. 말로는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되어 속으로는 내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25:3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곳은 이미 창세 전부터 예비된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이 성은 히11:10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성입니다. 얼마나 영화로운 성이겠습니까?
어떤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일찌기 홀로 되셨습니다. 그는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습니다. 자녀들도 잘 자라서 이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예전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구차한 삶을 계속해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자녀들이 권사님을 찾아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혼자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말고 우리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사십시다."
권사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애원하니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너희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날 위해서 이런 집을 한 채 지어다오. 바닥은 온통 유리로 깔아라. 집의 기둥은 열두 개를 세워라. 그리고 기둥에는 각기 다른 보석을 박도록 하여라. 문도 열 두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문은 진주로 장식을 하도록 해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녀들이 픽 웃었습니다.
"어머니, 농담이시지요?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 권사님의 말씀은 걸작이었습니다.
"왜 그런 집이 없니?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그런 집을 분양받아 놓았다. 나는 곧 그곳에 가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그보다 못한 집으로 이사 가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예루살렘성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찬란한 성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되는 순간, 우리는 그곳에 올라가서 세세무궁토록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십시다.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또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 예루살렘 성, 천성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일은 3.1절입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평안도의 어느 도시에 있는 일본 헌병대의 대장이 부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호통을 쳤습니다.
"만세 주동자들을 얼른 잡아와야 될 것 아니야? 도대체 뭘하고 있어?"
부하들은 시내를 한 바퀴 삥 돌고서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때 만세를 불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헌병대장이 또 다시 호통을 쳤습니다.
"이런 멍청한 친구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라도 잡아오면 될 것 아니야?"
그러자 부하들이 반문을 했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이고, 누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일요일까지는 기다려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헌병대장이 기가 막힌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심한 친구들! 기독교인들은 붙들고 물어보면 자기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아. 그리고 그들은 만세를 불렀으면 불렀다고 정직하게 대답해. 그러니 가서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붙들어 와."
그렇습니다. 3.1운동 때 만세를 부른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만세를 불러서 희생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신의 장막 집을 벗고 나면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길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떳떳하게 자기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따라서 살아왔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을 따라서 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나그네 된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마감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