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4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주후 2세기 초에 이그나티우스라는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돈독한 분이었습니다.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때 로마 황제의 핍박이 심하게 몰려왔습니다. 그는 맨 앞장에서 성도들의 신앙을 독려했습니다. 그러다가 핍박자들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결국은 본보기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형 경기장에서 사나운 들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지기 위해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자기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그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그나티우스를 위한 대대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편지를 받는대로 저를 위한 구명 운동을 중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게 있는 최선의 것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이 뜨거운 순교의 열정을 부디 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제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저를 독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자기에게 있는 최선의 것, 곧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최선의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에게 최선의 존재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도 우리의 모든 것,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막1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성전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연보궤에 돈을 넣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여러 부자들이 많은 돈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달랑 엽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지극히 적은 돈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연보궤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가난한 과부가 제일 많은 것을 넣었도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액적으로 보면 분명 먼저 헌금을 바쳤던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막12:44의 말씀입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넣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것,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미래였습니다. 따라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의 독생자 이삭을 미련없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특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했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받기만을 바라지말고 이제는 아브라함처럼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극심한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승리로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최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였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창22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까? 그를 넘어뜨리기 위함이었습니까? 그의 발걸음을 실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귀한 믿음을 밖으로 끄집어 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위해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하고 난 뒤에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생자 이삭을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그 약속의 내용이 18절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창대하게 되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삭은 장가도 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생자였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욕심의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독생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만 되었습니까? 그는 아들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칼로 목을 내리쳐야 합니다. 팔 다리를 자르고 각을 떠야 합니다. 불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그처럼 끔찍하게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지키고 보호해야 되느냐?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너무나 소중했지만 이삭이 하나님보다도 앞설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런 저런 이삭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삭 때문에 우리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 지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건강 때문에 세상일에 분주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게으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 때문에 오히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등한시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일에 오히려 인색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다시금 결단해야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떠한 이삭이라도 아브라함처럼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겠다는 거룩한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받기를 바라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독생자라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성숙한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100세라는 나이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물론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주여, 구하는대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도 물론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여, 말씀만 하시옵소서. 아브라함이 그의 독생자 이삭을 드린 것처럼, 그 옛날 베다니의 마리아가 자기의 소중한 옥합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깨뜨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저의 모든 것이라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겠나이다."
이 믿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도 더 복이 있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수양 한 마리를 미리 예비하고 기다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받기만을 바라는 초보적인 신앙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으로 더욱더 성숙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정성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빚을 내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개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 주지 않았습니다. 빚이 자꾸 늘어납니다. 그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빚이 자꾸만 늘어납니다. 많은 환자들을 이곳으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 속에 아무래도 자기의 기도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대 장의사가 무턱대고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은 무슨 뜻이 됩니까?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사가 무턱대고 환자를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병들던지 그렇지 않으면 사고를 많이 당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동안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바른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이러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을 사랑하도록 하여라. 너는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게 기쁨과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주도록 노력하여라. 그리고 너의 병원을 통해서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도록 하여라."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다음부터는 돈은 일체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는 환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이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환자를 따뜻하게 잘 보살펴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얼마가지 않아서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업에 크게 힘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무엇인가 받기만을 원하십니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기의 독생자 이삭마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뒤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어떠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자기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삭도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지금 자기 자신이 바쳐지고 있다는 마음으로 숙연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주일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니다.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헌금입니다. 우리는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아니면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듯이 무성의하게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때우려들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 받기만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목숨까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다는 마음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굳게 믿었기에 자기의 독생자 이삭마저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자기의 아들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큰 군대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의 메말라빠진 지팡이, 곧 죽은 나무에서 생명의 싹을 돋아 오르게 하셨던 분이십니다.
19절 하반부의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물론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막지 않으셨으면,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 아들의 목을 내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받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17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는 동사의 시제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동작이 완료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도로 받았을 때,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서 이삭과 더불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Blessed be God who raises the dead,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하나의 비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비유의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는바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극심한 시험을 이겨낸 것처럼 우리들도 믿음으로 얼마든지 우리 눈앞에 있는 난관들을 헤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해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을 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그만 부도가 났습니다. 그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어느 주일 그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설교 제목이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은 마17:20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날따라 목사님은 겨자씨를 직접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성도들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겨자씨는 눈에 겨우 보일듯말듯한 너무나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날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부탁을 해서 겨자씨 한 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겨자씨를 자기 명함 뒷면에 스카치 테이프로 단단히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낙심이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겨자씨를 꺼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셨지? 그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자 믿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당하고 있는 환난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겠지.'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낙심하지 않고 그 겨자씨를 보면서 자기의 믿음을 굳게 지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새로운 용기를 얻고 다시금 일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크게 성공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극심한 시련을 극복하시고 다시금 사업에 크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 속에서 겨자씨를 꺼내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낙심하지 않고 겨자씨를 보면서 제 믿음을 굳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 믿음에 아름다운 보상을 주셨습니다. 저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눈앞에 절망의 산이 놓여 있습니까? 그 산의 높이를 재면서, 그 크기를 바라보면서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절망의 산 가운데 커다란 희망의 터널을 뚫어버리십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서 우리 눈앞에 있는 절망의 산을 믿음의 깊은 바다 속에 던져버리십시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 시온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보여주는 세 가지의 특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시다. 둘째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성숙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자꾸 받기만을 바라지말고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극심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환난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뒤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 뒤에는 이삭의 아들 야곱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 뒤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누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귀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귀한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주후 2세기 초에 이그나티우스라는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돈독한 분이었습니다.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때 로마 황제의 핍박이 심하게 몰려왔습니다. 그는 맨 앞장에서 성도들의 신앙을 독려했습니다. 그러다가 핍박자들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결국은 본보기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형 경기장에서 사나운 들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지기 위해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자기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그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그나티우스를 위한 대대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편지를 받는대로 저를 위한 구명 운동을 중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게 있는 최선의 것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이 뜨거운 순교의 열정을 부디 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제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저를 독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자기에게 있는 최선의 것, 곧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최선의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에게 최선의 존재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도 우리의 모든 것,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막1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성전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연보궤에 돈을 넣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여러 부자들이 많은 돈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달랑 엽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지극히 적은 돈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연보궤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가난한 과부가 제일 많은 것을 넣었도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액적으로 보면 분명 먼저 헌금을 바쳤던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막12:44의 말씀입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넣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것,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미래였습니다. 따라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의 독생자 이삭을 미련없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특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했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받기만을 바라지말고 이제는 아브라함처럼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극심한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승리로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최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였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창22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까? 그를 넘어뜨리기 위함이었습니까? 그의 발걸음을 실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귀한 믿음을 밖으로 끄집어 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위해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하고 난 뒤에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생자 이삭을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그 약속의 내용이 18절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창대하게 되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삭은 장가도 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생자였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욕심의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독생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만 되었습니까? 그는 아들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칼로 목을 내리쳐야 합니다. 팔 다리를 자르고 각을 떠야 합니다. 불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그처럼 끔찍하게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지키고 보호해야 되느냐?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너무나 소중했지만 이삭이 하나님보다도 앞설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런 저런 이삭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삭 때문에 우리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 지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건강 때문에 세상일에 분주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게으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 때문에 오히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등한시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일에 오히려 인색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다시금 결단해야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떠한 이삭이라도 아브라함처럼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겠다는 거룩한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받기를 바라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독생자라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성숙한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100세라는 나이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물론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주여, 구하는대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도 물론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여, 말씀만 하시옵소서. 아브라함이 그의 독생자 이삭을 드린 것처럼, 그 옛날 베다니의 마리아가 자기의 소중한 옥합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깨뜨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저의 모든 것이라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겠나이다."
이 믿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도 더 복이 있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수양 한 마리를 미리 예비하고 기다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받기만을 바라는 초보적인 신앙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으로 더욱더 성숙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정성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빚을 내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개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 주지 않았습니다. 빚이 자꾸 늘어납니다. 그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빚이 자꾸만 늘어납니다. 많은 환자들을 이곳으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 속에 아무래도 자기의 기도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대 장의사가 무턱대고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은 무슨 뜻이 됩니까?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사가 무턱대고 환자를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병들던지 그렇지 않으면 사고를 많이 당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동안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바른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이러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을 사랑하도록 하여라. 너는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게 기쁨과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주도록 노력하여라. 그리고 너의 병원을 통해서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도록 하여라."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다음부터는 돈은 일체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는 환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이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환자를 따뜻하게 잘 보살펴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얼마가지 않아서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업에 크게 힘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무엇인가 받기만을 원하십니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기의 독생자 이삭마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뒤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어떠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자기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삭도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지금 자기 자신이 바쳐지고 있다는 마음으로 숙연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주일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니다.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헌금입니다. 우리는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아니면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듯이 무성의하게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때우려들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 받기만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목숨까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다는 마음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굳게 믿었기에 자기의 독생자 이삭마저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자기의 아들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큰 군대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의 메말라빠진 지팡이, 곧 죽은 나무에서 생명의 싹을 돋아 오르게 하셨던 분이십니다.
19절 하반부의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물론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막지 않으셨으면,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 아들의 목을 내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받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17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는 동사의 시제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동작이 완료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도로 받았을 때,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서 이삭과 더불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Blessed be God who raises the dead,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하나의 비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비유의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는바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극심한 시험을 이겨낸 것처럼 우리들도 믿음으로 얼마든지 우리 눈앞에 있는 난관들을 헤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해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을 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그만 부도가 났습니다. 그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어느 주일 그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설교 제목이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은 마17:20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날따라 목사님은 겨자씨를 직접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성도들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겨자씨는 눈에 겨우 보일듯말듯한 너무나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날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부탁을 해서 겨자씨 한 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겨자씨를 자기 명함 뒷면에 스카치 테이프로 단단히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낙심이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겨자씨를 꺼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셨지? 그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자 믿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당하고 있는 환난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겠지.'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낙심하지 않고 그 겨자씨를 보면서 자기의 믿음을 굳게 지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새로운 용기를 얻고 다시금 일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크게 성공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극심한 시련을 극복하시고 다시금 사업에 크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 속에서 겨자씨를 꺼내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낙심하지 않고 겨자씨를 보면서 제 믿음을 굳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 믿음에 아름다운 보상을 주셨습니다. 저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눈앞에 절망의 산이 놓여 있습니까? 그 산의 높이를 재면서, 그 크기를 바라보면서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절망의 산 가운데 커다란 희망의 터널을 뚫어버리십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서 우리 눈앞에 있는 절망의 산을 믿음의 깊은 바다 속에 던져버리십시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 시온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보여주는 세 가지의 특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시다. 둘째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성숙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자꾸 받기만을 바라지말고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극심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환난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뒤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 뒤에는 이삭의 아들 야곱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 뒤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누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귀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귀한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