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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라 (시편44:1-8,히12:17-31)
오늘의 본문인 시편 44편에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칼이나 활 즉 강력한 무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지한 것은 내 활이 아닙니다. 나에게 승리를 안겨 준 것은 내 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적에게서 승리를 얻게 하셨으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하느님만 자랑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하렵니다. (셀라) 6-8
구약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런 전쟁관이 지배적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이 전혀 군대도 무기도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군대도 만들고 좋은 무기도 준비하였지만,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강력한 군대나 무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신앙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적에게서 승리를 얻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전쟁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급하여 가나안을 점령할 때부터 발전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라 하여 '거룩한 전쟁'(聖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전쟁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였기에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그렇게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거룩한 전쟁은 이상(理想)일 뿐이고, 현실 정치를 책임진 왕으로서는 그런 이상을 따라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강력한 침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국방력을 염려한 왕이 결국 다른 나라에 원군을 청하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외적은 물리쳤으나 원군을 보내준 나라에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는 등 여러 가지로 더 어려운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이상(理想)을 버린 나라들
현대 국가에서 이런 거룩한 전쟁 개념을 따라 국방정책을 세우는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면서 정치는 신앙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인 가치 판단을 따라 모든 정책을 수립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나라의 정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이상은 실종되고, 국가 이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가치기준을 따라 정책이 결정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이상이 실종된다는 것은, 모든 나라가 함께 세워가야 할 공동의 선은 사라지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진 국가 이익만이 남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강한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약한 나라들은 강한 나라들의 눈치를 보며 그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 생존을 지켜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강한 자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연 모든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힘을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결과로 지금 생태계는 점점 망가지고 지구 자원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결과는 모든 나라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이상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전쟁의 개념은 하느님께서 단순하게 이스라엘 민족의 편을 들어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통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조절하시고 다스리시므로 이 땅에 샬롬 즉 평화를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잘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다함께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한 전쟁의 목적입니다.
이런 거룩한 전쟁의 개념을 곡해(曲解)하여 하느님께서 자기 나라만을 위하여 싸워주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이스라엘이며, 아랍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전(聖戰)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전쟁이 아니라 자기들 민족, 자기 나라만을 위한 전쟁일 뿐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전쟁에 하느님의 이름을 끌어다 붙여서 성전이라고 할 뿐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목적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나라만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뜻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세계 평화의 사명을 주셔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게 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나 아랍 사람들이 말하는 성전과 다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전쟁은 성전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미국을 위한 전쟁에 우리나라도 파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하여서입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국가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전쟁에 찬성하고 파병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고 이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뜻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옳은 것을 따라 정책이 결정될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국가 이익이라는 거의 절대화된 명분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런 현실 명분을 지지하고 나선다는 점입니다. 현실적으로 불이익이 온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외쳐야 마땅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그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한 신앙선조들
오늘 읽어 드린 히브리서 11장 말씀에 보면, 17절서 30절 사이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열 번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모세 등이 모두 "믿음으로"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였다는 말은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고 나갔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어진 현실을 따라 거기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한 행동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현실을 택하지 않고 이상을 택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경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그 자리를 버리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바로의 억압적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광야로 나갔다가 다시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집트로 돌아와 결국은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였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결국 모세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믿음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그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천국의 이상은 이 다음에 이루어질 단순한 꿈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현실임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우치고 계십니다. 모든 정치 경제 문화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와 경제가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이런 성령의 역사를 따라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르게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꾼 기독정치인
1787년 10월 28일 어느 날 저녁, 27세의 한 젊은 영국의 국회의원이 국회 옆에 있는 작은 자기 집에서 무슨 종이를 촛불에 비추어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입니다. 윌버포스는 그 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내 일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국사회의 신앙과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당시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들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1771년에는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총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연간 4만 7000명을 운반하여 이윤은 30∼100%에 이르렀습니다. 그 반면 100t의 노예선에 400명 이상 적재하여 항해 중에 1/6이, 길들이는 동안에 1/3이 죽었다고 하며, 중간 항로에서의 잔혹하고 비참한 실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일명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린 흑인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매입할 때는 보통 럼주·화약·직물(織物) 등을 추장에게 지불하였으나, 1750년 이후에는 노예 수렵(狩獵)의 약탈 거래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의 상인에 의해서 신세계에 운송된 흑인 노예는 300년 동안에 15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열악한 항해 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로 수송 도중 25%가 넘는 많은 흑인들이 사망할 정도였던 살인적 노예 수송이, 단지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유 하나로 영국 국민 모두의 묵인 속에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150여년 동안 약 2백만 명에 이르는 노예를 수송했는데, 이것이 영국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노예제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용인되었으며, 노예 매매는 오늘날 미국의 방위 산업만큼이나 대영제국의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영국의 막강한 상인과 재벌, 넬슨 제독과 같은 식민지 기득권층, 왕족과 귀족들로 구성된 노예제도 지지파들은 어떠한 반대의 소리도 '매국'이라는 이름으로 몰아붙여 잠재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의 윌버포스는 150번이 넘는 대(對) 국회 논쟁을 통해서, 당시 '영국 제일의 웅변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불같은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노예제도는 분명 하느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노예제도를 이대로 용인하고 있다니, 이러고도 오래 살아남은 제국은 역사에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저항은 너무나 강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암살 시도를 비롯해 갖은 중상모략과 비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윌버포스는 위협과 반대에도 기진 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판매, 노예제도를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후광을 업고 그는 여러 차례 법안 제출을 시도하여 마침내 1807년 1월 2일에 '노예매매 폐지법'(The Abolition Act) 통과를 이끌어 내 노예매매 금지를 법제화하는 전 세계 역사상의 획기적인 사건을 성취해 냈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 투쟁하여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느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자그마치 4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노예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윌버포스는 "나로 하여금 영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얻어지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영국이 이렇게 노예제도를 폐지하면서 결국 미국도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고,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를 없앤 것은 역사를 바꾼 것이며,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그대로 실현시킨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작은 거인 윌버포스가 무너뜨린 것은 단지 노예제도만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윌버포스는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복권 시스템을 20년에 걸친 국회 공방 끝에 철폐시켰고, 가난한 이들이 병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했습니다. 과다한 노동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 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계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교육을 시키고 취직까지 알선하는 시스템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부가 실행하게 했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원하여 문맹퇴치에도 적극 앞장섰습니다.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시스템을 대폭 개조하는가 하면, 가난한 이들도 합리적인 재판 과정을 거쳐 벌보다는 갱생에 초점을 두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상류 사회 남자들의 결투제도 폐지에도 앞장섰고, 호화판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봉사에 쏟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윌버포스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서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지지해 준 요한 웨슬레를 중심한 메도디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18세기 영국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감리교인들의 열성적인 투쟁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 폐지라는 역사적 사건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도 크리스찬이 상당수가 있고, 심지어는 목사나 신부들까지 정치에 뛰어 들었지만, 아직 이 정치를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바꾸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한국 교회가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크리스찬 정치인의 힘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이 우리나라 정치에 올바로 반영되도록 크리스찬 정치인을 배출하고 그를 뒤에서 적극 뒷받침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널리 퍼져 있는 우리 정치를 비난하고 한숨짓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치를 바꿀 크리스찬 정치인을 길러 내어, 적극적으로 이 정치를 개혁하도록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역사가 일천한 한국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중심으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윌버포스 같은 훌륭한 기독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윌버포스 같은 훌륭한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은 수 십개의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우리 사회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고 나가는 이상주의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이상을 결코 현실주의자들에게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국가 이익 지상주의에 매어 있는 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는 결코 이 역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 때문에 세계는 더욱 분쟁에 휘말리고, 생태계는 더욱 큰 위기에 몰려 내려갈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이 다음에 죽어 천국 가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천국을 실현하는데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평화를 이 땅에 펼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은 오늘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경제를 새롭게 하며, 정의를 저버린 사회를 바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은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었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오늘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발벗고 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유경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의 본문인 시편 44편에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칼이나 활 즉 강력한 무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지한 것은 내 활이 아닙니다. 나에게 승리를 안겨 준 것은 내 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적에게서 승리를 얻게 하셨으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하느님만 자랑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하렵니다. (셀라) 6-8
구약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런 전쟁관이 지배적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이 전혀 군대도 무기도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군대도 만들고 좋은 무기도 준비하였지만,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강력한 군대나 무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신앙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적에게서 승리를 얻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전쟁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급하여 가나안을 점령할 때부터 발전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라 하여 '거룩한 전쟁'(聖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전쟁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였기에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그렇게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거룩한 전쟁은 이상(理想)일 뿐이고, 현실 정치를 책임진 왕으로서는 그런 이상을 따라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강력한 침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국방력을 염려한 왕이 결국 다른 나라에 원군을 청하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외적은 물리쳤으나 원군을 보내준 나라에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는 등 여러 가지로 더 어려운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이상(理想)을 버린 나라들
현대 국가에서 이런 거룩한 전쟁 개념을 따라 국방정책을 세우는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면서 정치는 신앙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인 가치 판단을 따라 모든 정책을 수립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나라의 정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이상은 실종되고, 국가 이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가치기준을 따라 정책이 결정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이상이 실종된다는 것은, 모든 나라가 함께 세워가야 할 공동의 선은 사라지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진 국가 이익만이 남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강한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약한 나라들은 강한 나라들의 눈치를 보며 그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 생존을 지켜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강한 자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연 모든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힘을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결과로 지금 생태계는 점점 망가지고 지구 자원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결과는 모든 나라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이상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전쟁의 개념은 하느님께서 단순하게 이스라엘 민족의 편을 들어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통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조절하시고 다스리시므로 이 땅에 샬롬 즉 평화를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잘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다함께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한 전쟁의 목적입니다.
이런 거룩한 전쟁의 개념을 곡해(曲解)하여 하느님께서 자기 나라만을 위하여 싸워주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이스라엘이며, 아랍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전(聖戰)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전쟁이 아니라 자기들 민족, 자기 나라만을 위한 전쟁일 뿐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전쟁에 하느님의 이름을 끌어다 붙여서 성전이라고 할 뿐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목적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나라만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뜻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세계 평화의 사명을 주셔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게 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나 아랍 사람들이 말하는 성전과 다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전쟁은 성전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미국을 위한 전쟁에 우리나라도 파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하여서입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국가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전쟁에 찬성하고 파병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고 이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뜻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옳은 것을 따라 정책이 결정될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국가 이익이라는 거의 절대화된 명분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런 현실 명분을 지지하고 나선다는 점입니다. 현실적으로 불이익이 온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외쳐야 마땅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그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한 신앙선조들
오늘 읽어 드린 히브리서 11장 말씀에 보면, 17절서 30절 사이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열 번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모세 등이 모두 "믿음으로"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였다는 말은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고 나갔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어진 현실을 따라 거기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한 행동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현실을 택하지 않고 이상을 택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경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그 자리를 버리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바로의 억압적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광야로 나갔다가 다시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집트로 돌아와 결국은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였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결국 모세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믿음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그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천국의 이상은 이 다음에 이루어질 단순한 꿈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현실임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우치고 계십니다. 모든 정치 경제 문화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와 경제가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이런 성령의 역사를 따라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르게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꾼 기독정치인
1787년 10월 28일 어느 날 저녁, 27세의 한 젊은 영국의 국회의원이 국회 옆에 있는 작은 자기 집에서 무슨 종이를 촛불에 비추어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입니다. 윌버포스는 그 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내 일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국사회의 신앙과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당시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들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1771년에는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총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연간 4만 7000명을 운반하여 이윤은 30∼100%에 이르렀습니다. 그 반면 100t의 노예선에 400명 이상 적재하여 항해 중에 1/6이, 길들이는 동안에 1/3이 죽었다고 하며, 중간 항로에서의 잔혹하고 비참한 실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일명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린 흑인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매입할 때는 보통 럼주·화약·직물(織物) 등을 추장에게 지불하였으나, 1750년 이후에는 노예 수렵(狩獵)의 약탈 거래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의 상인에 의해서 신세계에 운송된 흑인 노예는 300년 동안에 15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열악한 항해 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로 수송 도중 25%가 넘는 많은 흑인들이 사망할 정도였던 살인적 노예 수송이, 단지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유 하나로 영국 국민 모두의 묵인 속에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150여년 동안 약 2백만 명에 이르는 노예를 수송했는데, 이것이 영국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노예제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용인되었으며, 노예 매매는 오늘날 미국의 방위 산업만큼이나 대영제국의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영국의 막강한 상인과 재벌, 넬슨 제독과 같은 식민지 기득권층, 왕족과 귀족들로 구성된 노예제도 지지파들은 어떠한 반대의 소리도 '매국'이라는 이름으로 몰아붙여 잠재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의 윌버포스는 150번이 넘는 대(對) 국회 논쟁을 통해서, 당시 '영국 제일의 웅변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불같은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노예제도는 분명 하느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노예제도를 이대로 용인하고 있다니, 이러고도 오래 살아남은 제국은 역사에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저항은 너무나 강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암살 시도를 비롯해 갖은 중상모략과 비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윌버포스는 위협과 반대에도 기진 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판매, 노예제도를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후광을 업고 그는 여러 차례 법안 제출을 시도하여 마침내 1807년 1월 2일에 '노예매매 폐지법'(The Abolition Act) 통과를 이끌어 내 노예매매 금지를 법제화하는 전 세계 역사상의 획기적인 사건을 성취해 냈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 투쟁하여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느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자그마치 4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노예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윌버포스는 "나로 하여금 영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얻어지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영국이 이렇게 노예제도를 폐지하면서 결국 미국도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고,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를 없앤 것은 역사를 바꾼 것이며,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그대로 실현시킨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작은 거인 윌버포스가 무너뜨린 것은 단지 노예제도만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윌버포스는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복권 시스템을 20년에 걸친 국회 공방 끝에 철폐시켰고, 가난한 이들이 병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했습니다. 과다한 노동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 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계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교육을 시키고 취직까지 알선하는 시스템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부가 실행하게 했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원하여 문맹퇴치에도 적극 앞장섰습니다.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시스템을 대폭 개조하는가 하면, 가난한 이들도 합리적인 재판 과정을 거쳐 벌보다는 갱생에 초점을 두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상류 사회 남자들의 결투제도 폐지에도 앞장섰고, 호화판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봉사에 쏟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윌버포스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서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지지해 준 요한 웨슬레를 중심한 메도디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18세기 영국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감리교인들의 열성적인 투쟁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 폐지라는 역사적 사건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도 크리스찬이 상당수가 있고, 심지어는 목사나 신부들까지 정치에 뛰어 들었지만, 아직 이 정치를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바꾸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한국 교회가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크리스찬 정치인의 힘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이 우리나라 정치에 올바로 반영되도록 크리스찬 정치인을 배출하고 그를 뒤에서 적극 뒷받침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널리 퍼져 있는 우리 정치를 비난하고 한숨짓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치를 바꿀 크리스찬 정치인을 길러 내어, 적극적으로 이 정치를 개혁하도록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역사가 일천한 한국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중심으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윌버포스 같은 훌륭한 기독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윌버포스 같은 훌륭한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은 수 십개의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우리 사회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고 나가는 이상주의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이상을 결코 현실주의자들에게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국가 이익 지상주의에 매어 있는 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는 결코 이 역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 때문에 세계는 더욱 분쟁에 휘말리고, 생태계는 더욱 큰 위기에 몰려 내려갈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이 다음에 죽어 천국 가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천국을 실현하는데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평화를 이 땅에 펼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은 오늘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경제를 새롭게 하며, 정의를 저버린 사회를 바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은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었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오늘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발벗고 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유경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