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
예수의 복음과 기독교 (요 8:31-36)
내일 모레는 광복 6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엊그제는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전시 작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가 어떻게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할 때 맺었던 전시 작전권을 환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보고 한 편에서는 역대 국방장관을 지냈던 분들과 퇴역장성들이 거리로 나와 철회
하라는 데모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그 반대 주장을 하면서 즉시 환수하라는 측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현실이 주전 8세기경 이스라엘 민족이 처했던 환경과 비슷한 환경임을 생각해 보았
습니다.
그 때도 두 파로 나뉘어 북쪽의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바벨론과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
었는가 하면,
북쪽의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애굽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이견이 분분했었습니다.
그때도 선지자들은 두 파로 갈라졌습니다.
제각기 어느 한 쪽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바벨론과 교류협력을 해야 한다는 측과, 아니라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측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한국 교회 목사들 중에도 두 패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국의 목사들 중에서도 북한과 교류 협력을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적극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철저
하게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여 북을 압박하여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편의 주장을 보면서 한 동안 이북에 들어갔던, 그리고 그 일로 감옥에 들어갔던 소설가 황석영씨의
<손님>이란 제목의 작품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그 내용인즉 북한의 공산주의도, 남한의 기독교도 이 땅에 <
손님>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손님>은 <손님>이되 주인의 초청도 받지 않고 멋대로 들어온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손님인 <공
산주의>와 <기독교>가 주인인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 큰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분의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은 황석영씨 뿐만아니라, 한국의 소위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공통점이
라고 봅니다.
저들은 기독교를 외래 종교요, 민족 주체성이나, 자주정신에 걸맞지 않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일어난 종교와 사상을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단군 사상>을 높이는 풍조가 일고 있는 현상이고, <애국가> 대신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국가에는 특정 종교의 신이 들어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얼른 보면 애국적이고 주체성이 뚜렷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
를 잘못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보편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진리>란 어느 민족에게나 합당한 보편타당한 것이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
다.
진리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민족에게서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방하는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이스라엘 민족에서 부터 일어났기에 믿는 것이 아니고, 서양으로 부터 왔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
닙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받아들이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응용하여 받아들여야 합
니다.
<복음> 자체는 영원한 진리이지만, 그 복음을 수용하고 따르는 데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그것이 바로 복음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복음>과 오늘의 <기독교>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가끔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치 민주당에서 나와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던 그 때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전한 <복음>과 오늘의 <기독교>와의 관계를 보면,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처음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때는, 그야말로 네 것 내 것이 없는 <유무상통>의 공동
체를 이루었습니다.
모두 사도들의 발 앞에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가져왔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에 차 있었습니
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회가 이 곳 저 곳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부터 처음 순수했던 <복음>이 시대의 흐
름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변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이어온 복음의 진리는 <기독교회>라는 조직체가 살아남기 위하여 <신학>이 형성되었
고, <교리>화 되면서 부터, 본래적인 것에서 부터 많은 군더더기가 붙게 되었습니다.
특히 21세기를 맞는 오늘 우리 모두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교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복음의 진리가 비본질적인 것들로 더 크게 부각되면서 복음 진리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 보
다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로 오염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기쁨이 영생 얻은 기쁨이 아니라,
잘 되고, 출세 하고, 부자 되는 것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교회 확장을 하고,
그런 의식을 가지고 헌금을 하다 보니,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 손님이 도리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2.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 진리>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본질적인 것들을 되찾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고 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관헌들과 세상의 지성인들이 항상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우리 말 사전에 보면 진리라는 낱말의 뜻은 ‘참된 도리, 바른 이치,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참된 도리이며, 전 인류에게 타당하게 인정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합니다.
사랑은 달리 이해되거나, 달리 표현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능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모든 법 위에 법이고, 모든 것 위에 오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란 것, 그것이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랑은 어떤 민족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 시키려고 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
다.
십자가의 사랑은 영원한 인류의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이 얼마나 이 사랑 안에 거하느냐? 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길은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소식은 인류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3. 그러므로 이 진리가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둠이 지배합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아직도 어둠의 <권력>으로 부터 해방이 되지 못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어둠의 <사상>과 <이념>에서 포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리와 역행하는 죄의 세력들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그 사랑을 실천함에 도리어 거치는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자기 스스로의 만든 성 안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과 <관행> 속에 파묻혀 도리어 죄인들에게 자유함을 주는 대신, 묶어 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지 않고 <말씀>을 <말씀>으로 묶어놓고, <성령>을 <성령>으로 묶어놓고, <헌금
>을 <헌금>으로 묶어 놓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자유가 있고, 기쁨의 평안이 있어야 하겠는데 교회가 세워지면 데모를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 점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교회 부흥은 수평 이동의 수적 증가일 뿐, 죄로 부터의 해방 된 자유함의 증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대교회를 비판하는 자들의 글을 보면 오늘의 교회는 자기들끼리 <종교놀이>를 할 뿐이라고 비판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선배들의 신앙을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저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 였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
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오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
히 거하느니라”(요1서2:15-17) 아멘.
여러분!
광복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둠에서 빛을 다시 찾는 것이 광복의 의미입니다.
아직도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면,
광복은 찾지 못한 형편일 것입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 참 된 광복이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진리로 참 자유인이 되어
샬롬의 생활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광복의 의미입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
내일 모레는 광복 6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엊그제는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전시 작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가 어떻게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할 때 맺었던 전시 작전권을 환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보고 한 편에서는 역대 국방장관을 지냈던 분들과 퇴역장성들이 거리로 나와 철회
하라는 데모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그 반대 주장을 하면서 즉시 환수하라는 측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현실이 주전 8세기경 이스라엘 민족이 처했던 환경과 비슷한 환경임을 생각해 보았
습니다.
그 때도 두 파로 나뉘어 북쪽의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바벨론과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
었는가 하면,
북쪽의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애굽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이견이 분분했었습니다.
그때도 선지자들은 두 파로 갈라졌습니다.
제각기 어느 한 쪽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바벨론과 교류협력을 해야 한다는 측과, 아니라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측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한국 교회 목사들 중에도 두 패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국의 목사들 중에서도 북한과 교류 협력을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적극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철저
하게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여 북을 압박하여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편의 주장을 보면서 한 동안 이북에 들어갔던, 그리고 그 일로 감옥에 들어갔던 소설가 황석영씨의
<손님>이란 제목의 작품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그 내용인즉 북한의 공산주의도, 남한의 기독교도 이 땅에 <
손님>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손님>은 <손님>이되 주인의 초청도 받지 않고 멋대로 들어온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손님인 <공
산주의>와 <기독교>가 주인인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 큰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분의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은 황석영씨 뿐만아니라, 한국의 소위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공통점이
라고 봅니다.
저들은 기독교를 외래 종교요, 민족 주체성이나, 자주정신에 걸맞지 않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일어난 종교와 사상을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단군 사상>을 높이는 풍조가 일고 있는 현상이고, <애국가> 대신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국가에는 특정 종교의 신이 들어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얼른 보면 애국적이고 주체성이 뚜렷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
를 잘못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보편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진리>란 어느 민족에게나 합당한 보편타당한 것이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
다.
진리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민족에게서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방하는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이스라엘 민족에서 부터 일어났기에 믿는 것이 아니고, 서양으로 부터 왔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
닙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받아들이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응용하여 받아들여야 합
니다.
<복음> 자체는 영원한 진리이지만, 그 복음을 수용하고 따르는 데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그것이 바로 복음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복음>과 오늘의 <기독교>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가끔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치 민주당에서 나와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던 그 때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전한 <복음>과 오늘의 <기독교>와의 관계를 보면,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처음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때는, 그야말로 네 것 내 것이 없는 <유무상통>의 공동
체를 이루었습니다.
모두 사도들의 발 앞에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가져왔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에 차 있었습니
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회가 이 곳 저 곳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부터 처음 순수했던 <복음>이 시대의 흐
름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변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이어온 복음의 진리는 <기독교회>라는 조직체가 살아남기 위하여 <신학>이 형성되었
고, <교리>화 되면서 부터, 본래적인 것에서 부터 많은 군더더기가 붙게 되었습니다.
특히 21세기를 맞는 오늘 우리 모두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교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복음의 진리가 비본질적인 것들로 더 크게 부각되면서 복음 진리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 보
다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로 오염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기쁨이 영생 얻은 기쁨이 아니라,
잘 되고, 출세 하고, 부자 되는 것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교회 확장을 하고,
그런 의식을 가지고 헌금을 하다 보니,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 손님이 도리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2.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 진리>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본질적인 것들을 되찾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고 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관헌들과 세상의 지성인들이 항상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우리 말 사전에 보면 진리라는 낱말의 뜻은 ‘참된 도리, 바른 이치,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참된 도리이며, 전 인류에게 타당하게 인정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합니다.
사랑은 달리 이해되거나, 달리 표현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능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모든 법 위에 법이고, 모든 것 위에 오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란 것, 그것이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랑은 어떤 민족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 시키려고 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
다.
십자가의 사랑은 영원한 인류의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이 얼마나 이 사랑 안에 거하느냐? 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길은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소식은 인류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3. 그러므로 이 진리가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둠이 지배합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아직도 어둠의 <권력>으로 부터 해방이 되지 못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어둠의 <사상>과 <이념>에서 포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리와 역행하는 죄의 세력들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그 사랑을 실천함에 도리어 거치는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자기 스스로의 만든 성 안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과 <관행> 속에 파묻혀 도리어 죄인들에게 자유함을 주는 대신, 묶어 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지 않고 <말씀>을 <말씀>으로 묶어놓고, <성령>을 <성령>으로 묶어놓고, <헌금
>을 <헌금>으로 묶어 놓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자유가 있고, 기쁨의 평안이 있어야 하겠는데 교회가 세워지면 데모를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 점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교회 부흥은 수평 이동의 수적 증가일 뿐, 죄로 부터의 해방 된 자유함의 증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대교회를 비판하는 자들의 글을 보면 오늘의 교회는 자기들끼리 <종교놀이>를 할 뿐이라고 비판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선배들의 신앙을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저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 였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
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오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
히 거하느니라”(요1서2:15-17) 아멘.
여러분!
광복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둠에서 빛을 다시 찾는 것이 광복의 의미입니다.
아직도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면,
광복은 찾지 못한 형편일 것입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 참 된 광복이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진리로 참 자유인이 되어
샬롬의 생활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광복의 의미입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