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2
부활의 능력. (고전15::16~22)
우리 주님은 2000여년 전 주일 새벽에 어두움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시간에는 부활의 능력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다루려는 부활의 문제는 기독교의 기초요 핵심이요 어떻게 보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 부활의 교리만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마다 가지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도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부활의 교리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1. 부활의 과학적 증거
부활교리가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형성된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다 그 창시자의 무덤을 크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무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부활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 세상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12절)고 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안과밖에는 우리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의심은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부활을 인정할 어떤 확실한 구체적 증명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반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절설, 도적설, 이거설 등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의 빈 무덤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본 수많은 증인들이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처럼 비겁하였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과학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미국의 우주과학자인 Wehrnher von Braun은 자기가 부활을 믿는 근본적 이유를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존재한 그 무엇도 흔적 없이 살아지는 것을 발견한 적이 없다. 자연에는 결코 사멸이란 것이 없다. 다만 다른 형태로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사용하여 그의 창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습니다. 요11:25절의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대로 우리는 죽은 뒤에 다시 부활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 해 전에 애굽에서 밀봉된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3000년 전 모세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였습니다. 그 시체와 함께 돌처럼 바짝 마른 두어 개의 콩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박물관에 보내어져서 1844년 6월 4일에 심었습니다. 한 달 뒤에 싹이 나서 나중에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3000년 된 콩이 다시 싹이 나듯이 비록 먼지가 되고 흙이 되어도 다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부활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뿌리요, 시작이요, 끝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든 간에 부활신앙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부활을 이론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마치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2. 육체부활을 부인할 때의 결과(13-15절).
우리가 자신의 육체 부활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먼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실제적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부활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열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구체적 증거가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시작하여 나중에 스데반, 심지어 바울과 사도 요한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 두 사람에게 라면 환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라도 한 두 번이라면 그것도 환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데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역사적 사건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설교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헛되게 한다는 말은 [텅 비게 한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설교의 핵심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모든 믿음의 핵심도 부활신앙입니다. 따라서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지난 2000년 동안의 모든 설교는 다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조신앙, 부활신앙, 재림신앙. 그러나 부활신앙은 그 중심이고, 핵심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부인하면 모든 설교가 다 거짓이요 헛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가 다 거짓 증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빌미로 헌금을 거두고, 봉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육체부활을 부인하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6-19절)
(1)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죽은 모든 신자들은 다 “망하였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2)만약 부활이 없다는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19절에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이 없었는데도 있다고 믿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의 권능은 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하는 헌금이나 봉사나 희생이 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다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전부요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3. 부활의 능력은?
우리 예수님은 이천 년 전 바로 오늘 이 새벽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1)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마다 [중생하게]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현재적으로 영적인 부활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는 실제적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게 되고, 고백하게 되고 영접하게 되고 거듭나게 합니다.
(2)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바울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3)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저는 본래 허무주의자였습니다. 6.25 때 의미 없이 고생하는 것을 비관하여 자살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록 부족한 자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로 서원 했던 것입니다.
(4)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는 참으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빛과 소금이 되어 삶의 참 의미에 대한 증거자로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그럼으로 날마다 담대하고, 기쁨으로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우리 주님은 2000여년 전 주일 새벽에 어두움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시간에는 부활의 능력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다루려는 부활의 문제는 기독교의 기초요 핵심이요 어떻게 보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 부활의 교리만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마다 가지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도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부활의 교리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1. 부활의 과학적 증거
부활교리가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형성된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다 그 창시자의 무덤을 크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무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부활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 세상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12절)고 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안과밖에는 우리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의심은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부활을 인정할 어떤 확실한 구체적 증명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반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절설, 도적설, 이거설 등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의 빈 무덤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본 수많은 증인들이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처럼 비겁하였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과학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미국의 우주과학자인 Wehrnher von Braun은 자기가 부활을 믿는 근본적 이유를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존재한 그 무엇도 흔적 없이 살아지는 것을 발견한 적이 없다. 자연에는 결코 사멸이란 것이 없다. 다만 다른 형태로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사용하여 그의 창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습니다. 요11:25절의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대로 우리는 죽은 뒤에 다시 부활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 해 전에 애굽에서 밀봉된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3000년 전 모세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였습니다. 그 시체와 함께 돌처럼 바짝 마른 두어 개의 콩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박물관에 보내어져서 1844년 6월 4일에 심었습니다. 한 달 뒤에 싹이 나서 나중에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3000년 된 콩이 다시 싹이 나듯이 비록 먼지가 되고 흙이 되어도 다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부활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뿌리요, 시작이요, 끝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든 간에 부활신앙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부활을 이론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마치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2. 육체부활을 부인할 때의 결과(13-15절).
우리가 자신의 육체 부활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먼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실제적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부활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열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구체적 증거가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시작하여 나중에 스데반, 심지어 바울과 사도 요한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 두 사람에게 라면 환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라도 한 두 번이라면 그것도 환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데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역사적 사건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설교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헛되게 한다는 말은 [텅 비게 한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설교의 핵심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모든 믿음의 핵심도 부활신앙입니다. 따라서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지난 2000년 동안의 모든 설교는 다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조신앙, 부활신앙, 재림신앙. 그러나 부활신앙은 그 중심이고, 핵심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부인하면 모든 설교가 다 거짓이요 헛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가 다 거짓 증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빌미로 헌금을 거두고, 봉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육체부활을 부인하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6-19절)
(1)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죽은 모든 신자들은 다 “망하였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2)만약 부활이 없다는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19절에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이 없었는데도 있다고 믿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의 권능은 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하는 헌금이나 봉사나 희생이 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다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전부요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3. 부활의 능력은?
우리 예수님은 이천 년 전 바로 오늘 이 새벽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1)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마다 [중생하게]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현재적으로 영적인 부활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는 실제적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게 되고, 고백하게 되고 영접하게 되고 거듭나게 합니다.
(2)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바울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3)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저는 본래 허무주의자였습니다. 6.25 때 의미 없이 고생하는 것을 비관하여 자살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록 부족한 자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로 서원 했던 것입니다.
(4)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는 참으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빛과 소금이 되어 삶의 참 의미에 대한 증거자로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그럼으로 날마다 담대하고, 기쁨으로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