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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산다 (예레미야애가3:19-26)
1997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만든 영화 ‘타이타닉’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견고하며, 호화로운 여객선, 타이타닉 호의 침몰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게이트 윈슬렛’의 사랑 이야기를 훨씬 돋보이게 만든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이야기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224명의 손님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 샘프턴’에서 출항하여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출항한지 3일째 되던 날 큰 빙산과 충돌하여, 4월 15일 새벽 2시 20분쯤 침몰함으로 1,515명이 수장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후에 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클라크’ 부부는 일생을 두고 가장 뜻 깊은 여행을 하기 위하여 ‘타이타닉’호의 티켓을 준비하였습니다. 일곱 명의 자녀를 둔 이들은 대단한 모험과 열의를 가지고 이 날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출항 한 주간 전에 막내아들이 개에게 물렸습니다. 광견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기에 의사는 클라크의 대문에 노란 종이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이 집이 14일간 검역기간 하에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클라크부부는 이런 막내아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타이타닉호는 이들을 남긴 채 출항을 하였습니다. 5일 후에 스코틀랜드 전역이 떠들썩했습니다.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고 했던 그 타이타닉호가 침몰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클라크부부의 아들이 개에게 물리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타이타닉호와 함께 차가운 어름바다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습니다.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두운 면을 보면 인생은 별것 아닌 힘든 것이지만, 밝은 면을 보면 인생은 정말 아름답고 멋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면한 일들이 정말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어떤 면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행복하십니까? 만약에 불행하다고 느끼고 계신다면, 눈을 뜨고 인생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배경은 아주 어둡습니다.
하루 일정에 비교한다면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입니다. 앞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당장 눈앞에 길조차 잘 보이지 않습니다. 유다라는 나라가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집들은 불타버렸습니다. 쓸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포로로 붙잡혀갔고, 사람의 중심이었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은 것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눈물로 예언한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 가운데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1. 사람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3:19,20입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나라는 망하였다고 하는 그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빚어진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습니다. 망하기 전의 정상적인 생활을 도무지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로 인하여 지금 감수해야하는 많은 상처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사실 보다도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나쁜 기억들입니다. 잊지 못하는 그 기억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 때문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립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힘들게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어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과거의 아픈 기억입니다. 현실의 어려움보다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상처 입은 기억, 고통의 기억, 죄의 기억입니다.
상담전문가이신 정태기박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남들이 다 좋아하는 봄이 아주 싫었다고 합니다. 봄만 되면 힘이 없어지고, 입맛이 떨어지고, 삶의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애써 힘을 내어보려고 하지만 헤어나질 못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그가 깨달은 것은 어린 시절 봄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 봄만 되면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고 나면 하루 종일 혼자서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외로웠고, 무서웠고, 배고팠습니다. 하루 종일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저녁까지 그렇게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봄은 그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가는 계절이었기에 봄이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도 그 아픈 기억 때문에 아직도 봄은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여기 정말 삶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시편32:3-7입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에는, 온 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온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내 혀가 여름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고난을 받을 때에, 모두 주께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쳐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를 재난에서 지켜주실 분!
주께서 나를 보호하시니, 나는 소리 높여 주의 구원을 노래하렵니다.”
다윗은 그가 지은 과거의 죄, 그 죄책감 때문에 지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은 없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죄를 토하여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고백으로 쏟아내고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아 용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1:9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 숨어있는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해결을 받으십시오. 용서받을 것은 용서를 받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십시오.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청산해 주셨습니다. 모든 값을 다 지불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슴 깊숙이 숨겨놓은 하나님과 여러분들만이 아는 은밀한 것들을 다 털어놓으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것이 더 이상 삶의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찬송가187입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죄의 빛 흉악하나 희게 되리라. 주홍 빛 같은 네 죄 주홍 빛 같은 네 죄 눈과 같이 희겠네,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불쌍한 죄인들아 오라 하시네. 너희 죄 사해 주사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기억 아니 하시네.”
2.여기에 사람을 힘나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3:21,22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의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지만, 예레미야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다함이 없는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그 끝없는 긍휼”
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망하였어도 희망이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29:10,11,12입니다.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주겠다.
너희로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주의 말이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1)바빌론으로부터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2)너희들의 미래에 번영과 희망을 주겠다.
3)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힘든 고난의 현실에 대한 나쁜 기억은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힘이 솟아납니다.
세계에서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국가의 패배의 날을 기념일로 지킨다고 합니다.
모든 나라들은 승리한 날들을 축하고 기뻐할 때, 유대인들은 패배의 날을 기억하면서 오늘의 새로운 삶의 결의를 다진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이 해방일인 유월절은 이렇게 기념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집트 바로의 노예였다.” “바로에게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이 해방을 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 절기에는 반드시 ‘쓴 나물’을 먹으며, 패배의 쓴잔을 되씹습니다. 그리고 효소를 넣지 않은 ‘딱딱한 빵’을 먹습니다. 패배의 날의 고난을 기억하며, ‘고난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삶은 달걀’을 먹으며, 고난을 받을수록 더 강해지는 민족성을 다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히브리정신에서 예수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십자가에서 출발합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의 은총인 십자가를 믿음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새로운 삶을 다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 속에서 구원의 새벽을 맞고, 고난 속에서 웃음을 배웁니다.
2차 대전 때에 독일의 나찌 군대가 유대인 600만 명을 살해하였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유로 그들은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유대인 가족이 독일 국경에서 독일 출입국 관리와 나눈 대화입니다. 유대인 가장인 아버지가 그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 관리는 모형 지구본을 빙빙 돌리면서 말했습니다.
‘이 나라는 이래서 안 되고, 저 나라는 저래서 안 되고, 또 여기는 사막이라서 안 되고···”
그 때 유대인 가족의 아이가 그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세상에 또 다른 지구는 없나요?”
창세기13:14-18장에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롯이 아브람의 곁을 떠난 다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이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능히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말씀은 “너 있는 곳에서” 라는 말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롯이 그를 배신하고 떠나 버린 곳, 그래서 혼자 남은 외로운 곳입니다. “그 곳에서 눈을 들고 동서남북으로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보라.” 하셨습니다. 그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람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울적한 마음을 벗어던지고 일어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신이 서있는 곳에서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하나님은 방관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십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일어나 걸어보면 그 모든 땅에 약속된 축복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 삶에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바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출발은 가능합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희망을 찾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3.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예레미야애가3:22-23입니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이 큽니다.’”
다윗은 시편23편에서 참 좋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양떼 같은 자기 백성들에게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말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날까지 밖에 나가 그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신실하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며, 은혜로 인도 하겠다 하셨습니다.
부모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는 망나니 녀석이 있었습니다.
뻑 하면 가출이고, 뻑 하면 경찰서에서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이웃집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그런 놈이 뭐 볼 것 있다고 경찰서에서 또 빼내옵니까? 실컷 고생하도록 내버려 두지요.” 그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나도 저 놈이 내 자식만 아니라면 벌써 버렸습지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한 사랑, 이것이 불성실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그 때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노래하였습니다.
시편30:4,5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진노는 잠깐이요, 은총은 영원하니, 저녁에는 눈물을 흘려도, 아침이면 기쁨이 넘친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고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땅에 사는 하늘 사람은
과거의 악한 것에 붙잡혀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많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이 축복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