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6
주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에베소서 3:14~19)
얼마 전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아침 일찍 본당에 들어와 조용히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무거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저희 교우들 가운데 병으로 고통하는 여러 가정들, 또 교역자들로부터 듣게 된 여러 문제로 씨름 중인 가정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앞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벽 여명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 말씀을 바라보면서 '저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인데...하나님이 나를 아주 사랑하심에 틀림이 없다는 말인데...왜 그 사랑이 나의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아무리 근심이 내 마음을 짓눌러도 그것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비슷한 느낌이 있을 텐데...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한다면,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 저의 마음에 계속 머물고 있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설 땅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런 고민을 안고 씨름하면서 말씀을 계속 묵상하다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지 한번 각자 자신을 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나의 어떤 생각이나 감성, 또는 의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것으로 남아있지 않는지, 단순히 머리 안에서 맴돌고 있는 하나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지 스스로 돌이켜 본다면 저와 같은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얼마나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자주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무궁한 사랑'이라고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렘31:3) 무궁한 사랑, 즉 한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만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요13:1) 이는 중단됨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차원 높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갈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끊을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감염된 우리의 마음이 너무 미지근하고 무디다면 어딘가 영적인 문제가 있진 않은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그분의 눈에 열방은 물통에 떨어지는 한 방울 물과 같다고 말씀합니다.(사40:15) 전세계 20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을 다 모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울추에 앉아 있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40:17)
그만큼 강대하신 하나님이 나같은 티끌 같은 존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감동이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입니까? 제 노트북에는 세계적으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검색만 하면 제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저 키(Key) 하나만 두드리면 탄저균이 어떤 균인지도 금방 읽어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하루는 몇 가지 정보를 검색하다가 너무 시원하게 결과를 보여줘서,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검색창에 '옥한흠'이라고 입력하고는 엔터 키(enter key)를 쳤습니다. 그 다음 상황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해당사항이 없으므로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물론 장난 삼아 해본 것이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이름 하나 올리지 못하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떠드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고, 유명하면 얼마나 유명하겠습니까? 도토리 키재기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형편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광대하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무궁히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아무리 내 마음에 무거운 근심이 쌓여 있어도 그것은 가랑잎처럼 가볍게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 어떤 심적 고통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제게 그런 감동이 한동안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문제가 없는지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마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막연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 속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그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끌어 올려 주시옵소서."(엡3:17-19)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에베소 교인들이 머리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아느냐를 물었을 때 염려스러운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말씀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에베소 교인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사랑의 토양에 내 심정의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토양으로부터 모든 영적인 영양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모든 뿌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둘 때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활기를 얻습니다.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보는 것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느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차원이 높고 넓어서,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즉 우리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학구적으로 따지며 논리를 펴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을 4차원의 세계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18-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넓습니다. 사랑은 몇 사람에게 제한된 것이기에 범세계적으로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을 빠짐없이 다 사랑할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데서 오는 불만족스러운 사랑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되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세상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고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LA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그 교회에 부흥강사를 초대해서 몇 일간 집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흥강사가 설교 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간증적인 이야기를 했던가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제일 사랑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만 사랑합니다.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고, 나만 제일 사랑하십니다." 그 설교가 다 끝나자,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서 "오늘 강사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사를 제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합니다." 하고 대뜸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엔 두 사람이 모두 착각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말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지만, 나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놓치지 않고 그 가슴에 품지만, 유독 나만을 사랑하고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사랑을 나에게 쏟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제일 사랑하십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길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오래오래 계속되는 사랑이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설혹 내가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죄 없이, 죄를 범하지 않고 한 달 정도는 경건하게 살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으로 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나도 모르게 말로써 남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죄를 범하고 뒤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해 주실까? 이렇게 더러운 죄인, 용서를 빌었는데도 또 죄를 범하는 이 못된 죄인을 하나님이 과연 사랑해주실까?' 하고 허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엄청나서 내가 아무리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십니다. 내가 실수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웃음과 욕을 당할 정도의 처참한 자리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믿어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얼마나 그 깊이가 대단한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코자 죄인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사람이 되신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비참한 죄수의 모습으로 매달려 죽는 자리까지 간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무덤에까지 들어간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갈 때까지, 내려갈 수 있을 때까지 내려가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그 깊은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어찌 그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낮아지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하나님의 사랑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그 높이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 올려서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양은 저마다 각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이시면 우리 모두 형님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뀌어집니다. 작은 예수가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계시는 모든 영광을 우리와 함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좋은 것이면 다 나누고 싶어합니다. 만일 남자에게 명예가 있다면 그것을 애인에게도 나누길 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재산이라면 그의 모든 재산은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 특권, 아름다운 것을 다 나누기를 원하고 개방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 부귀와 행복, 영생의 축복들을 우리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그런 수준에까지 우리를 끌어올리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이렇게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맛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꿉니다. 사랑의 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찬송가 414장을 작시한 브렉(C. E. Breck)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의 사랑이 비췰 때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 활기차게 다 변하네.'(2절) 이 세상이 아름답고 활기차게 변하는 것을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태평양의 가장자리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알면서 내가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지 맙시다. 태평양의 물가에 앉아서 물장난하고, 수영하고, 또 컵으로 물을 담아 머리에 붓는 어린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태평양에 가득한 물에 대해서, 그 신비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초라한 물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보다 더 넓고 더 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안다는 소리를 되풀이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더욱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서 항상 꿈틀거려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높이 도달해야 될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성경도 많이 알아야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해야 합니다. 봉사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높은 곳까지 끊임없이 사고하면서 올라가야 될 정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 바닥에서 엎드려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한 경지까지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원하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주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평범한 자리에 머물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영적인 여행을 날마다 계속합시다.
교회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예수를 오래 믿었든, 갓 믿었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가볍고 옅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더 알 수 있도록 사모하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고 성령을 통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을 가슴 가득히 부어주셔서 아름다운 은혜의 경지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모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은 경지까지 오르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에게도 그러한 것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심령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걱정거리가 생겨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하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잘 해주실 거야.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이 정도 문제쯤이야...하나님이 잘 해주실 거야.' 그리고 나면 그만큼 근심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요즘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 저기 원서를 넣어도 안 되고, 학위나 자격증을 가지고 가도 소용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도 금방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떠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하십시오. 그 사랑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우리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거야.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버려 두실 리가 없지. 내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는 이내 무거웠던 마음의 짐들이 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찬송이 나올 것입니다. 무엇이 그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까?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안에서 우리를 자유케한 것입니다.
회사에 가면 요즈음 연봉제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회사에 들어가서 충실하게 일하고 연륜이 쌓이면 월급이나 계급도 올라가고 점점 지위도 좋아지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보다 10년이나 늦게 들어온 후배라도 능력이 있으면 연봉으로 따져 20~30%를 더 받기도 하는데, 이를 알고 나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능력이 있어서 더 받는 데에야 할 말은 없지만 자신의 처지와 비교할 때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나이 40, 50대 되어서 젊은이들과 경쟁도 할 수 없는 마당에 점점 코너에 몰리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면 그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한번 생각하십시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근심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박탈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풍성한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독차지하고 있는데, 아무리 내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이대로 두시지 않는다.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실 것이다.'바로 이런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의 확신으로 자리잡아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봅니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 비관적으로 볼 이유가 없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격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브렉은 '주의 사랑 비췰 때에 이 세상은 어둠 슬픔 중한 짐이 다 없겠네. 우리들의 가는 길 밝히 비춰주시며 복을 받게 하시네.'라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두려워 떨고 비관적으로 생각하며 소망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가지신, 그리고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나만을 사랑하시는데, 내 어려운 형편을 보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잘 해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습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해도 스스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강한 자가 됩니다. 능력을 갖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이길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의 짐이 무거워도 그 무거운 짐 앞에 꺾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그 비참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경험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힘에 꽉 붙들려서 절대로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의 말씀은 이를 얼마나 웅변적으로 잘 선언하고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냐?' 우리는 그런 상황을 다 안 당해 봤습니다. 이 7가지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 당해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극한적인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합니다.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 놓여도 절대로 우리를 이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케 되면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그저 참혹한 자리에 끌려 들어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그 사랑의 힘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를 꺾을 자가 없습니다.
송달 장로님이 암으로 계속 투병 중에 있습니다. 몇 일전 그분의 병상에 가서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이라는 미국 목사님의 글을 하나 읽어 드렸습니다. 그분은 44세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그가 병상에 있을 당시 자신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토막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받을 축복을 하나씩 차례로 빼앗아 가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 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대신 그 자리를 채우셨습니다. 비록 지금 나는 불구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내 생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합니다. 죽음의 강이 내 앞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 죽음의 강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한발로 뛰어 넘을 수 있는 조그마한 개울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꺾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런 사람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까? 죽음도, 그 누구도 그를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에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그 사람은 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또 하나 중요한 것을 얻습니다.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듭니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나게 만듭니다. 제니라는 영국의 어느 학장이 한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기쁨은 하나의 깃발과 같다.' 옳은 말입니다.
영국의 윈저성과 같은 성에 한번 가보면 성안에 여왕이 머물고 있을 경우,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깃발을 보면서 '여왕이 저 성에 아직 계시는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쁨이란 내 마음에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과 같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저 사람 마음에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쁨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성도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하나님의 사랑 받고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불신자들 입에서 이런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초상집에 사는 사람들 같고, 유교 신자들은 제삿집에 사는 사람들 같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날마다 잔칫집에 사는 사람들 같다.'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잔칫집에서 사는 사람들 같다.'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우리가 깊이 젖으면 이 기쁨을 소유하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영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잠깐 느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적으로 조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 뛰어난 엄청난 4차원의 세계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가 있습니다. 길이가 있습니다. 높이가 있습니다. 깊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충만한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사모합시다. 그 사랑에 깊이 젖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그러면 그 사랑의 힘이 나로 하여금 자유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능력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소망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 사랑을 사모합시다.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에 담고, 세상을 살면 우리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찬송가 414장을 마음에 담고 부르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어두움을 쫓아내는 아름다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사랑을 허락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세상을 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넓게 알고, 높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을 주시고, 말씀을 통해 이 사랑에 흠뻑 젖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자유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능력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소망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도록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얼마 전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아침 일찍 본당에 들어와 조용히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무거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저희 교우들 가운데 병으로 고통하는 여러 가정들, 또 교역자들로부터 듣게 된 여러 문제로 씨름 중인 가정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앞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벽 여명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 말씀을 바라보면서 '저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인데...하나님이 나를 아주 사랑하심에 틀림이 없다는 말인데...왜 그 사랑이 나의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아무리 근심이 내 마음을 짓눌러도 그것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비슷한 느낌이 있을 텐데...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한다면,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 저의 마음에 계속 머물고 있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설 땅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런 고민을 안고 씨름하면서 말씀을 계속 묵상하다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지 한번 각자 자신을 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나의 어떤 생각이나 감성, 또는 의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것으로 남아있지 않는지, 단순히 머리 안에서 맴돌고 있는 하나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지 스스로 돌이켜 본다면 저와 같은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얼마나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자주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무궁한 사랑'이라고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렘31:3) 무궁한 사랑, 즉 한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만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요13:1) 이는 중단됨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차원 높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갈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끊을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감염된 우리의 마음이 너무 미지근하고 무디다면 어딘가 영적인 문제가 있진 않은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그분의 눈에 열방은 물통에 떨어지는 한 방울 물과 같다고 말씀합니다.(사40:15) 전세계 20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을 다 모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울추에 앉아 있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40:17)
그만큼 강대하신 하나님이 나같은 티끌 같은 존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감동이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입니까? 제 노트북에는 세계적으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검색만 하면 제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저 키(Key) 하나만 두드리면 탄저균이 어떤 균인지도 금방 읽어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하루는 몇 가지 정보를 검색하다가 너무 시원하게 결과를 보여줘서,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검색창에 '옥한흠'이라고 입력하고는 엔터 키(enter key)를 쳤습니다. 그 다음 상황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해당사항이 없으므로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물론 장난 삼아 해본 것이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이름 하나 올리지 못하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떠드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고, 유명하면 얼마나 유명하겠습니까? 도토리 키재기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형편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광대하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무궁히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아무리 내 마음에 무거운 근심이 쌓여 있어도 그것은 가랑잎처럼 가볍게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 어떤 심적 고통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제게 그런 감동이 한동안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문제가 없는지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마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막연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 속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그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끌어 올려 주시옵소서."(엡3:17-19)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에베소 교인들이 머리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아느냐를 물었을 때 염려스러운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말씀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에베소 교인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사랑의 토양에 내 심정의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토양으로부터 모든 영적인 영양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모든 뿌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둘 때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활기를 얻습니다.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보는 것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느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차원이 높고 넓어서,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즉 우리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학구적으로 따지며 논리를 펴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을 4차원의 세계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18-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넓습니다. 사랑은 몇 사람에게 제한된 것이기에 범세계적으로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을 빠짐없이 다 사랑할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데서 오는 불만족스러운 사랑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되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세상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고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LA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그 교회에 부흥강사를 초대해서 몇 일간 집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흥강사가 설교 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간증적인 이야기를 했던가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제일 사랑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만 사랑합니다.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고, 나만 제일 사랑하십니다." 그 설교가 다 끝나자,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서 "오늘 강사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사를 제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합니다." 하고 대뜸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엔 두 사람이 모두 착각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말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지만, 나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놓치지 않고 그 가슴에 품지만, 유독 나만을 사랑하고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사랑을 나에게 쏟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제일 사랑하십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길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오래오래 계속되는 사랑이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설혹 내가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죄 없이, 죄를 범하지 않고 한 달 정도는 경건하게 살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으로 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나도 모르게 말로써 남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죄를 범하고 뒤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해 주실까? 이렇게 더러운 죄인, 용서를 빌었는데도 또 죄를 범하는 이 못된 죄인을 하나님이 과연 사랑해주실까?' 하고 허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엄청나서 내가 아무리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십니다. 내가 실수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웃음과 욕을 당할 정도의 처참한 자리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믿어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얼마나 그 깊이가 대단한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코자 죄인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사람이 되신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비참한 죄수의 모습으로 매달려 죽는 자리까지 간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무덤에까지 들어간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갈 때까지, 내려갈 수 있을 때까지 내려가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그 깊은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어찌 그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낮아지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하나님의 사랑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그 높이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 올려서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양은 저마다 각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이시면 우리 모두 형님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뀌어집니다. 작은 예수가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계시는 모든 영광을 우리와 함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좋은 것이면 다 나누고 싶어합니다. 만일 남자에게 명예가 있다면 그것을 애인에게도 나누길 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재산이라면 그의 모든 재산은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 특권, 아름다운 것을 다 나누기를 원하고 개방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 부귀와 행복, 영생의 축복들을 우리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그런 수준에까지 우리를 끌어올리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이렇게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맛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꿉니다. 사랑의 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찬송가 414장을 작시한 브렉(C. E. Breck)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의 사랑이 비췰 때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 활기차게 다 변하네.'(2절) 이 세상이 아름답고 활기차게 변하는 것을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태평양의 가장자리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알면서 내가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지 맙시다. 태평양의 물가에 앉아서 물장난하고, 수영하고, 또 컵으로 물을 담아 머리에 붓는 어린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태평양에 가득한 물에 대해서, 그 신비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초라한 물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보다 더 넓고 더 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안다는 소리를 되풀이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더욱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서 항상 꿈틀거려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높이 도달해야 될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성경도 많이 알아야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해야 합니다. 봉사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높은 곳까지 끊임없이 사고하면서 올라가야 될 정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 바닥에서 엎드려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한 경지까지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원하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주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평범한 자리에 머물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영적인 여행을 날마다 계속합시다.
교회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예수를 오래 믿었든, 갓 믿었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가볍고 옅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더 알 수 있도록 사모하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고 성령을 통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을 가슴 가득히 부어주셔서 아름다운 은혜의 경지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모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은 경지까지 오르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에게도 그러한 것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심령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걱정거리가 생겨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하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잘 해주실 거야.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이 정도 문제쯤이야...하나님이 잘 해주실 거야.' 그리고 나면 그만큼 근심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요즘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 저기 원서를 넣어도 안 되고, 학위나 자격증을 가지고 가도 소용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도 금방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떠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하십시오. 그 사랑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우리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거야.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버려 두실 리가 없지. 내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는 이내 무거웠던 마음의 짐들이 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찬송이 나올 것입니다. 무엇이 그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까?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안에서 우리를 자유케한 것입니다.
회사에 가면 요즈음 연봉제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회사에 들어가서 충실하게 일하고 연륜이 쌓이면 월급이나 계급도 올라가고 점점 지위도 좋아지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보다 10년이나 늦게 들어온 후배라도 능력이 있으면 연봉으로 따져 20~30%를 더 받기도 하는데, 이를 알고 나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능력이 있어서 더 받는 데에야 할 말은 없지만 자신의 처지와 비교할 때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나이 40, 50대 되어서 젊은이들과 경쟁도 할 수 없는 마당에 점점 코너에 몰리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면 그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한번 생각하십시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근심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박탈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풍성한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독차지하고 있는데, 아무리 내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이대로 두시지 않는다.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실 것이다.'바로 이런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의 확신으로 자리잡아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봅니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 비관적으로 볼 이유가 없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격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브렉은 '주의 사랑 비췰 때에 이 세상은 어둠 슬픔 중한 짐이 다 없겠네. 우리들의 가는 길 밝히 비춰주시며 복을 받게 하시네.'라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두려워 떨고 비관적으로 생각하며 소망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가지신, 그리고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나만을 사랑하시는데, 내 어려운 형편을 보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잘 해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습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해도 스스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강한 자가 됩니다. 능력을 갖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이길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의 짐이 무거워도 그 무거운 짐 앞에 꺾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그 비참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경험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힘에 꽉 붙들려서 절대로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의 말씀은 이를 얼마나 웅변적으로 잘 선언하고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냐?' 우리는 그런 상황을 다 안 당해 봤습니다. 이 7가지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 당해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극한적인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합니다.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 놓여도 절대로 우리를 이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케 되면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그저 참혹한 자리에 끌려 들어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그 사랑의 힘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를 꺾을 자가 없습니다.
송달 장로님이 암으로 계속 투병 중에 있습니다. 몇 일전 그분의 병상에 가서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이라는 미국 목사님의 글을 하나 읽어 드렸습니다. 그분은 44세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그가 병상에 있을 당시 자신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토막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받을 축복을 하나씩 차례로 빼앗아 가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 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대신 그 자리를 채우셨습니다. 비록 지금 나는 불구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내 생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합니다. 죽음의 강이 내 앞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 죽음의 강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한발로 뛰어 넘을 수 있는 조그마한 개울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꺾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런 사람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까? 죽음도, 그 누구도 그를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에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그 사람은 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또 하나 중요한 것을 얻습니다.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듭니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나게 만듭니다. 제니라는 영국의 어느 학장이 한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기쁨은 하나의 깃발과 같다.' 옳은 말입니다.
영국의 윈저성과 같은 성에 한번 가보면 성안에 여왕이 머물고 있을 경우,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깃발을 보면서 '여왕이 저 성에 아직 계시는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쁨이란 내 마음에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과 같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저 사람 마음에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쁨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성도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하나님의 사랑 받고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불신자들 입에서 이런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초상집에 사는 사람들 같고, 유교 신자들은 제삿집에 사는 사람들 같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날마다 잔칫집에 사는 사람들 같다.'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잔칫집에서 사는 사람들 같다.'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우리가 깊이 젖으면 이 기쁨을 소유하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영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잠깐 느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적으로 조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 뛰어난 엄청난 4차원의 세계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가 있습니다. 길이가 있습니다. 높이가 있습니다. 깊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충만한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사모합시다. 그 사랑에 깊이 젖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그러면 그 사랑의 힘이 나로 하여금 자유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능력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소망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 사랑을 사모합시다.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에 담고, 세상을 살면 우리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찬송가 414장을 마음에 담고 부르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어두움을 쫓아내는 아름다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사랑을 허락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세상을 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넓게 알고, 높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을 주시고, 말씀을 통해 이 사랑에 흠뻑 젖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자유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능력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소망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도록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