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6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24)
1. 토마스 아 캠피스는 "죽어 없어질 부를 추구하며 그 안에 소망을 두는 것은 허영이다. 명예를 열망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것 또한 허영이다.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도 허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윤리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돈, 성(sex), 그리고 권력 추구의 허영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 돈, 성 그리고 권력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얽히고 설켜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돈은 곧 권력임을 자처하고, 성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곧잘 "최상의 최음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허영의 거리(Vanity Fairs)"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세 가지 윤리문제를 모두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가운데 먼저 돈, 즉 연보(헌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가장 중요시했던 일의 하나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특별 구제 헌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원래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박해와 기근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영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물질적으로 유대인들을 돕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하나로 결합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특별 구제금(연보)을 통한 이방인들의 사랑으로 두 교회간에 있었던 상처가 치료되고 교회의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깨우쳐주고자 했습니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사는 지역이 다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도울 책임이 있음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헌금은 예배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헌금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예배행위라는 것입니다. 참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미리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며, 예배의 생활로써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외에 연보(구제금이나 선교비 등)를 의무를 뛰어넘어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도는 먼저 돈에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마틴 루터는 "세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이 돈지갑의 회심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말씀하신 주제가 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돈 문제에 대해서 유별나게 시간과 정력을 쏟으셨습니다.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여기서 보면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연보궤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짐짓 사람들이 바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분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돈 문제에 대한 가르침은 명백하면서도 엄격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의 성구들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6: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처럼 돈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떤 주제들보다 그 방향이 분명하고 직선적입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인류에게 복을 주는 데에 사용될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은 기도와 헌신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의 재물을 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 쌓기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을 때 예수님은 기뻐서 "(눅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거침없이 부어드린 여인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돈을 후하게 썼으며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4. 돈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바로 잡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 잘못된 견해 중 첫째는 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표시요 따라서 가난은 하나님이 불쾌해 하시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곡해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개인적인 평안과 번영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무리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막말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부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수학 공식은 다양합니다. 백배, 삼십배, 칠 배나 복을 주시리라는 것 등입니다. 이 같은 왜곡된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놀란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젊은 부자 관원의 부가 하나님의 그에 대한 특별하신 은혜의 표시라고 제자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외쳤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5. 하나님의 경제에 있어서는 가난하고 상처받고 낭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주심과 관심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팔복에 관한 산상수훈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6. 예수께서 부를 지칭할 때 아람어인 맘몬(mamm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에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 말씀에서 보면 맘몬(mammon)을 하나의 경쟁신(a rival god)으로서 인격화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돈이란 단순히 어떤 비인격적인 교환의 매개물이 아니며, 또한 그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만 좋거나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맘몬(mammon)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하는 하나의 힘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돈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돈의 배후에는 아주 실질적인 영적인 힘이 있어서 돈을 활성화시키고 돈에게 고유한 생명을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돈은 활동적인 행위자요, 그 자신에 대한 법이요, 돈은 인간으로 하여금 돈에 헌신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어줄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맘몬(mammon)의 유혹하는 힘인 것입니다. 돈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맘몬(mammon)으로부터 돌아서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제자 지망생이 예수께 와서 자기가 예수님을 따를 결단이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마19:16)...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놀라운 대답을 들었습니다.
"(마19:21)...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부자 젊은이는 슬픈 표정을 짓고 맘몬(mammon) 신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러한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눅19:9)...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그 제자가 되는 길에 드는 비용을 셈해 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눅14: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눅14: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14: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돈이란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맘몬신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돈이란 실제적으로 많은 신적(神的)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안일함을 주고 죄의식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자유를 가져다주고, 힘을 주며, 무소부재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사악한 것은 전능성(全能性)을 가지려는 점입니다.
7. 돈의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돌보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풍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창13: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이삭도 아브라함과 비슷한 복을 받았는데 하도 많이 받아서 시기까지 받았습니다.
"(창26: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욥은 동방의 큰 부자였는데 그가 시험을 받은 후에는 갑절이나 회복되었습니다.
"(욥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솔로몬의 엄청난 부요함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왕상10: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왕상3: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시바 여왕은 솔로몬의 번성함에 대해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왕상10: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십일조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행위의 결과도 아니고, 우리가 애써 얻지도 않았고 얻을 수도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신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신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그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들,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들, 그들이 심지 아니한 과수원들,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영리하게 계획을 짜내도 별 성과가 없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전혀 예상 밖의 근원으로부터 좋은 일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뭄과 불과 역병(疫病)과 그밖에 수많은 원인들로 인해서 곡식은 순식간에 휩쓸려 나가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풍성한 수확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이해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며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권입니다.
"(욥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시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레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로 알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소유욕과 욕망의 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기 집이 불에 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주님의 집이 타버렸구나. 나는 한 가지 책임을 덜었다!"
칼 메닝거 박사는 언제가 한 부유한 환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그 환자의 대답이
"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외다!"
메닝거 박사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그걸 걱정하는 만큼 마음이 기쁩니까?"
그 환자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내 돈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공포에 휩싸입니다."
이 같은 공포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내어 줄 때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며 우리의 안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옥의 저주를 피하고 싶거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어주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의 구원을 위하여 가롯 유다의 희망 이상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 베푸는 것은 우리를 돈의 횡포로부터 자유하게 해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 크리스챤 공동체는 돈뿐만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 집과 땅을 내어놓았습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돈에 대한 바른 사용법과 훈련을 받은 성도들은 부패하지 않은 채 재산을 소유할 수가 있으며, 그들의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돈을 온전히 포기해 버리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로서는 아주 형편없는 방법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분명 자원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등한 방법입니다. 부와 자원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적절하게 훈련되고 지식을 얻은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이 맘몬의 종들에게 내어 던져지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많은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더 큰 공적인 유익을 위하여 활용했습니다. 욥도 그러했고 다윗과 솔로몬도 그러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의 부와 높은 지위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바나바도 그의 소유 재산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아주 궁핍했던 초대교회를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9. 성경은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라고 하십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한 부자가 그의 청지기가 자기의 재산을 잘못 관리해 온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그를 해고시킵니다. 그러나 그 청지기는 쫓겨날 시한이 되기 전에 머리를 써서 자신의 장래를 확보해둡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하나씩 그 빚진 돈에서 20%에서 50%를 깎아서 기록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채무자들은 그 청지기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직장에서 쫓겨나면 그를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은 분명히 영리하면서 또 그만큼 부정직한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청지기가 한 일을 알아내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 대신에 오히려 그 사람의 영리한 처신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의 분별력을 칭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 말씀에서 청지기의 부정직한 것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그 청지기가 경제적인 원천을 가지고 비경제적인 목표를 위하여 사용하는 영리한 면, 즉 돈으로 친구를 사귐으로써 그가 필요한 때 갈 곳이 있도록 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판단을 내리십니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거듭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돈은 약한 사람들을 못 살게 굴고 그들을 억누르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위신과 명예를 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다른 사람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사람들을 부패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이처럼 여러 가지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돈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불의한 재물"로(소유) 친구를(존재)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을 거부하기보다는 우리는 돈을 정복하고 그것을 비경제적인 목적들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위대한 일에 사용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왜냐하면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땅에다 투자하는 것은 안전한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에다 투자해야만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만이 여러분의 존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늘 은행에 투자된 보물은 높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폐의 전부를 몽땅 달러화로 바꾸는 화폐개혁이 단행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발효되는 즉시 모든 한국 통화는 쓸모 없게 된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은 가진 돈을 모두 달러화로 바꾸어 놓고 한국 통화는 매일매일 살아갈 만큼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하시고 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아직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 나라를 사귀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돈은 이처럼 비경제적인 목적인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 돈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집을 살 때나 차를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해서 사들입니까? 아니면 그만한 돈이 있기 때문에 사들입니까? 만일 무슨 일을 행할 때 돈이 결정한다면 돈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돈이 나에게 "자네는 살만큼 충분한 돈이 있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나는 네가 그것을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 때에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집을 살 때 아내가 "교회가 좀 멀어도 우리 경제 사정에 맞고 살기에 넓고 편한 이 집을 삽시다."라고 말했을 때, 남편이 "우리 같이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먼저 알아봅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결정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돈이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돈이 자신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그는 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자신의 유언서에다 쓰기를 자신이 이 땅의 재물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해도 상속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긴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그는 덧붙이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의 재물을 남기게 된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의 전 재산을 자녀들에게 남겨 줄 것인가? 아니면 일부분만을 줄 것인가? 그리스도의 뜻을 최선으로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기관은 어떤 곳인가? 살아서 할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자신의 영원한 처소를 위해 지혜로운 투자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10. 이렇게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된 사람들이 여기 소개되고 있습니다.
1) 디모데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나서 바울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도가 가장 힘든 지역인 에베소에서 바울을 대신하여 사역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항상 가장 험난한 지역으로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후계자가 될 만큼 "주의 일에 힘쓰는 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본래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담대한 복음 사역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가 걸어가는 사역의 길에서 당할 어떤 시련과 고난도 마다 않고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격려와 용기였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복음이 달려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멸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2)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복음을 철저하게 배운 겸손한 달변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구약의 석학이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장사꾼 부부의 발 밑에 자기를 낮추고 복음의 지식을 경청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성숙해지는 겸손한 사역자였습니다.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전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성숙하고 견고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처럼 행동하라는 뜻으로 사랑과 조화를 이룩한 성숙한 지도력, 겸손한 지도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3) 스데바나의 집사람들은 아가야에서 첫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복음 사역에 헌신함으로서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없을 때 부족한 것을 메웠을 뿐만 아니라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습니다. 스데바나 사람들은 이처럼 목회자의 영혼을 신선하게 해주었고 마음을 새롭게 해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문젯거리나 고민은 목사와 함께 나누지만 기쁨이나 축복은 좀처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나 고민,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목사를 걸고넘어지기까지 합니다. 성도들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목사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목회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목사의 짐을 덜어 주어 복음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스데바나의 가정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충성된 성도들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4)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주님께 헌신한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가는 남편보다 더 강했고 헌신적인 지도자이자 복음 전도자였지만 남편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이 남편과 함께 주님을 섬기고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성도들은 이처럼 주님을 섬기며 복음 사역을 위해 목회자를 돕는 부부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오늘날 이들 부부처럼 헌신과 희생을 지닌 성도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정말 교회의 위대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 조선일보.97년 6월 10일자 만물상에서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요즘 우리 경제계의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재벌 2세들의 <선대(先代)기업 까먹기>다. 아버지의 대기업을 물려받은 2세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과시를 위해 마구 기업을 확장하다가 꽈당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는 <아버지 돈은 내 돈>이고 <나는 아버지보다 나은 기업가>라는 오도된 의식들이 깔려 있다. 이것이 정치권에서 <아버지 선거 때 들어온 돈은 내 돈>이고 <나는 아버지 보다 더 잘난 정치인>이라는 이른바 <김현철 증후군>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미디어 황제사(社) 회장의 아들 조나단 레빈에게는 <아버지 돈은 내 돈이 아니며> 그가 가는 길은 아버지와는 아무 관계없는 그 자신만의 길이었다. 마약과 범죄로 이름난 뉴욕 브롱스의 한 고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지난 주초 자신의 제자에 의해 살해당한 그의 짧은 인생역정은 두 가지 점에서 지금 미국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재벌 아들이면서 방 하나 짜리 싸구려 아파트에서 살았다. 재산이라고는 봉급을 저축한 약간의 은행예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고 성적이 오른 학생에게는 야구 표를 사주었다. 범죄의 소굴 같은 곳에서 범죄와 싸워 학생들을 선도했던 것이다. <선생님께 사랑을....>이라는 영화 그대로다. 그러나 그런 참스승이 몰랐던 것도 두 가지가 있었다. 미국에서조차 <아버지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는 선도할 수 없는 인간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나단 레빈같은 바른 경제관과 사랑의 삶이 오늘날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돈과 성, 그리고 권력으로 멍들어가고 있는 이 땅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 성도들이 먼저 각기 처해 있는 환경과 처소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긴 것은 부귀 영화가 아니라 구원 얻는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교회와 이웃에 봉사를 하려거든, 남을 구제하려거든, 헌금을 하려거든,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려거든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고예화1>
오 헨리의 단편 중에 <묵은 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빵집에서 싸게 파는 묵은 빵만을 사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빵집 여주인은 매일 묵은 빵만 찾는 그 남자를 동정하여 빵 속에 버터를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건축 설계가인 이 가난한 남자는 마침 현상 응모에 출품할 작품인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빵 속에서 흘러나온 버터 때문에 설계도를 버리게 되어 응모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그 남자는 설계 도면을 지우기 위해 묵은 빵을 사갔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오 헨리는 여주인의 얄팍한 사랑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얄팍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고 먼 훗날이 되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은 결국 어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고쳐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인간의 자(尺度)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견이 좁고 짧으며 인간의 이해가 부족할 뿐입니다. 세월이 가고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연장됨을 깨닫게 됩니다.
<참고예화2>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시카고에서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익명의 청취자가 들려 준 것입니다.
수지가 물었습니다.
"엄마, 지금 뭘해?"
.엄마가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부인에게 갖다 주려고 볶음밥을 만드는 중이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수지가 물었습니다.
"왜?"
"왜냐하면 스미스 부인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에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한동안 돌봐 드려야만 해."
"왜, 엄마?"
"수지야, 누군가 아주 아주 슬플 때는 음식을 만든다거나 집안 청소같은 작은 일들을 하기가 어려워진단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스미스 부인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 때는 우리가 도와 드려야지. 스미스 부인은 다시는 딸과 얘기할 수도 없고 딸을 껴안을 수도 없고 엄마와 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신나는 일들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다. 넌 매우 똑똑한 아이야, 수지. 그러니 너도 스미스 부인에게 도움이 되어 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수지는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미스 부인을 돕는 일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몇 분 뒤 수지는 스미스 부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참 지나서 스미스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안녕, 수지."
수지는 스미스 부인이 다른 때와 같이 귀에 익은 음악 같은 목소리로 인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또 울고 있었던 듯했습니다. 눈이 부어 있고 물기에 젖어 축축했습니다. 스미스 부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수지야?"
수지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줌마가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가 났고, 그래서 아주 아주 슬프시대요."
수지는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에는 일회용 반창고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가슴에 난 상처에 이걸 붙이세요. 그러면 금방 나을 거예요."
스미스 부인은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수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습니다.
"고맙다. 수지야. 이 반창고가 내 상처를 금방 낫게 해 줄 거야."
스미스 부인은 수지의 친절한 행동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상점에 가서 둥근 유리 안에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도록 된 열쇠고리 하나를 사 왔습니다.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동시에 가족 사진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고리였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수지가 준 일회용 밴드를 그 유리 안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치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치료에는 시간과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열쇠 고리는 그녀에게 치료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가 딸과 함께 나눈 기쁨과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잠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