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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권면 (고전4:6-21)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많은 어려움 속에 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더욱 더 애착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서로 파당을 짓고 서로 잘났다고 서로를 향하여 비난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주위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가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은 잘못된 길로 빠져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던 것입니다. 본문의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이 성구를 어떤 번역에서는 "누가 너희를 잘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잘난 척하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분당을 이루게 된 것이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라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날카롭게 추궁합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재능이나 건강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것들을 마치 자기가 잘나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교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13절까지의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과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너희는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고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비천하고 너희는 존귀하고,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데 너희는 이미 배부르고, 우리는 헐벗고 정처없는데 너희는 이미 부요하고, 우리는 미말에 처한 세상의 구경거리요, 세상의 더러운 것이며, 만물의 찌끼같은데, 너희는 왕노릇하고, 우리는 매맞고 후욕당하고 핍박당하고 비방당하는데 너희는 서로 대적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자부심과 특권과 자랑하며 자기의 공적을 내세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낮춰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기쁨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생활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버지된 심정으로 사랑이 담긴 권면 즉 영적으로 겸손해질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으며(고전 1:3, 3:2)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렇게 사랑의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과 사랑의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역시 아버지 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스승은 나이가 많고 믿을 수 있는 노예로서 자녀들을 매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자녀의 도덕적인 면을 훈련하며, 품성에 주의를 기울여 남자다운 남자로 만들어내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을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앞으로 많은 스승이나 교사의 지도를 받을는지 몰라도 그들 중 아무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바울이 한 것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는 생명으로 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감상적인 가벼운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과 타냐의 대화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 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신을 좇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의 신도 물질의 우상도 조만간 내 손을 놓을 것입니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나의 우상들은 코마로프가 불붙은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좇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징계도 필요한 것을 아는 사랑 또 징계를 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눈감아 줌으로 그 사람을 파멸케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밝히 봄으로 그 사람을 개선시키는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은 상대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상처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잠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도 바울은 '진짜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어찌 보면 이처럼 교만하고 불손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한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 그리고 주리고 헐벗고 매맞으면서도 온갖 핍박과 고통을 참으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도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복음의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을 보이라는 것, 바울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하라는 것, 마음 중심으로 충성된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을 보여준 삶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다음과 같은 그의 고난의 모습을 통해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당한 고난의 목록은 고린도 후서 11장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수많은 고통을 뚫고 살았습니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에는 <믿음>뿐만 아니라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과 그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마땅히 말로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인정하는 자가 진정 성령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말에 열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거룩한 모양으로 지키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영적 성숙됨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사랑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진실한 핵심은 멀리 하고 사소한 것들로 논쟁하기를 일삼는 편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지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가 복음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말을 사려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 타는 말인가요?" "이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려면 뛰고 차고 난리를 쳐서 타지는 못합니다." "그럼 달구지를 끄는 말입니까?" "달구지만 지우면 그냥 앉아 버립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팔려는 거죠?" "모양이 좋지 않습니까? 스타일이죠."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이 말과 같은 신자들은 없겠습니까? 안장도 못 올려놓게 하고, 짐도 지지 않고, 스타일만 갖추려는 기독교인은 없겠습니까? 우리는 스타일만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오직 "겸손과 충성"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겸손과 충성을 다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많은 어려움 속에 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더욱 더 애착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서로 파당을 짓고 서로 잘났다고 서로를 향하여 비난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주위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가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은 잘못된 길로 빠져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던 것입니다. 본문의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이 성구를 어떤 번역에서는 "누가 너희를 잘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잘난 척하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분당을 이루게 된 것이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라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날카롭게 추궁합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재능이나 건강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것들을 마치 자기가 잘나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교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13절까지의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과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너희는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고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비천하고 너희는 존귀하고,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데 너희는 이미 배부르고, 우리는 헐벗고 정처없는데 너희는 이미 부요하고, 우리는 미말에 처한 세상의 구경거리요, 세상의 더러운 것이며, 만물의 찌끼같은데, 너희는 왕노릇하고, 우리는 매맞고 후욕당하고 핍박당하고 비방당하는데 너희는 서로 대적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자부심과 특권과 자랑하며 자기의 공적을 내세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낮춰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기쁨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생활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버지된 심정으로 사랑이 담긴 권면 즉 영적으로 겸손해질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으며(고전 1:3, 3:2)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렇게 사랑의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과 사랑의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역시 아버지 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스승은 나이가 많고 믿을 수 있는 노예로서 자녀들을 매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자녀의 도덕적인 면을 훈련하며, 품성에 주의를 기울여 남자다운 남자로 만들어내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을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앞으로 많은 스승이나 교사의 지도를 받을는지 몰라도 그들 중 아무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바울이 한 것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는 생명으로 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감상적인 가벼운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과 타냐의 대화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 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신을 좇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의 신도 물질의 우상도 조만간 내 손을 놓을 것입니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나의 우상들은 코마로프가 불붙은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좇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징계도 필요한 것을 아는 사랑 또 징계를 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눈감아 줌으로 그 사람을 파멸케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밝히 봄으로 그 사람을 개선시키는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은 상대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상처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잠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도 바울은 '진짜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어찌 보면 이처럼 교만하고 불손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한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 그리고 주리고 헐벗고 매맞으면서도 온갖 핍박과 고통을 참으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도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복음의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을 보이라는 것, 바울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하라는 것, 마음 중심으로 충성된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을 보여준 삶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다음과 같은 그의 고난의 모습을 통해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당한 고난의 목록은 고린도 후서 11장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수많은 고통을 뚫고 살았습니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에는 <믿음>뿐만 아니라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과 그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마땅히 말로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인정하는 자가 진정 성령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말에 열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거룩한 모양으로 지키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영적 성숙됨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사랑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진실한 핵심은 멀리 하고 사소한 것들로 논쟁하기를 일삼는 편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지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가 복음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말을 사려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 타는 말인가요?" "이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려면 뛰고 차고 난리를 쳐서 타지는 못합니다." "그럼 달구지를 끄는 말입니까?" "달구지만 지우면 그냥 앉아 버립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팔려는 거죠?" "모양이 좋지 않습니까? 스타일이죠."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이 말과 같은 신자들은 없겠습니까? 안장도 못 올려놓게 하고, 짐도 지지 않고, 스타일만 갖추려는 기독교인은 없겠습니까? 우리는 스타일만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오직 "겸손과 충성"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겸손과 충성을 다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