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순간의 선택이 4000년을 지배했다 (창 16;1-6)
씨를 뿌리는 농부의 오직 하나의 목적은 추수계절에 열매를 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직 하나의 목적은 지옥갈 영혼을 천국으로 추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혼 구원 전도는 하나님의 최고의 한을 풀어 드리는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갈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그런데 90살이 다 되도록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3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 진 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6)
세월이 자꾸 흘렀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다>(창 15;2-3)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 15;4)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시청각 교육을 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밖으로 부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 후면 100살 가량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종 하갈과 동침하였습니다. 잉태하였습니다. 하갈은 잉태하자 말자 여주인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이 말을 듣고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하갈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하갈이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 후손이 바로 애급입니다. 지금까지도 애급은 이스라엘과 원수국가입니다.
중동문제는 세계의 화약고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애급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마지막 한 명을 지중해에 쳐넣을 때까지 싸운다.>
이렇게 덤벼들고 있으니 싸움일 끝날 리가 없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의 한번의 선택이 온 세상을 4,000년 동안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가전 제품 회사의 표어가 있었습니다.
<한번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의 한번 선택은 4,000년을 좌우하였고, 앞으로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선택이 잘못 된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1. 내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는 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 때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랐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아이낳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데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착각한 것이 4000년 불행의 원이었습니다.
조금 기다려야 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아브라함과 사라의 선택은 성급하였습니다. 조급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설교만 잘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삶이 없는 설교는 성도들의 귀만 키우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기도만 잘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없는 기도는 교만한 바리새인은 만들어 내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심방만 잘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이 없는 심방은 성도들의 가려운 곳만 긁어 주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장소만 좋으면 교회가 부흥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찾아가는 사랑이 없는 부흥은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슈바이쳐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연극을 하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연극부에서는 슈바이쳐에게 주연도 조연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관중석에 앉아서 연극하는 친구들을 응원하였습니다.
슈바이쳐의 어머니는 연극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슈바이쳐가 연극부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역할을 맡았니?>
슈바이쳐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 저는 박수치고 응원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어머니가 훌륭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 가장 좋은 역할을 맡았구나! 그게 제일 좋은 역할이란다.>
후에 슈바이쳐는 연극 배우가 되지 않고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복음화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쳐 생각은 연극 배우였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연극배우가 아니라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2. 내 방법이었지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는 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 늙었어도 아들을 주시는 기적의 방법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제 틀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었고 사라는 이제 늙은 할머니가 되었으니 아이낳기는 불가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종을 데리고 살면서 아들을 낳는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법은 종의 소유는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종이 아들을 낳으면 주인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내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베토벤 이야기입니다.
베토벤이 독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갑자기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음악가가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화가가 소경이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절망속에서 자살하려고 유서를 쓰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가 없다.>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후 더 많은 작품, 더 좋은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베토벤을 귀머거리로 만들어 더 크게 사용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며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그렇게 기다리던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걸널 것이 막연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갖가지 방법을 다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다리를 놓을 가?
배를 제조할가?
뗀목을 만들가?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기상천외의 방법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갈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최고의 방법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5남매를 잘 길렀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모두 결혼시키느라고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녀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아들, 며느리 그리고 딸, 사위들아!
내가 사업하다가 빗을 지었다. 7억원이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나누어서 갚아 다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머지는 내가 재산을 정리하여 하마.>
그리고 종이를 한 장 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가 얼굴만 쳐다 보더니 셋째 아들이 1억원이라고 적었습니다. 큰 아들이 체면상 3천만원이라고 적었습니다. 2천만원 두 명, 천만원 한 명이었습니다.
<고맙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는 다시 5남매 가정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 재산을 분배한다. 너희들이 적은 수를 보고 재산을 정리하여 보니 10배씩은 나누어 줄 수 있겠다.>
그리고 10배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만큼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방법과 자녀들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3. 내 감정이었지 하나님의 감정은 아니었는 데........
하갈이 잉태하자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푸념하였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게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재량권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사라는 안심하고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갈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라는 임신한 하갈을 사랑하여야 했습니다. 분만한 하갈을 품어야 했습니다. 악감정을 품지 말고 사랑하고 아껴 주고 같이 살았으면 오늘 날 중동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정은 사랑이요 포용이었습니다.
어느 할머니의 고백입니다.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첫 돌이 되기 전에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휴가차 집에 와서 둘째 아들을 임신시키고 사라졌습니다.
할머니가 백방으로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죽을 고생을 하면 두 아들을 길러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제는 어제의 아픔을 잊고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할아버지가 70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맨 몸으로 집에 들어 왔습니다. 실로 49년만에 귀가였습니다.
알고보니 군대 생활할 때에 부대 근처에 처녀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길렀습니다. 병들자 첩은 밉다고 구박하다가 내쫓아 버렸습니다. 갈 곳이 없는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할머니는 화가 나서 받지 않고 첩집으로 내쫓으려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목사님의 설교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카페 사랑입니다. 아카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여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49년만에 들어 온 할아버지 병을 간호하며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웃들은 할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감정은 내 감정은 다른 감정입니다.
유대인 산모가 산부인과에서 난산 상태였습니다. 랍비가 달려 갔습니다. 산모의 남편이 랍비를 초청하였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산모와 아이 두 생명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산모를 살리려면 아이가 죽습니다. 아이를 살리려면 산모가 죽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산모는 모성애가 발동하여 자기가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남편이 결정을 내렸습니다.
<랍비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랍비는 곤역스러워 하였습니다. 모두가 랍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랍비는 기도한 후 결정을 내렸습니다.
<태어나기 전까지는 생명이 아닙니다. 탈무드가 말하고 있습니다. 산모를 살리고 아이를 없애기로 결정합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신부가 있었습니다. 신부가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어머니를 죽여야 합니다. 아이를 살려야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알기에 구원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아이가 지금 죽으면 하나님을 모르기에 지옥에 갑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천국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랍비는 말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생명은 생명이 아니기에 지옥가지 않습니다. 산모를 살리십시오.> 의사는 랍비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부부가 얼마큼 살다가 다시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으 자기 감정을 하나님의 감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역사를 엄청나게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감정은 용서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온 인류를 4,000년 동안 괴롭히고 있습니다.
1. 내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는 데.....
2. 내 방법이었지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는 데....
3. 내 감정이었지 하나님의 감정은 아니었는 데.....
출처/강문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