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하나님의 선물   (창세기 2장 20~25절)

인도의 창조 전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성 우월 사상이 들어 있는 이야기이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흥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조물주가 남자를 만들면서 재료를 다 써 버리게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재료가 없어서 다음과 같은 작업으로 여자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달에서는 둥근 모습을, 달팽이의 곡선미를, 들풀의 떨림을, 갈대의 가느다람과 활짝 핀 꽃의 모습을, 반짝이는 사슴의 큰 눈을, 햇살의 명랑함을, 구름의 흐느낌을, 바람의 변덕을, 암말의 수줍음을, 공작새의 허영심을, 앵무새 깃털의 보드라움을, 꽃술의 달콤함을, 호랑이의 잔인함을, 불의 달아오름을, 눈의 차가움을, 여치의 수다스러움을, 두루미의 위선을, 개의 충성스러움을 본따 그것들을 합성하여 여자를 만들어 남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이 지난 후 남자가 조물주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물주님! 당신이 저에게 주신 여자는 저의 생활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지껄여서 제가 참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저의 계속적인 관심을 요구하고, 제 모든 시간을 빼앗아 가며, 별것 아닌 일에도 울어 버립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당신께 되돌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물주가 “좋다! 그럼 그녀를 데리고 와라!” 하고 여자를 돌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남자가 다시 조물주를 찾아왔습니다. “조물주님, 제가 여자를 당신께 되돌려 드린 후에 제 삶은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저는 그녀가 춤추던 모습, 제게 불러 주던 노래, 저와 함께 놀던 일, 제게 매달리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음악이었고, 그녀는 바라보기에 아름다웠고, 만지기에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니 그녀를 제게 도로 돌려주십시오.” 조물주는 “그러면 좋도록 해라. 도로 갖고 가라.”고 허락했습니다. 3일 후에 이 남자가 다시 조물주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물주님, 제가 여자의 속성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녀는 제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골칫거리입니다. 이제 되돌려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를 좀 받아 주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조물주 같으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썩 나가라! 꺼져 버려라! 난 더 이상 네 비위를 도무지 맞출 수가 없구나.”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조물주께 여자를 드리면서 탄식합니다. “어떻게 하지? 나는 그녀와 함께 살 수 없고, 그렇다고 그녀 없이는 더더욱 살 수 없는데….” 어떻습니까? 우리 남성들은 이 이야기가 이해되십니까? 남성들은 여성들을 볼 때에 그 육체와 외모와 성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이런 남성의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남자들이야말로 정말로 변덕스러운 존재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첫번째로 만들어 주신 공동체가 바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만 있는 것을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외롭다. 짝이 한 사람 더 있어야 되겠다.”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이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이 자연 만물의 아름다움을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연 만물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담의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과 고독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만들어 주신 것이 새였습니다.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뛰놀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외로움은 없어지지 않았고,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함께 하나 될 수 있고, 지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감정적으로 서로 넉넉히 포용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 하나 되는 파트너를 만들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너무나 뿌듯해 하십니다. 홀로 있을 때는 보기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야, 보기가 정말 좋구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 좋다!” 그렇게 우리 하나님께서 찬탄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서 결혼의 삶을 사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결혼을 만들어 주셨을까요? 결혼을 통해서 우리 사람들이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 창세기 2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그 갈비뼈로 여인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담아! 내가 네 짝을 만들어서 에덴동산에 숨겨 놓았다. 한번 좀 찾아보렴.” 친히 여인을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결혼식에 참석해 본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신랑이 있는 곳까지 와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사랑하는 딸을 인계해 줍니다. 이 모습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와를 붙잡고 그를 이끌어서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를 이끌어서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중매쟁이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는 것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하나님의 고귀한 사건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서로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까요? 창세기 2장 23절을 보면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사랑의 노래를 부르리라.” 나와 너의 고백입니다. 친밀한 고백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이라고, 여인을 보면서 기쁨과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결혼이,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게 되는 것일까요? 이 사람이 없으면 평생 살 수 없다고 그렇게 야단법석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왜일까요?

심리학자들은 결혼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 단계는 연애할 때와 결혼 초기로 ‘밀월 단계’라고 합니다. 배우자들은 서로 보기만 해도 ‘아, 저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있구나! 나도 저 사람을 잘 이해하고,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취향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하는 것마다 서로를 잘 용납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푹 빠진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그녀)는 나의 모든 기대를 알고 있고, 나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헤아리고 있다.” 여러분, 이런 단계가 얼마나 갈까요? 우리 성도님들은 얼마나 오래 가셨습니까? 지금도 이렇습니까? 그런 분들은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결혼의 두 번째 단계는 단점과 문제점이 보이는 단계입니다. 보통 옛날에는 결혼한 지 3년 정도 지나면 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고 했는데 요즘은 스피드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결혼 첫날부터 이런 단계에 접어드는 사람이 종종 생기곤 합니다.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점과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격과 성품에도 문제가 발견됩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기적이고 욕심쟁이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무례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격적으로 난폭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폭력까지 휘두릅니다. 술 취한 모습도 보게 됩니다. 이러면 먼저 부드럽게 상대방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조소하기도 합니다. 애원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위협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다 마지막 한계에 도달하면 “나는 도무지 이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면서 결혼의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결혼의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면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비판합니다. 더 이상 행복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비통한 마음이 듭니다. 원한이 듭니다. 속았다고 생각합니다.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내 남편은 내가 믿었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어!’ ‘내 아내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여자가 전혀 아니었어!’ 하고 마음속에 가졌던 상대를 향한 기대를 다 저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말다툼이 시작됩니다. 결국에는 이 사람과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이혼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비단 젊은 사람들만의 이야기일까요? 나이 든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당한 적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 윗세대 어른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어떻게 보면 무지한 방법이고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했습니다. 한 사람이 상대방을 완전히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굴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웃어른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방법을 그대로 요청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독립된 평범한 인격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만나는 훈련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도무지 극복할 수없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사이가 심리적으로 가장 멉니다. 두려움과 혐오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신 것처럼 서로에게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부부들은 종종 “나는 내 아내와 완전히 일심동체입니다.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살았지만 한 번도 다투거나 싸움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진짜일까요? 그런 부부가 보기 좋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환상입니다. 그 환상을 깨야 합니다. 이런 부부들을 두고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둘 중의 하나다. 거짓말이든지, 아니면 두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압도해서 나머지 한 사람이 절대 포기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 둘 중의 하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가 되었으므로 서로 상대방이 나 자신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는 인격 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물질적이고 이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자는 삶의 잔잔하고 감성적인 이야기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거대한 것뿐입니다. 세계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이라크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국제 정치와 한국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남자들에게 아내가 소소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싫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없는 그런 이야기에 접해 있다가 아내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릅니다. 때로는 마치 지겨운 소음처럼 들립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더욱 더 고독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면 더욱더 말이 많아져서 남편은 아내의 말에 대해서 전혀 대꾸를 하지 않거나, 때로는 TV를 보거나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그 순간을 모면하게 됩니다. 하루에 여자들이 말하는 단어가 2만5천 단어라고 합니다. 남자들이 말하는 단어의 수는 1만 단어라고 합니다. 2만5천 단어와 1만 단어가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주로 들어야 합니까? 남자들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듣는 훈련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관객의 입장에서 대화가 아닌 독백을 하게 됩니다. 남자들은 말을 할 때 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회복을 통해서만 부부는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랑이란 말은 영어로 ‘LOVE’입니다. 이 LOVE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따서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LOVE의 ‘L’은 ‘Listen’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남자들은 걱정을 끼치는 것은 마치 짐을 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내 문제가 아니면 이야기도 하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 혼자 가지고 가겠다, 나 홀로 이 고통을 이겨 나가면서 가정을 보호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실한 남편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가족의 속성을 모르는 모습이고, 잘못하면 나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가 갖고 있는 연약한 부분을 인지하고, 서로 들을 줄 알고, 위로할 줄 알아야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LOVE의 ‘O’는 ‘Offer’입니다. 나를 내어 주는 것, 상대방에게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부부가 된다는 약속은 서로를 믿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도 맡기는 것이고 육체도 맡기는 것입니다. 마음과 육체를 서로 맡기지 않아서 부부가 같은 삶을 사는 데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남편의 요청을 아내가 거절하고 아내의 요구를 남편이 거절하면서 가정에 어려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은 침대에서 자도 가까워질 수 없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부부의 잠자는 유형에 따라서 나이가 결정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30대 부부는 서로 둘이 마주보면서 잔답니다. 30대 여러분, 그렇습니까? 40대 부부는 서로 천장을 향해서 잠을 잔답니다. 50대 부부는 서로 등지고 잠을 잔답니다. 그러니 서로 만나려고 하면 얼마나 멀까요?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멀어집니다. 60대 부부는 서로 다른 방에 가서 잔답니다. 70대 부부가 되면 상대방이 어디서 자는지 모르고 잔답니다. 함께 있어도 고독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함께 옆자리에 누워도 거리가 몇 만 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부부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마음으로 맺어 주고 육체로 맺어 주는 것이 부부가 사는 삶의 비결입니다.

세 번째로 LOVE의 ‘V’가 있습니다. ‘V’는 ‘value’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차이점을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왜 불화를 일으키는지 아십니까? 첫번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한 일이 도대체 뭐가 있어? 당신이 도대체 나한테 무엇을 그렇게 도와줬어?”라고 이야기할 때 인격적인 상처를 받게 됩니다. 피터라는 한 남자가 결혼한 지 2년 반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회적인 지휘도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아내하고 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역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아내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아내는 함께 계속 살고 싶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육체도 점점 뚱뚱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단정하게 자신을 가꾸지도 않습니다. 남을 흉보는 입담만 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로 이 여자와 계속 살 수 있을 것인지 비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혼 담당 변호사를 찾아가서 아내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비참한지 설명하면서 조언을 구하게 됩니다. 그때 놀랍게도 변호사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어떨까요? 아마 그렇게 하시면 아내도 기분 좋게 당신과 헤어지려고 할 것입니다. 꼭 한 달간만 내가 가르치는 방법대로 꼭 해 보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아내를 여왕으로 대하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꼭 한 달간만 여왕으로 대하기를 바랍니다. 집에 가는 길에 아내를 위해서 꽃을 사는 것도 좋겠지요? 집에 가서는 아내를 위해서 집안일을 돕기도 해 보고, 필요하면 설거지도 해 보기 바랍니다. 가끔 근사한 곳에 가서 저녁 식사도 해 보세요. 그리고 아내가 지금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조용하게 경청해 보세요. 그렇게 한 달만 여왕으로 대해 보다가 기분 좋게 헤어지시길 바랍니다.” 그랬더니 피터 왈, “아!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요. 내가 이렇게 그녀를 여왕처럼 대우하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겠지요.” 그래서 피터는 집으로 가는 길에 장미 몇 송이를 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여왕처럼 모시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3주일이 지났습니다. 변호사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피터 씨! 이혼 서류는 완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오셔도 됩니다. 잠시 후에 이혼 서류에 도장만 찍으시면 당신은 다시 행복한 독신 남성이 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피터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아! 지금 날 놀리는 거예요? 난 완벽한 여왕과 결혼했습니다. 아내가 어떻게 변해 있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요. 그녀의 태도와 행동은 예전과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습니다. 나는 백만 년이 지나도 이 여자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탈무드에는 그 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에게 충고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섬긴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대우할 것이다. 네가 자존심을 내세워 그에게 봉사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너를 힘으로 정복하여 하녀로 삼아 버릴 것이다. 남편의 친구가 집에 찾아오면 성의를 다해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라. 그러면 남편은 너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남편의 소지품을 소중히 다루어라. 그러면 남편은 네 머리 위에 왕관을 올려놓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왕으로, 여왕처럼 대해 주기만을 바라고 상대방을 먼저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 남편이 아내를 여왕으로 모시면 그는 왕이 될 것입니다. 남편을 왕으로 모시는 아내들은 여왕이 될 것입니다. 자존심 싸움은 이제 그만 합시다. 남편과 아내들이 그렇게 싸우는 것이 자존심 때문입니다. 먼저 아내를 높여 주고, 먼저 남편을 높여 주고…. 그래야 그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LOVE의 ‘E’는 ‘Embrace’입니다. 즉, 상대방을 포옹하는 것입니다. 신체적인 접촉과 스킨십을 통해서 “당신은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요. 당신 덕분에 내가 이만큼 살아왔소.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배우자요.” 이 한 마디가, 그리고 함께 손을 붙잡고 포옹하는 그 속에서 부부의 사랑과 부부의 기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 50주년 기념일을 맞이했습니다. 어떻게 50년 동안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가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남편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결혼했을 때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큰일이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내가 결정하고, 작은 일은 내 아내가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50년 동안 이 약속에 충실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인 결혼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50년을 함께 살면서도 큰 결정을 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남자로서 우리 남편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조금 넉넉하게 아내를 보듬으세요. 아내의 인격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내를 귀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5장 18절에서는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샘이란 아내를 뜻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남편 된 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내 여러분, 남자들은 자존심을 갖고 사는 존재입니다. 남자들의,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내의 품은 남편의 품보다 훨씬 넓은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감싸 주시기를 바랍니다.
결혼이란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습니다. 나의 정성과 나의 기도와 나의 마음, 그 모든 것을 쏟는 만큼 우리의 결혼은 아름답게 예술 작품처럼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가까이 있는 이 사람, 함께 사랑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엊그제가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부부로서의 이 아름다운 삶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곽선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