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크리스천의 선택 (눅 10:38-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좀 모자라는데다가 행동까지 게을러 어떤 일도 하기 싫어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걱정 끝에 이 청년을 제주도 오렌지 농장에 취직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대단히 간단한 단순 노동입니다. 수북이 쌓아놓은 오렌지 중에서 모양이 좋은 것을 골라서 과일가게에 보내도록 왼쪽으로 분류하는 아주 단순한 작업입니다. 이 정도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고 부모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하루하고 그 다음 날 오후에 사표를 쓰고 말았습니다. 하루 종일 수천 번이나 선택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만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평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선택에 의해서 내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마리아는 좋은 선택을 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선택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일까? 이 밤에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1. 선택은 결단과 동일한 말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전공, 진로, 직장, 배우지 등등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선택이요 또한 결단입니다.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는 그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를 잘 살펴야한다.”
가령 열개의 과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면 그것은 나머지 아홉 개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아홉 개를 버려야 하는데 이에 후회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에 따라 작은 것이 커 보일 때가 있고 적은 것이 많아 보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 잠간 음악을 감상하고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인 이 사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루치아노 파바로티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빵 장수를 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 많은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청년기를 거치면서 그의 관심은 음악보다 교육에 관심이 쏠려있어 대학 전공도 교육이었습니다. 졸업 때가 가까워지자 그는 진로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내심 교육과 음악 둘 다 동시에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의 방에 들어가, 방 가운데 의자 두개를 멀리 떼어 놓은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에 동시에 앉으려면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의자에 앉으려면 반드시 한 의자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그는 결코 두개의 의자 위에 동시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한 끝에 성악을 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선택을 잘한 경우에 속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정몽준의 극적인 선택도 그런 경우인지 모릅니다.
2. 신앙은 선택입니다. 인생이 선택이라면 신앙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주일 만 대충 지키는 선데이 크리스챤이 될 것인가? 주 중에도 충실한 참 크리스챤으로 살 것인가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도 내 생활 전 반에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필요할 때만 적용할 것인가?
● 신앙이 선택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던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바른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할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경의 어떤 인물을 자신의 본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자체를 선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했는데 오래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부부가 창세기를 읽다가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기와 동일시하려 할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엘가나와 한나 부부를 발견하고 그를 자기들과 동일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혹시 혼자 독신으로 사는 분은 바울을 자신의 인생의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느 쪽을 본으로 삼든 그 선택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를 본으로 했다면 25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한나를 선택하였다면 자식을 젖 떼자마자 자식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요셉을 본으로 했다면 종살이 감옥 그 억울한 상황도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쓰라린 아픔은 수용하지 않고 단 열매만 선택한다면 이는 신앙적인 선택이 아니라 미신적인 선택입니다.
둘째, 무엇을 선택하던 그 동기의 중심이 주님이라면 그 선택은 옳은 선택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데도 건강한 사람도 택할 수 있고 장애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배운 자를 선택할 수 있고 배우지 못한 자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동기가 자기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라, 중심으로 주님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옳은 선택이며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수신앙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신앙을 선택합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모두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의 선택은 모두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명에를 위한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베다니의 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 이 이야기의 내용 관찰
1) 마르다는 무엇을 하였고, 마리아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39-40절
2) 마르다는 예수님께 뭐라고 하였습니까? 40절
3) 예수님은 그녀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41,42절
(눅10:41)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 10:42)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합니까?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선택, 마르다는 말씀 듣는 것을 제쳐놓고 먹는 것만 만드는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누가 봉사는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어느 모임이든 음식을 만드는 봉사의 손길이 없이는 모임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봉사의 손길을 가긴 자의 신앙은 모임의 앞자리에서 말씀 듣는 자보다 대개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는 신앙이 깊은 여자입니다. 마르다는 수고만하고 칭찬 못 듣는 사람으로 취급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마르다는 조금 나무래 듯 말하는 것은
자기 수준에서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것을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하셨습니까?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어떤 수준에서 선택했든지 그것은 옳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3.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 우리가 자주 목격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고아원을 하는 사람은 양로원 운영하는 사람의 고아원 무관심에 대하여 무조건 비판한다는 사실입니다. 양로원을 선택한 사람도 아름답고 고아원을 선택한 것도 아름답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일이든 건강한 사람을 위한 일이든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다 그리스도안에서 옳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주님이 책임을 져주신다는 것도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 선택에 대해 끝가지 소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어려운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주님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명의식을 가지고 끝까지 잃지를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부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밤낮없이 뜁니다. 그러나 열심히 사역하다 어느 날 국민학교 동창회를 다녀와서 내 나이에 내 동창 누구는 대학도 안나왔는데 강남에 거대한 저택이 둘이고 10억짜리 아파트가 있고 아이들을 하버드에 딸은 옥스퍼드에 유학을 보냈고 자가용은 고급승용차를 굴린다고 손해 본 것으로 생각을 하면 그는 목회자의 길을 잘못 선택한 사람입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명의식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선택은 주님의 선택입니다.
주님이 언제나 나를 선택하여 써주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누가 어디에 써주시는가에 달렸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얼마나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인가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택보다 선택된 그 결과 왕좌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선택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선택과 결단으로 왕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사울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은 반대입니다.
(삼상 16: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豫選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豫選하였다 . 다윗은 예선만 한 것이 아니라 본선에서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예선하여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음을 잊지를 말고. 이제 그 선택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나의 선택이 마주 칠 때 다윗처럼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 파바로치의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진로, 배우자, 신앙 그 선택은 과연 주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입니까? 이에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주를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하였다면
1) 우리는 다른 형제의 주안에서의 좋은 선택을 서로 존중할 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당신이 주님 안에서 좋은 선택을 하였다면 그 선택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당신이 주안에서 좋은 선택을 하셨다면 끝까지 소명의식을 가지고 헌신하게 해달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눅 10:41-42)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좀 모자라는데다가 행동까지 게을러 어떤 일도 하기 싫어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걱정 끝에 이 청년을 제주도 오렌지 농장에 취직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대단히 간단한 단순 노동입니다. 수북이 쌓아놓은 오렌지 중에서 모양이 좋은 것을 골라서 과일가게에 보내도록 왼쪽으로 분류하는 아주 단순한 작업입니다. 이 정도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고 부모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하루하고 그 다음 날 오후에 사표를 쓰고 말았습니다. 하루 종일 수천 번이나 선택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만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평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선택에 의해서 내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마리아는 좋은 선택을 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선택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일까? 이 밤에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1. 선택은 결단과 동일한 말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전공, 진로, 직장, 배우지 등등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선택이요 또한 결단입니다.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는 그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를 잘 살펴야한다.”
가령 열개의 과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면 그것은 나머지 아홉 개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아홉 개를 버려야 하는데 이에 후회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에 따라 작은 것이 커 보일 때가 있고 적은 것이 많아 보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 잠간 음악을 감상하고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인 이 사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루치아노 파바로티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빵 장수를 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 많은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청년기를 거치면서 그의 관심은 음악보다 교육에 관심이 쏠려있어 대학 전공도 교육이었습니다. 졸업 때가 가까워지자 그는 진로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내심 교육과 음악 둘 다 동시에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의 방에 들어가, 방 가운데 의자 두개를 멀리 떼어 놓은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에 동시에 앉으려면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의자에 앉으려면 반드시 한 의자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그는 결코 두개의 의자 위에 동시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한 끝에 성악을 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선택을 잘한 경우에 속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정몽준의 극적인 선택도 그런 경우인지 모릅니다.
2. 신앙은 선택입니다. 인생이 선택이라면 신앙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주일 만 대충 지키는 선데이 크리스챤이 될 것인가? 주 중에도 충실한 참 크리스챤으로 살 것인가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도 내 생활 전 반에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필요할 때만 적용할 것인가?
● 신앙이 선택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던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바른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할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경의 어떤 인물을 자신의 본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자체를 선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했는데 오래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부부가 창세기를 읽다가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기와 동일시하려 할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엘가나와 한나 부부를 발견하고 그를 자기들과 동일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혹시 혼자 독신으로 사는 분은 바울을 자신의 인생의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느 쪽을 본으로 삼든 그 선택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를 본으로 했다면 25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한나를 선택하였다면 자식을 젖 떼자마자 자식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요셉을 본으로 했다면 종살이 감옥 그 억울한 상황도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쓰라린 아픔은 수용하지 않고 단 열매만 선택한다면 이는 신앙적인 선택이 아니라 미신적인 선택입니다.
둘째, 무엇을 선택하던 그 동기의 중심이 주님이라면 그 선택은 옳은 선택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데도 건강한 사람도 택할 수 있고 장애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배운 자를 선택할 수 있고 배우지 못한 자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동기가 자기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라, 중심으로 주님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옳은 선택이며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수신앙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신앙을 선택합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모두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의 선택은 모두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명에를 위한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베다니의 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 이 이야기의 내용 관찰
1) 마르다는 무엇을 하였고, 마리아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39-40절
2) 마르다는 예수님께 뭐라고 하였습니까? 40절
3) 예수님은 그녀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41,42절
(눅10:41)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 10:42)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합니까?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선택, 마르다는 말씀 듣는 것을 제쳐놓고 먹는 것만 만드는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누가 봉사는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어느 모임이든 음식을 만드는 봉사의 손길이 없이는 모임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봉사의 손길을 가긴 자의 신앙은 모임의 앞자리에서 말씀 듣는 자보다 대개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는 신앙이 깊은 여자입니다. 마르다는 수고만하고 칭찬 못 듣는 사람으로 취급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마르다는 조금 나무래 듯 말하는 것은
자기 수준에서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것을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하셨습니까?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어떤 수준에서 선택했든지 그것은 옳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3.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 우리가 자주 목격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고아원을 하는 사람은 양로원 운영하는 사람의 고아원 무관심에 대하여 무조건 비판한다는 사실입니다. 양로원을 선택한 사람도 아름답고 고아원을 선택한 것도 아름답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일이든 건강한 사람을 위한 일이든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다 그리스도안에서 옳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주님이 책임을 져주신다는 것도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 선택에 대해 끝가지 소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어려운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주님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명의식을 가지고 끝까지 잃지를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부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밤낮없이 뜁니다. 그러나 열심히 사역하다 어느 날 국민학교 동창회를 다녀와서 내 나이에 내 동창 누구는 대학도 안나왔는데 강남에 거대한 저택이 둘이고 10억짜리 아파트가 있고 아이들을 하버드에 딸은 옥스퍼드에 유학을 보냈고 자가용은 고급승용차를 굴린다고 손해 본 것으로 생각을 하면 그는 목회자의 길을 잘못 선택한 사람입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명의식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선택은 주님의 선택입니다.
주님이 언제나 나를 선택하여 써주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누가 어디에 써주시는가에 달렸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얼마나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인가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택보다 선택된 그 결과 왕좌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선택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선택과 결단으로 왕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사울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은 반대입니다.
(삼상 16: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豫選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豫選하였다 . 다윗은 예선만 한 것이 아니라 본선에서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예선하여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음을 잊지를 말고. 이제 그 선택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나의 선택이 마주 칠 때 다윗처럼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 파바로치의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진로, 배우자, 신앙 그 선택은 과연 주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입니까? 이에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주를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하였다면
1) 우리는 다른 형제의 주안에서의 좋은 선택을 서로 존중할 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당신이 주님 안에서 좋은 선택을 하였다면 그 선택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당신이 주안에서 좋은 선택을 하셨다면 끝까지 소명의식을 가지고 헌신하게 해달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눅 10:41-42)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