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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선택 (신 30:15 ~ 20)
사람이 흥하느냐, 망하느냐,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는 올바른 선택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그래서 “인간을 선택의 상황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특권을 주셨는데 그것이 자율선택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창2:16~17).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율 선택권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선택권을 가지고 죽음과 저주를 선택했습니다. 인간의 자율 선택권을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신30:19~20).
이 말씀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유언의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의 길이 있고, 죽음의 길이 있으니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잘사는 길이 있고, 망하는 길이 있으니,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에게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선택은 그들의 평생을 - 아니, 그들의 영원한 미래까지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올바른 선택의 길은 어떤 길인가?
Ⅰ. “좁은 길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갈 갈을 제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좁은 길이란 어떤 길인가? 한 곳으로만 가게 하는 외길입니다. 그 길은 힘든 길입니다. 그 길은 불편한 길입니다. 그 길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유혹이 있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여러 곳에 장애물도 있습니다. 가파른 고갯길도, 천길 만길 낭떠러지도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즐거움이 있는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땀도 흘리고, 때로는 눈물도 뿌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가고, 원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 길은 여름에 땀 흘려 일하는 개미의 길이 아니고,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놀면서 노래하는 배짱이 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잠시 잠깐 여름 한 철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입니다. 넓은 길에는 작은 길도 많고, 교차로도 많습니다. 넓은 길에서 둘러보면 여기에도 길이 있고, 저기에도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봅니다. 이것을 방황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방황하다가 길을 잃어버립니다. 길이 없어서 잃어버리지 않고,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여기저기에 길이 많아도, 점과 점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직선은 하나뿐입니다.
인생이 가야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세상에 많은 어떤 종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마1:21).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길은 외길입니다. 오직 예수뿐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곳에만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곳에만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곳에 장수의 길이 있고, 자손이 잘 되는 길이 있고, 그 곳에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좁은 길! 오직 한 길! 너와 네 자손이 잘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Ⅱ. 외모보다 중심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막내아들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기름 부으려 할 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평가 기준은 어떻습니까? 외모입니다. 키가 크냐? 예쁘냐? 얼마나 배웠느냐?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나 배경이 좋으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 기준은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6~27).
예수님의 평가 기준은 사람과 다릅니다. 얼마나 겸손하냐? 누가 더 섬기느냐? 누가 더 희생하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가르칠 때 인생을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고후 4:7). “우리가 질그릇에 이 보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유약을 바르지 아니한 광채가 없는 그릇입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볼품도, 모양도 없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서, 그 질그릇의 값이 달라집니다.
성도는 이 질그릇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여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고후4:8~9)..
이보다 더 귀한 인생이 있겠는가? 이보다 더 값진 인생이 있겠는가? 여러분 안에 이 예수를 담으시기 바랍니다.
Ⅲ.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2장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복의 샘터입니다. 복의 원천입니다. 복이 샘솟아서 밖으로 넘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을 받았으면 그것을 남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공부 많이 했으면 지식을 통해서, 사업에 성공했으면, 물질을 통해서, 기술자는 재능을 통해서, 학자는 학문을 통해서, 그 받은바 축복을 남을 위하여 사용해야합니다. 역사가 평가하는 인간의 가치는 소유의 양에 있지 아니하고, 소유를 얼마나 남을 위해 선용했느냐에 있습니다.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아는 것을, 남을 위해 이바지 했느냐에 평가 기준을 두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쌓아 두었느냐? 가 아니고, 이웃에게 얼마나 빼앗겼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선용하시는 성도님 되시 길 바랍니다.
출처/이윤형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