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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5-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보에는 본래 약속한 결혼생활에 대한 마지막 연속설교의 본문과 제목이 실려 있습니다만 주보와는 달리 본문을 읽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변경한 경위는 지난 금요일 특별기도회 때 무슨 주제로 마지막 기도부탁을 드려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방금 제가 읽은 본문 누가복음 11장 13절 후반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한 저도 사실 잘 몰랐는데 다른 때 보다 원고에 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 하려고 그랬지요. 금요일 저녁에는 교회당은 크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100명 내외 모였기 때문에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고 설교를 끝냈는데 내려가니까 의외로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집에 가니까 문자가 들어오고 밤 11시가 넘은 깊은 시간에 기도회에 참석했던 장로님께서 “당신 생각이라면서” 안식년을 앞두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주일날 이 설교를 1, 2, 3부에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앵콜 공연을 갖습니다. 사실 앵콜 공연은 하는 사람의 실력이야 그 실력이 그 실력이니까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나한테 달려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물론 원고는 제가 가지고 있지만 전할 때에 어떻게 성령께서 역사 하실지는 제가 예측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고민을 좀 하긴 했지만 10년 동안 없던 요청이고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안식년을 앞 둔 마지막 주일날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란 주제로 설교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금요일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님들과도 안식년 휴가동안 제가 갖고 있는 기도의 제목을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금요일 특별기도회에 안나온다고 울산교회 교인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분들 하고도 나누는 게 좋겠다 싶고요. 또 하나는 이 시대의 어떤 주제보다도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을 맞이해서 6개월 동안 휴가를 떠나면서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기도제목이자 이 시대에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바로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요 공동체적으로는 “부흥을 구하는 기도”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절실하고, 이 땅의 교회가 민족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새롭게 되는 부흥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성령 충만한 삶, 교회적으로는 부흥이 도래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한국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일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부흥하면 여러분의 사전 속에서는 “부흥회” 혹은 “부흥사경회” 아니면 “심령부흥회”를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부흥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름만 부흥이라고 달았지 부흥은 그렇게 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수막을 붙이고 강사를 초빙해 와서 집회를 한다고 부흥이 오는 것 같으면 날마다 부흥회를 했겠지요? 그러나 이 땅에 1907년에 부흥 운동이 있었고 100년 동안 그런 스케일의 부흥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흥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한 사람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이 부흥의 역사는 한 세기를 주기로 해서 일어나는 역사라고 합니다.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100년을 어간으로 해서 일어나는데,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역사해야 교회가 새로워지고 성도들이 힘을 얻게 되는데 만약에 100년을 주기로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가 세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 차이가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그렇고 행동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가 점점 세속화 되고 시간이 더 흘러가면 교회가 사라져버리는 그게 현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1907년에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거든요. 내년이 2007년입니다. 100년 째 되는 해입니다. 이 어간에 이 수년 내에 부흥이 도래하지 않으면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값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최근에 여러분 그런 기사 보셨죠? 왜 지난 10년 동안 통계를 보면 천주교는 굉장히 많이 부흥을 했는데 비해서 신교 쪽에는 부흥의 속도가 많이 늦추어졌다고요. 그 중요한 이유는 목회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나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이게 자질이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동시 다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질 때 그걸 부흥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인데 우리가 일으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어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조직해서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최근 국민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니까 내년 3월에 평양에서 대규무의 기독교 대중 집회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기념해서 평양 땅에서 기독교 대중 집회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그렇게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정의상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계획하거나 연출할 수 없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교회에 특별히 부어주시는 일인데, 그러면 무기력하던 성도들이 새롭게 되면서 능력을 입어 놀라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데 비가 안 와서 심어놓은 모가 타들어 가는데 그냥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물지게 지고 가서 퍼다 붓든지 호수를 대서 물을 댑니다. 그러나 비가 계속해서 내리지 않으면 그것 가지고는 농사가 안됩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그런 상황에서 물을 파봤자 팔 데도 없고 나올 데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냅니다. 비 오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래서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면 몇 시간 내에 해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새생명훈련도 시키고 제자훈련도 해서 뭔가 좀 그냥 타들어가는 논바닥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까 일 한다고 하지만 이게 정답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희망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사람이 조직을 만들어 할 수가 없어요. 대회는 사람들이 만들 수 있지만 부흥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흥을 대망하며 몇 년 전부터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앞두고 “Again 1907”을 소원하는 모임이 구성되면서 “Again 1907 부흥이여 다시오라”는 찬양을 보급하고 부흥을 위한 연합기도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앞두고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질 일은 부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대규모의 집회를 함으로서 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앞두고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함께 기도 드려야 될 제목이 무엇이 있을까요? 10년 넘게 11년 가까이 여러분과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할 때 우리 담임목사인 정근두 목사의 기도제목 1번이 뭘까? 여러분도 추리를 하고 저도 여러분에게 아직까지 이거요 하고 내놓지를 않았다면 우린 정말 10년 만난 게 좀 아깝습니다. 10년 공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말이 있던데 같이 한 10년을 지냈고 이제 안식년 갖는다고 휴가를 가면 목사님이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을지, 여러분이 어떤 기도를 함께 해야 될 것인지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한 기도가 우리에게 공동 기도제목이 되어야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 성도들이 열흘 동안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기도에 마음을 합하기로 결단하고 자신을 드리는 일입니다.
마치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사생결단하고 드리던 야곱의 기도처럼 씨름하는 일입니다. 정례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도는 늘 할 수 있습니다.
일상적이지 않는 특별한 기도를 가슴에 품는 성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런 성도들이 “일백 이십 명”정도만 있으면 하나님이 이 땅의 역사를 바꾸실 것 같습니다. 내일 새벽에 월드컵을 응원하려는 정도의 열심을 가진 성도들이 결집한다면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1세기의 속화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강하게 도래하기 위해서 기도의 제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사생결단하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13절 끝 부분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도전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령은 아버지께서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 천부께서”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이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제일 우선순위를 두고 구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입니다.
누가복음 1장부터 10장 까지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11장 들어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될 것인지, 어떻게 강청해야 될 것인지 어떻게 반복해서 기도해야 될 것인지를 말씀한 다음에 무엇을 기도해야 될 것인지를 13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될 제목이 많고 많겠지만 성령을 구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혹시 아이들 동화책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세 가지 소원, 이런 것 있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그러면 여러분은 첫째, 둘째 소원이 뭐고 셋째 소원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딱 한 가지만 들어주겠다고 하면, 기도하신 권 장로님부터 시작해서 늦게 지각해서 저 4층에 앉아 있는 분까지 어떤 기도 제목을 딱 하나만 들어준다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쭉 들어보면 아주 휘황찬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각자가 제목이 다 달라서 완전히 장개석 부대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들이라고 하면 딱 하나 구하는 기도가 일치해야 이게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백성이요 군사들이지 장로님은 이런 기도제목 가졌고 목사님은, 집사님은, 권사님은 다 다른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으면 일을 쳐내겠습니까? 한 마음이 되어서 “대한민국” 하듯이 전체 뜻이 하나가 되어서 이야기를 해야 이게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될 것인데 기도 제목을 좀 정리하고 제가 안식년 가고 싶어서 오늘 갑자기 본문을 바꾼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모두가 밤낮없이 생각하고 사모하며 기도하는 제목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보다 더 절실한 기도제목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이제부터 부르짖기 바랍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데 무슨 성령을 또 달라고 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면 무식한 기도처럼 취급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고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절대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떤 집에 손님이 되어서 가면 저한테 때 되면 밥 주고 잘 때 되면 이불 깔아주고는 하지만 다른 것은 기대 안 해도 난 아무 말 안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목사님 오늘 가정 예배 때 목사님이 좀 인도해 주시렵니까?”그러면 제가 거절하겠습니까?
지난달 터키여행은 목회자 여남은 가정이랑 같이 했습니다. 만난지 십 한 오년은 다 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한번도 나한테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릴 때부터 성령 세례에 대해서 내 경험, 내가 생각한 게 뭔지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 잡기가 힘들어서 결국 터키에서 떠나는 마지막 날 오전에 모여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같이 기도 했습니다. 요구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 뭐 해라. 이야기 할게.” 그러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언제나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사모하고 우리가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으면 그분은 예의 바르신 분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회개하여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이 약속은 내 설교를 듣고 있는 저희들과 너희 어린 아이들과 모든 먼 데 사람,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사람에게 까지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유효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보면 알잖아요. 내가 이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틀림없거든요. 어떤 때는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내 꼬라지가 이게 신앙생활 하는 게 맞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맞는 건 틀림없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맞아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답게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알잖아요. 이게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서 만족하고 세월을 보내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한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정말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성도들처럼 세상을 뒤집어엎는 이런 역사에 쓰임 받게 해 주십시오” 이게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를 자녀삼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능력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를 우리가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기도제목의 1번에 와야 됩니다. 2번, 3번, 4번은 여러분과 제가 틀릴 수 있어요. 그러나 1번 기도제목은 똑 같아야 이게 같은 부대 아닙니까?
제자훈련, 새생명훈련, 그냥 논밭 갈라지는 것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합니다. 그러나 진짜 역사는 소낙비가 와서 몇 시간 내리면 끝납니다. 그런 역사가 저는 울산에서 울산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사실은 어떻게 보면 제가 있는 동안에 이런 역사가 딱 터져야 그래도 좀 빛을 볼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담임목사가 장기 휴가를 가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이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담임목사 있으나 마나 이럴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서 저도 한편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좀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진짜 바로 생각해 보면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야 되거든요.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저는 저쪽 태평양 건너 있는 동안에 “아무개 목사가 설교하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터져버렸다” 그래도 나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근두 목사 안와도 되겠다고 통고를 해도 저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만 있다면 말입니다.
진짜 아프리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요. 어떤 선교사가 열심히 성도들한테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는데 막상 부흥이 터진 것은 선교사가 딴 데 전도하러 나갔을 때 본 교회에서 역사가 일어났다니까요. 난 그래도 상관이 없어요.
어쨌든 지금 이대로 가서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건물가지고, 의식가지고 한몫 보려고 하면 길 건너 저쪽, 복산성당이 낫다니까요. 요새 건물 올라가고 있는 것 보셨지요? 건물만 멋지게 올라갈 뿐만 아니고 순서도 그럴 듯해요. 신앙이 없는 사람이 볼 때는 흥얼거리는 것도, 종치는 것도 뭔가 있어 보이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토고전 볼 때에 후반전을 시작하는데 토고선수가 머리를 땅에 대고 고개를 들더니 성호를 긋더라고요. 그러는 순간 내 마음속에 확신이 오더라고요. 우리가 이겼다. 왜냐면 우리는 23명 중에서 12명이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 손들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그 때 우리가 밀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이겼어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해야 일이 되는 동네지 건물가지고 비교하면 천주교가 훨씬 더 좋은 건물 가지고 있습니다. 순서,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순서지만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고 2천년동안 꾸며놓았습니다. 그쪽하고 우리는 게임이 안돼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다는 그것 때문에 건물에 별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예배순서? 안 써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께서 역사를 안 하면 건물로도 안 되고 순서로도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 본문에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에 “좋은 것”이란 단어가 오늘 우리 본문 13절에 “성령”로 바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악한 인생들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압니다.
어떤 아비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는 자식에게 독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 자녀에게 무서운 전갈을 주겠습니까? 자식의 손에 독을 지닌 것을 놓아줄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악한 자들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안다면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을 아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10년, 30년, 50년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수없이 기도해 왔잖아요. 기도 안한 사람 있습니까? 다 해왔습니다. 여러 가지 구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구해왔습니까? 생선과 달걀, 아니면 빵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까? 이제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성령을 구하도록 초대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선물은 당신 자신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의 영, 성령을 구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구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복 주시는 성령님을 구하도록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안의 ‘지금’, ‘장차’라는 말은 제가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한다. 오순절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도 너희와 함께 거한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또 장차 오순절 시점이 오면 너희 속에 새로운 차원에 계시겠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에 오시면 우리 삶은 변합니다. 지금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게 맞지만 새로운 차원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시면 지금까지 살면서 온갖 불만 불평 그 모든 것이 다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장미꽃에도 감사하지만 장미꽃 가시에도 감사한다고 노래하는 것을 여러분 아시지요?
성령이 임하면 뭐든지 맡기면 “못해요” 하는 못해 신자들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만큼 긴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기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식보고 “너는 내 발뒤꿈치라도 따라와”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렇지요? “너는 나보다 훌륭하게 될 거야. 너는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해 주실거야. 나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어.” 이렇게 자식을 향해서 말을 해줘야 그게 축복이 됩니다. 그렇죠?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은 자녀들 중에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고, 자식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주시지 않지만 어떤 자식에게 준다고요? “구하는 자에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성령의 능력을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시리라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장로교 신학의 틀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구하라”는 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세기 교회의 역사를 보면 곳곳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하고 숫자가 느는 곳마다 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바른 교리의 신학을 갖고 있는 교회가 구하지 않으니까 엉뚱하게 준비도 안 된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서 역사를 한다니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봤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의 3분의 2는 성령이 있다는 것을 믿지만 한번도 자신의 삶에 경험해보지 못했고 능력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3분의 1만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인이 성령을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교리와 역사를 망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가 칼빈주의라 불리고, 칼빈주의 하면 5대 교리가 있지 않습니까?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자라는 것을 무엇보다 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이 역사가 우리가 믿는 장로교 신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인 일을 할 때에 전면에 서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니까요. 우리 교리가 그걸 믿고 있고 장로교의 역사를 보면 부흥의 역사는 감리교도들, 아니면 침례교도들을 통해서 나타나거나 아니면 천주교도를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장로교를 통해서 지금까지 역사를 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 하면 오순절파의 독점물인양 생각하는 무식이 판을 치는 현실을 우리는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기 가장 뛰어난 장로교 신학자로 인정받는 워필드는 “발전된 성령교리는 배타적으로 신교 교리이며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개혁주의 교리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면 청교도 교리”라고 선언합니다.
“주님, 성령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기도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에 접선이 되어야 됩니다. 능력 있는 증거와 탁월한 봉사를 하는 사람 치고 성령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니까요. 우리가 착해질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오른뺨을 맞으면 우리는 화가 난다니까요. 예수 믿는 사람이 분명한데,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른뺨을 맞는 순간에 왼뺨을 돌려대는 무서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지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면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 세상을 뒤집어엎는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축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주의 성령에 붙잡힌바 되기 전에는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 116문답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성령을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구하는 자들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문장이 너무 길어지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요약하면 왜 기도하나? 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나? 딱 한마디로 은혜와 성령받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우리 기도하지 않아도 천국 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왜 천국 못갑니까? 그러나 왜 기도가 필요하냐? 답은 은혜와 성령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구하는 자들에게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시는 은혜와 성령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백년을 주기로 부흥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내년이 100년째 되는 해입니다. 반드시 이 수 년 내에 일어나야만 이 민족 교회가 교회로 남을 수가 있습니다. 저 북쪽 사람들은 필요할 때는 우리 민족끼리 이야기 하지만 축하해 주는 방식이 좀 다르다니까요. 우리는 내일 16강에 들어가기 위해서 새벽에 이겨야 되는데 저쪽에는 우리를 위해서 대포동을 쏘아 올리겠다고 하니까 이게 한 집안인지 실감이 납니까?
평양, 거기에 100년 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평양 한가운데 가면 주체탑이 서 있습니다. 만물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봉수교회 가서 제가 그랬어요. “여러분은 그렇게 써놓았지만 나는 창세기 1장 1절 본문으로 읽은 대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만든 사람이 주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 평양은 예사로운 도시가 아닙니다. 100전에 이 땅에는 민족을 살리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땅에 그러한 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라고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흥이 찾아와야 교회가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부흥이 찾아오면 교회가 민족 역사의 큰 흐름의 핵심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부흥에 관한 이야기들이 신문에 나올 때 마다 자세히 살펴봅니다. 어디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하면 찾아가서 보기도 합니다. 제가 번번이 실망합니다. 실망하는 이유는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면 부흥이 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조직은 될 수 있지만 부흥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성도들이 곳곳에 자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5,6개월 동안 계속 만나지 못하지만 저는 이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셋째, 넷째 기도제목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같은 교회에서 속한 게 맞다고 하면 우리가 구해야 될 기도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성령 충만이요 공동체적으로는 이 땅에 다시 한번 부흥이 있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헤어질 때 마다 부흥을 노래하고 있는 것을 알고계십니까? 부흥이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여러분이 주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정근두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