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2
성령의 열매 - 선함 (잠 22:1-9,마 20:1-16)
오늘은 성령의 열매 여섯 번째 열매인 양선(良善) 즉 '선함'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용어 'agathosune'(아가도쉬네) 는 도덕적 뛰어남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도덕적인 면에서 아주 뛰어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로서 '선함'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선한 사람,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됨을 뜻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원래 주셨던 '선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악하여졌고, 악이 점점 더 번성하게 되어 이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선함'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그것을 통하여 선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스스로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 선인 줄 알면서도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보다는 악의 길로 더 많이 치우쳤습니다. 한 번 죄로 오염된 인간의 마음 속에 '선함'이 자리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형식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거룩하고 선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마음이 선하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이중성을 비판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속에는 온갖 더러움이 깃들여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겉으로만 선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위선자(僞善者)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들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저들은 율법의 형식은 잘 지켰지만, 그 근본정신인 사랑과 진실함을 놓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잃어버린 '선함'을 되찾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선함'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선함'은 너그러움이다
예수님은 먼저 비유를 통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마태복음 품꾼들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너그러운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른 아침에 들어온 일꾼들이나 오후 늦게 들어온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임금을 지불하자 먼저 들어온 자들이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선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반 데나리온을 주어도 문제는 없었지만, 적어도 한 데나리온을 가져야 하루의 생활을 할 수 있기에 주인은 그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여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즉 여기서 '선함'은 관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동정하며 그것을 도우려는 너그러움이 바로 '선함'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만약에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이른 아침에 나가서 포도원에 필요한 일꾼들을 모두 불러서 일을 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자기 포도원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나가서 일군들을 불러들여 일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 차이에 상관없이 들어온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준 것도 이 주인이 선한 사람임을 뜻합니다. '선함'은 항상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잠언 22장 9절에 "선한 눈을 가진 사람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눈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보는 눈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으로 보면 bountiful eye라고 하였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눈이란 뜻입니다. 언제나 남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퍼줄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에 빠져 모두 멸망당할 사람과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사람과 모든 세계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함'과 사랑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행의 극치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서 사랑과 자비와 양선을 따로 구별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각기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선함'은 사랑의 희생과 너그러움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웃에게로 파급되는 선행
'선함'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 머물지 않고 그가 가진 가능성과 '선함'을 일깨워주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함'은 '선함'에서 끝나서는 안되고 그 '선함'이 더욱 널리 전파되게 하는데 진정한 '선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만 착한 일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선함'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어느 목사님이 전장에서 부상당해 누워 있는 병사를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손에 들고 그 부상자를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좀 읽어드릴까요?"
"목이 몹시 마릅니다. 우선 물을 주실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 준 물을 다 마신 다음 또 다른 요구를 하였습니다.
"제 머리 밑에 뭔가를 좀 받쳐 주시겠습니까?"
목사님은 코트를 벗어 둘둘 말아 부상자 머리를 받쳐 주었습니다.
"너무 추운데 덮을 거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목사님은 웃옷을 벗어 그를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부상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내게 방금 해 주셨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남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만드는 그런 말씀이 그 책 속에 있다면 그걸 좀 읽어 주십시오."
'선함'이 그 마음 속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그 '선함'은 곧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선함'은 사람을 감동케 하여 그 사람 속에 잠들고 있던 '선함'을 일깨웁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일깨우신 '선함'이 그대로 이웃에게 전달될 때 그것은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그 이웃에게 전파되고 그 이웃의 '선함'이 또 다른 이웃에게 전달되어 크게 파급되어 갑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이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되었고, 그 제자들은 이 선한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계 속으로 이 복음이 퍼져서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며 그 사람들 속에 잃었던 선을 되찾아 그 선이 점차 널리 퍼져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그러나 이 세상에는 성령의 열매인 '선함'이 쉽게 퍼져가도록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자리잡은 악이 이 '선함'의 도미노 현상을 막고 있습니다. 즉 '선함'이 널리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장애가 가로 막혀 있습니다. 악은 체면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날뛰며 선을 공격합니다. 폭력과 사기와 거짓, 부당한 압력과 착취 그리고 권모술수를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는 악의 세력 앞에서 선은 때로 무기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두들겨 맞고 상처를 받으며 고난을 당할수록 점점 빛나는 것은 선이요, 때릴수록 힘이 빠지는 것은 악입니다.
이런 악의 발악을 막아내는 방법은 그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 자신이 그 악의 세력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악을 선으로 정복하고 승리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의 인내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를 잘 참아 내셨기 때문에 악을 선으로 정복하는 역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선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폭력적으로 혹은 더욱 비열한 방법으로 대드는 악을 어떻게 막아내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입니다. 나를 괴롭힌 원수에게 선을 베푸는 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대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닙니다. 결국 성령께서 가져오시는 하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선함'이 진정한 '선함'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함'은 단순한 도덕적 '선함'이 아니라 인내와 놀라운 능력을 동반한 성령의 열매로서의 '선함'이어야 합니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 이야기를 종종 하였습니다만, 오늘의 설교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30대 흑인 목사로서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몽고메리시의 한 흑인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해 갔을 때 그 도시에서 발생한 버스 승차 차별대우 철폐운동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차별 대우가 없어질 때까지 그 도시의 모든 흑인들이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일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킹 목사는 그동안 백인들로부터 수없는 협박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그의 집에 백인이 던진 폭탄이 폭발하였습니다. 흥분한 흑인 군중들이 제각기 흉기를 들고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경찰들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중이었고 이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조금만 건드리면 곧 폭동으로 발전할 직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킹 목사가 군중들 앞에 나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흉기를 가지신 분이 계시면 그것이 원래 있던 곳에 가만히 갖다 두십시오. 우리는 보복적인 폭력으로써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비폭력으로 맞아 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짓을 하든지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음성으로 지금도 외치고 계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이것을 기준 삼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증오를 사랑으로 맞아야만 합니다. 자 여러분, 이 찬연한 신앙과 빛나는 확증을 가지고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킹 목사님의 말이 끝나자 군중들은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섰더라면 몽고메리의 흑인 민권운동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을 비폭력으로 대함으로 마침내 찬란한 승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함'을 성령의 열매에 포함시킨 이유가 바로 악을 참아내며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선함'을 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악을 끝까지 견디며 '선함'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가져오시는 하늘의 능력에 의지해서만 가능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시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악의 세계로부터 선한 세계로 나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악의 세계에 살 때 우리 속에 스며들었던 모든 악을 씻어내고 이제는 선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선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선을 받아드릴 때 그 선이 우리 속에 있던 악을 몰아내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선을 바로 행하기에 충분한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예술가와 사귄다고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훈련을 받고 노력할 때에 가능한 것처럼, 선함도 끊임없는 자기 의지의 결단과 노력이 뒷받침 될 때 점점 더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 속에 선함이 자라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현장에 가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노라면 내 속에서 선함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가령 독거노인 반찬을 배달할 때 한 번 같이 동행해 보십시오. 남을 돕는 일이 얼마나 큰 보람이며 기쁨인가를 알게 되면서 내 속에 선함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 속에 이 선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선함을 그대로 속에 묻어두지 마시고 그 선함을 따라 행동을 하십시오. 하루에 한 가지씩 선한 일을 행하도록 결단하고 실천하면 여러분 속에 있는 선함이 더욱 분명하게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 선함이 성숙하게 될 때에 우리는 마침내 원수까지도 너그럽게 받아드릴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선함을 따라 행하는 친절과 봉사와 헌신이 다른 사람의 선함을 자극하여 선함이 점점 더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이 교회 안에서 베푸는 친절한 말과 행함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그 기쁨이 온 교회에 퍼지면서 이 교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열매인 선함이 이미 여러분 속에 들어와 있음을 확인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그 선함을 활용하여 뛰어난 도덕성을 갖추며 선한 일을 많이 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 받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