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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같은 실패 (삼상15:4~12)
인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뿐입니다. 두 번 세 번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인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꼭 성공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게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제 딴에는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막상 따지고 보면 자신 있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많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남 보기에는 성공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실패한 인생도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부실 공사한 건물과 같습니다. 허울 좋고 번뜻해 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성수대교 같이, 삼풍백화점 같이 실패한 인생이 허다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는 인생을 크게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본래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삼상9:21에서 본인이 고백한 대로, 그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미약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겁니다. 왕이 된 후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 족속을 막아냄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도 받고 명성도 얻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정말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인생을 분명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애초부터 실패한 인생이라면 그렇거니 할 텐데, 한참 잘 나가고 성공한 줄 알았는데 와장창 무너졌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지금 어렵고 힘들다는 것만으로 스스로 실패했다고 예단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남은 생애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겉보기에 실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성공으로 인정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어쭙잖게 성공했다고 예단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돈 좀 벌었다고, 조금 유명해졌다고,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왜냐하면 최종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세상 사람들도 심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1] 성공 같은 실패의 주인공 : 사울
먼저 본문의 스토리를 살펴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3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 ” 여러분, 어떻습니까? 너무 잔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2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후예로서 아주 호전적입니다. 그 이름부터 ‘호전적인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진로를 방해했습니다. 그것도 야비하게 뒤에서 공격을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지만, 아주 괘씸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함을 심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아말렉 족속 가운데 거주하는 겐 족속을 먼저 대피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은 그 명령을 받아 21만 명의 군대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싸웁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얼른 보기에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각 왕을 생포합니다. 그리고 양과 소 등 전리품을 엄청나게 챙깁니다. 정말 대단한 전과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10절~11절.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 ” 여기서 ‘후회하다’라는 단어는 인간의 후회와 좀 다릅니다. 만일 동일하다면 하나님이 잘 몰라서 실수로 사울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후회했다는 말은 한탄하시고 슬퍼하셨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을 봐도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NIV “I am grieved that ~ ” ) 23절은 더욱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또 35절을 보면 사무엘이 실망해서 다시는 사울을 생전이 보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사울은 성공한 게 아니라 실패한 겁니다. 왕의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삼상31:1~6 보면 사울은 또 다른 전쟁에서 전사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상당한 후 자살해서 죽습니다. 그 아들들도 같이 전사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버림 받은 인생’이요 ‘퇴짜 맞은 인생’입니다. 사울은 이래서 ‘성공 같은 실패’의 주인공이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인생이 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2] 사울의 실패 원인 : 명목상의 신앙
그가 인생에서 실패한 원인은 신앙의 실패입니다. 신앙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하고, 신앙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그의 신앙은 겉보기에 형식적으로는 그럴 듯했습니다. 제사를 꼬박 꼬박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입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흔히 ‘명목상의 신자’(Nominal Christian)라고 부릅니다. 사울은 이처럼 겉모습은 있지만 알맹이가 빠진 헛된 신앙이었습니다.
① 구원이 빠진 신앙 :
그는 입술로는 주여! 주여! 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없었습니다. 그 증거는 그에게 참된 순종의 행위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22절~23절) 그런 신앙으로 과연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사실이지만, 그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당연히 합당한 행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 가리켜 신행일치(信行一致)라고 합니다. 딛1:16을 보면, 신앙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자들을 경고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계3:1에서는 소아시아 교회 중 사데교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만일 이렇게 되어서 구원받지 못하면 그런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소유한 재산, 명예, 권세, 그리고 쾌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져가는 겁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 예수님은 심지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러므로 구원의 신앙을 체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내 자녀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특히 임종이 가까우면 가족들끼리, 혹은 교역자를 모셔서 체크해야 합니다.
2차 대전의 영웅이며 미국의 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임종이 임박하자 소문을 들은 지인들이 찾아갔습니다. 빌리 그래이엄 목사도 병원으로 가서 그를 면회합니다. 좋은 신앙인으로 알고 있었기에 구원의 확신은 당연히 있겠거니 하고 그저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아이젠하워가 뒤에서 부릅니다. “빌리! 나 솔직히 하나님을 만날 자신이 없소. 도와주시요. 제발!” 그 말을 듣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복음을 제시합니다. “당신의 업적 필요 없소.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응답합니다. “빌리! 이젠 준비됐소.” 얼마 후 아이젠하워는 평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인생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세상에 옵니다. 무언가 거머쥐려고. 그런데 갈 때는 손을 다 편 채로 세상을 떠납니다. 빈손으로! 헛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우리도 빈손으로 떠나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다 헛됩니다. 나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여! 빈손 들고 가오니 나를 받으소서!”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억만금을 벌고 출세하는 것보다 죄와 사망,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는 것이 제일 큰 성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믿고 꼭 구원받아 성공의 인생 이루시기 바랍니다.
② 감사가 빠진 신앙 :
신앙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빠지면 그 신앙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쟁 중 어떻게 합니까? 말씀에 불순종하고 아각 왕을 생포합니다. 왜 그랬나요? 백성들 앞에 과시하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려고 그런 겁니다. 그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으로 전해들은 사무엘은 밤새 기도하는데, 그는 그 사이에 어디로 갑니까? 12절.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으므로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려야 마땅하건만, 그는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한 기념비를 세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괜히 스스로 ‘거물’인척 하면 ‘고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이름부터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렇습니다. 겸손히 감사하며 사는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부디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들, 그래서 꼭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③ 진실이 빠진 신앙 :
신앙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정직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편재성을 믿는다면 진실과 정직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논을 속이려 듭니다. 뻔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나중에 들통이 나니까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간교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무엘이 그의 잘못을 책망하자 그는 어떻게 답변합니까? 20절~21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눈을 어떻게 속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속여도 절대 속이지 못하는 존재는 나 자신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진실과 정직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덕목이 빠지면 참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100%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관성은 있어야 합니다.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워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있어야 합니다. 부정직하게 돈을 벌면 뭐하고, 출세하면 뭐하는 겁니까? 오히려 하나님 앞에 책망 받게 될 겁니다. 사울이 왕이면 뭐하고, 전쟁에서 이기면 뭐하는 겁니까? 철저히 실패한 인생입니다.
지난 가을 수능시험 때 휴대폰 부정 사건이 있었습니다. 금년부터는 시험장에 금속 탐지기가 설치된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류대 가서 출세하면 뭐하는 겁니까? 부정직하면 큰 도둑놈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분위기를 우리 어른들이 조장한 것은 아닌지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재작년에 제가 잠시 북한을 방문했을 때 호텔에 투숙할 때 룸메이트가 이랜드 그룹의 부회장님이셨습니다. 그분은 2002 아웃렛 담당이신데, 그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랜드는 믿음의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할인매장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가장 잘 팔리는 날’(主日)과 ‘가장 잘 팔리는 품목’(酒類)입니다. 그래도 계속 확장되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게 진짜 성공이 아닌가? 하나님 앞에 진실과 정직을 지키면서 잘 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잘 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이런 성공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④ 헌신이 빠진 신앙 :
우리는 어떤 업적을 세움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 이후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이유도 섬김과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오직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들을 챙깁니다.(9절) 사무엘이 그런 사실을 지적하며 책망합니다. 19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울이 이런 지적을 받고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경건한 장로 교인의 가정에 이런 가훈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We're saved to serve!)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 버는 것도, 우리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도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나눠 주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방문했던 태국인 타위삭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태국 기독교 총회 임원인데, 태국에는 목회자가 적어 교회를 맡아 목회까지 합니다. 사업가로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런데도 교회를 잘 섬깁니다. 그리고 대개 현지인들이 외국선교사에게 은근히 돈을 요구하고 기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분은 좀 다릅니다. 우리 교회와 협력하는 강대흥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그 장로님은 태국 목회자훈련원에서 교육을 할 때 시골에서 초청한 목회자들을 위한 비용이 많이 필요할 때면, 우리 돈으로 2백만원, 3백만원씩 지원해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도 큰 돈인데, 태국인 수준에서는 정말 큰 돈이죠. 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장로님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얼마나 물질로 축복하시는지, 세탁기 제조업체를 경영하시는데 20개국에 수출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살 수 만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인생이겠습니까? 이게 참 예수 믿는 멋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 멋진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실패 같은 성공 :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하나님은 참 신앙을 가지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마6:33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세상의 기준으로 봐도 잘 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때로는 참 신앙을 갖고 누구 못지 않게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올바른 신앙으로 산다면 역시 성공한 인생입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실패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는 무엇을 증거합니까?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던 예수님이 벌떡 일어섰습니다.(행7:55~56)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는 비록 짧은 생애를 마감하며 비참하게 죽어간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영광스런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성공의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존 위클리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영어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분입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추앙받아 마땅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살아 생전에는, 아니 사후에조차 이단으로 오해받고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가 번역한 영어 성경의 속표지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이 번역되었으므로 앞으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이한 정부가 가능해질 것이다.” 수백년 후 이 글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인용했습니다. 그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크게 성공한 인생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공한 인생인 동시에 세상의 기준으로도 성공한 ‘성공 같은 성공’의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혹시 세상의 기준으로 실패했더라도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성공한 ‘실패 같은 성공’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한번 잠시 멈추어 중간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사울처럼 ‘성공 같은 실패’의 인생은 아닌가요? 세상 기준으로도 실패했고 하나님 앞에서도 실패한 ‘실패 같은 실패’의 인생입니까? 혹시라도 그렇다면 이대로 인생을 마칠 수는 없습니다. 단 한번인 나의 인생이기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공 같은 성공’의 인생이거나 적어도 ‘실패 같은 성공’의 인생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모쪼록 남은 생애 꼭 성공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