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같은 성공   (룻기 4:13-17)
            
오늘 설교제목을 실패 같은 성공이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성경의 역사를 배우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 나마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여기 나오미라는 여인을 통해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고 그에게 함께 하시고 섭리하셨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지금도 우리자신에게 역사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미라는 여인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주전 1200경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7Km 쯤 떨어진 곳에 베들레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동네는 풍요의 동네고 농산물이 많이 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있었습니다. 아주 단출한 전형적인 한가한 농촌가정입니다. 그들은 욕심도 없고 탐심도 없고 경쟁심도 없이 순전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살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던 이 나오미 집안에 갑자기 삶에 도전이 왔습니다. 어떤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불가불 이 집안은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백방으로 연구하고 생각하던 중 모압땅은 기근이 덜해서 먹을 것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 나오미 집안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야 하는가, 그 땅은 이방 땅인데, 그래도 가야하는가 그들은 고민을 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이렇게 생존을 위해서 고민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나오미 집안은 그렇게 고민하다가 마침내 고향을 떠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엘리멜렉과 나오미부부는 두 아들을 데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을 떠납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고 용기 있는 도전입니다. 이 결단은 용기 있는 도전입니다. 사람은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서 주저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길을 창조하고 발견하고 눈을 열고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오미 가족도 베들레헴에 기근이 없었더라면 스스로 결단해서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모압이라는 땅에는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이 기근으로 살수 없게 되자 눈을 뜨게 되었고 모험의 의지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압땅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압땅에 도착한 나오미 가족은 그곳에서 정착을 합니다. 두 아들을 결혼시켜 며느리를 얻습니다. 네 명이 여섯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그곳에서 인생의 절정기를 맞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이 나오미의 집안에 큰 불행이 닥쳐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졸지에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이방 땅인 여기까지 왔는데 남편도 잃고 두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그때 참 황당했을 것입니다. 말로 그 상황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여기는 타향입니다. 더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진퇴양란입니다.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때 나오미는 부끄럽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인생을 실패했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얼마나 큰 결단입니까. 고향은 성공한 사람만이 갈 곳입니다. 실패자는 갈곳이 못됩니다. 그래도 부끄럽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려니까 걸리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며느리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재가해서 행복을 찾으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랬더니 큰며느리는 순순히 돌아갔습니다. 현실을 찾아서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작은 며느리 룻은 한사코 어머니를 따라 가겠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혼자된 며느리를 데리고 초라하게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룻기서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보다보면 궁금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왜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여기서 무엇인가 강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합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몇 가지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질문은 “하나님은 나오미로 하여금 왜 이런 고난의 길을 가게 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은 지극히 안주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삶이 평안하면 도전도 없고 모험도 없고 새 길을 찾으려는 의지도 발휘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문제가 있어야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모험을 강행하게 되고 새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환경에 따라 삶의 모습이 만들어지고 변화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섭리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족은 모압에 갈 생각도 없고 상상도 하지 못하며 밀어내도 가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 가족은 모험을 감행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으로 그들이 움직이도록 섭리하시고 사인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한가지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그 땅에 심각한 기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 때문에 스스로 모압으로 내려가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나오미 가족은 결국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모압에 갔던 나오미 가족은 얼마 후 다시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생각이고 계획이고 섭리입니다. 그런데 이 나오미 가족은 모압에서 정착하려고 합니다. 살림이 안정되고 두 며느리를 얻어 살게 되니까 그곳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 후에 그곳을 떠나도록 여러 경로로 섭리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도록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있는 것 모두를 빼앗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남편도 뺏고 두 아들도 뺏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때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자녀를 뺏으시고, 남편도 뺏으시고, 조용하던 환경도 순식간에 변화시켜 버리십니다. 그때는 모두 정신이 없습니다. 나오미가 그런 경우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오미의 인생을 아주 강하게 이끌고 다니십니다. 당신의 계획과 섭리 중에서 그들을 이끌고 다니십니다. 스스로 하지 못하니까 강압적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지금 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하고 황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그 심사가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1:20절을 보면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희락, 기쁨,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마라”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내용을 모르니까 답답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이끌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지난날을 한번 되돌아 보십시요. 뭔가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된 것이 한가지나 있습니까. 살펴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의 인생 길을 이끌고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타지역에서, 타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불 신앙인들은 그것을 우연이라 하고 재수가 좋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오미의 인생을 강하게 이끌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그 고난을 통해서 나오미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다 잃었습니다. 남편도, 아들도, 꿈도, 자존심도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룻이라는 며느리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로 하여금 룻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하시려고 나오미로 하여금 이 고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나오미에게는 며느리가 둘이 있었습니다. 큰며느리는 오르바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오르바에게 너는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까 이 며느리는 순순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가 보았자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현실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가라고 했는데도 한사코 따라나섭니다. 1:16절을 보면 룻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 나도 있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이니 죽음이 떼어놓으면 몰라도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룻의 말을 음미해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생각, 뜻, 의지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공적 행복과 바꾸어 버립니다. 공적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송두리째 버리고 포기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에 이런 여인이 필요했습니다.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을 위해서 이 여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오미 가족으로 하여금 모압으로 보내셨고 그곳에서 룻이라는 여인을 만난 다음 다시 모압에서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룻은 어떤 여인입니까. 하나님은 그 후 이 룻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그것을 보시면 하나님이 왜 룻에게 애착을 가지셨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룻은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죽은 남편의 친족인 보아스와 재혼을 합니다. 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오벳입니다. 4:21절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을 보면 모든 의문이 풀어질 것입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이쯤 보면 하나님께서 룻을 골라내신 이유를 알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알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의 주선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만난 사람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이 예수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 예수를 어떻게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만난 것 아닙니까. 나와 내 부모와의 만남은 또 어떻습니까. 내 아내와 남편과의 만남은 또 어떻습니까.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같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면 이 같은 은혜를 발견하고 느끼고 체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나오미는 과연 실패한 여인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현실로만 보면 나오미는 아주 철저하게 그 인생이 실패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소중한 것을 다 잃었습니다. 여인에게 남편과 두 아들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현실로만 보면 이 여인은 아주 철저하게 실패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눈을 좀 멀리보고 역사를 보면 나오미는 아주 크게 성공한 여인입니다. 오늘 현재만 보면 불행한 여인으로 보이지만 먼 미래를 보면 아주 성공한 여인입니다. 그 성공장면이 성경 몇 군데 나와 있습니다. 4: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 지로다 여호와께서 아이를 주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하고 동네 여인들이 나오미를 축하합니다. 왜냐하면 이 룻의 남편 보아스는 유다지파 자손입니다. 그리고 왕족출신입니다. 그 혈통에서 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이 장차 이 아이가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하게 될 것이라고 축하한 것입니다.

또 4:17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그 아이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니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다윗의 조부가 됩니다. 그 사실을 좀더 자세하게 보려면 마태복음 1장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았고 르호보암은 ..여호사밧 .. 웃시야 .. 스룹바벨 .. 엘르아살을 낳았고 엘르아살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요셉을 낳았고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더라”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역사를 보는 눈이 좀 열렸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긴 역사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현재는 실패한 것 처럼 보여집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반드시 성공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우상동네인 고향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냥 떠나라하면 안 떠나니까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면 많은 자손과 넓은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땅과 자손이면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일생 땅이나 자손은커녕 평생 황무지와 벌판에서 그것도 남의 땅에서 살았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은 현재로 보면 그 인생이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실패했습니까. 그 약속이 500년 후에 약속 그대로 광야에 나타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 널려있는 모습은 분명 약속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처음에는 실패 같으나 나중에는 성공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미는 누구입니까. 여기 나오미는 누구를 상징화 한 것입니까.  나오미는 곧 나 자신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 옛날 나오미에게 함께 하셔서 그의 앞길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위해서 섭리하시고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그 멀리 계신 것 같이 느껴지던 그 하나님은 지금 내 곁에 가까이 계시면서 나오미에게 하시듯이 내게 섭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나오미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주시는 뜻이고 교훈입니다. 이 같은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립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