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0
신령한 성도로 성장하려면 (벧전 2:1-5)
오직 예수!
이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성도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어느날 폴리카르푸스의 젊은 제자가 겨자나무에 기대어 슬픔에 젖어 있었습니다. 선생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는가?”
“하나님 나라 확장 속도가 너무나 느립니다. 모처럼 신앙생활 시작하는 자가 있다 싶으면 다시 신앙을 버리는 자도 많습니다. 이래서야 도대체 언제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슬퍼집니다.“
선생은 제자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근심하지 말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자네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와 같다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성장하여 구름을 찌를 정도의 거목이 된다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망을 크게 갖고 날마다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좋겠네.”
우리 예수님은 성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이 겨자씨와 같다고 하신 것이나, 가루 서말 속에 섞어 넣은 누룩과 같다고 하신 것 등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왕성한 사역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서는 주로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 나라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교회 일군들은 영적인 면에서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잘 알아야 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앞의 1장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나서, 여기서는 새로이 태어난 생명이 끊임없이 자라나는 성장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랐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의 성장은 주님의 교회 성장의 토대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성도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함
2절,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 ‘갓난 아이’는 새 생명을 받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갓난 아이는 순전하고 아이에게 적합한 젖을 먹어야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영성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신령한 복음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알고 그를 믿어 거듭나게 되면, 세상에 갓 태어난 갓난 아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갓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시간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아먹는 것입니다.
엊그제 뉴욕의 딸애하고 나눈 대화에서도, 태어난 지 보름밖에 안된 손녀가 두, 세 시간 간격으로 모유를 먹는데, 먹을 때마다 똥을 싸서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고민입니다. 아이가 왕성하게 먹고 왕성하게 배설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도는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세 번씩 일손을 멈추고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식사를 거르거나 라면 같은 것으로 간단히 때우고 일하기를 거듭한다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정규적으로 말씀을 먹지 않고는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이 배고픔을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감리교의 알렌 목사는 자기 교회 교인들의 교회 생활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등록 교인 중 주일 예배에도 참석지 않는 교인이 20%, 기도하지 않는 교인이 25%, 교인 중 35%는 성경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고, 십일조 하지 않는 교인이 40%에 달했습니다.
교인 중 75%는 봉사에 관심이 없었고, 85%의 교인이 한 사람도 전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 100%가 천국 가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알렌 목사는 성도들에게서 영적 성장을 위한 열정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뜨겁지를 않았습니다. 목사의 눈에 비친 교인들은 천국 문턱에 이르기도 전에 영양실조에 걸리든지 심한 기갈로 쓰러질 것 같아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것보다 육신적인 것을 더 사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의 권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갓난 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이는 엄마의 젖이 없으면 건강을 잃게 되거나 죽게 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갓난 아이가 엄마의 젖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듯이, 성도에게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죽는다’ 라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엄마의 젖 만으로 살아가는 갓난 아이의 심정으로,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다른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영혼은 먹는 말씀 하나 하나가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무럭 무럭 자라게 될 것입니다.
2.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함
4, 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여기 ‘산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도 베드로는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산 돌’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 산 돌로써 신령한 집, 곧 성전이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 돌’이라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고, 나아가 어떻게 성도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돌’(리도스)이란 단어는 공관복음서에서 무덤을 봉인하는 둥글고 커다란 돌을 가리킵니다. R. Kratz에 따르면, 그 커다란 돌은 무덤을 안전하게 봉인한 것과 부활의 날 무덤 문이 개봉된 것과 관계되며, 마침내 무덤과 죽음에서 구출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산 돌’이라는 용어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 역시 ‘산 돌’ 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이미 죄로 인해 죽었던 자들이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 생명을 얻었으며, 장차 부활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그 상태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신령한 집’은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원문에서 ‘산 돌’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신령한 집’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여러 성도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여러 성도들이 하나의 신령한 집, 곧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을 드리기 전에는 결코 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성전(=교회)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개념은 여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3:16, 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엡 2: 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없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을 만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표현한 ‘산 돌’은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우리를 표현한 ‘산 돌’은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홀로 그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성도 서로 서로가 연합하여 ‘우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집은 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 연합할 때, 교회도 성장하고 성도 개개인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답답한 생각을 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했다든지, 큰 일을 했다든지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지체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합함이 없다면 신령한 집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분량을 따라 최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집은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이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공동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예배하는 것으로 신앙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적인 신앙운명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성도의 삶은 결코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 사람과 사람이 모두 산 돌이 되어야 신령한 집, 즉 교회가 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더욱 영적인 성장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함
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본 절은 성도들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진일보하여 성전 안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주도하는 제사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이 강한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명적인 개념의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 모두가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 즉 예배의 전담자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듯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거룩한 제사, 곧 예배를 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회피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인 예배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 성장은 교회 공동체의 신령한 예배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제사장 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제사장이 제사를 위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예배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 많은 경우 모자란 자들인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왜 조용히 해야 하지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셨는데요, 사람이 잘 땐 조용히 하는 거래요.”
여러분, 우리 가정의 가장 귀한 사역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중(週中)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온 성도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일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도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전체로 모이고, 소그룹으로 모이는 모든 집회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과거 유대인들은 제사장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도 절기를 지켜 행하고 금식하며 율법을 지키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유대인들보다 열정이 적은 것 같습니다.
새 생명을 받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보혜사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 율법에 매여 살던 자들보다 나태한 것 같습니다.
이래서는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워드 장군은 신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서부 해안 지대로 파견 나가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수요일 저녁에 그의 영예를 축하하는 환영 만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초대장을 보냈고 미국 대통령까지 축하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제일 마지막에 그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준비를 완벽히 끝내고 난 후 그들은 장군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하워드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수요일 저녁에 다른 약속을 이미 해두었네."
"하지만 이 사람아, 이 날은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석할 텐데... 선약을 취소하면 안되겠나?"
장군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네. 나는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수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꼭 주님을 만나 뵙겠다고 주님과 약속했다네. 어떤 것도 이 중요한 약속을 깨뜨릴 수 없다네."
장군의 친구들은 이 만찬회를 하루 연기하여 목요일 밤에 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약속을 먼저 생각한 장군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의 얼굴이었다고 친구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령한 성도로 끊임없이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신령한 성도들이 이루는 교회 공동체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신의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는 지체의 사역에 충성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나온 성도들로 붐비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은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헌신하는 신령한 성도들 가운데서 뽑혀지는 일꾼들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예배 전담자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서현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