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시련의 때에 (벧전4:12-14)
폭우 폭염 증권 하락등 여러 가지 시련이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어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종종 박해를 당하고 시련을 당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약점을 찾아내어 비판하고 심지어 물질이나 이권 등을 가지고 제약을 가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교회 전체에 임할 심한 박해를 말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로마 황제들, 곧 '네로'나 '도미티안'의 교회에 대한 대박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히 이 고난을 '불시험'이라고 함니다. 이러한 시련의 때를 지나는 비결을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시련당함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은 환난의 많은 시련(고후 8:2)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이 시련이나 환난당하는 것을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고난이 자신들을 피해 가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의로 인해 다 핍박을 받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마 5:11)가 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행 14:22)합니다.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그 박해는 양자간의 생활양식의 차이 때문에 파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거짓과 교만, 또는 쾌락과 육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자신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했지만 하나님께 응답 받은 것은 아벨뿐이었고 가인의 그것이 분해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로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2).
바리새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사탄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오랜 기간 싸움이 있으리라 말씀하셨고(창 3:15) 그 후로 사탄과 그의 백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 도전했습니다.
사탄이 치리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요 14:30). 따라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는 사탄을 격동케 하며 박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박해받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박해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인은 항상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당할 때 이상히 여기거나 하나님에게 매 맞으며 고난당한다(사 53:4)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고난은 나의 유익을 위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시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으나 고난이 찾아올 때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고난을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고난이 임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해야하나 더욱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보혜사 되신 성령께서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독일 전역이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때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핍박받는 신자들의 가정을 찾아 다니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전역에 흑사병이 나돌아 1천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일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목사 부부는 어느 날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신자의 가정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목사 부부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교회와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은 서로 껴안은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울면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온몸과 영혼을 다주께 드리니/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이 사람의 이름은 벤자민 슈몰크목사입니다. 그때 올린 기도에 곡이 붙여진 것이 바로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라(딤후 4:5)고 권면했습니다.
시인은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19, 20)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합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던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취급받는다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빌 1:29). 이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신뢰할 만한 경지에 이를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더욱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일을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정해 주심으로 여기고 즐거워했습니다(행 5:41).
다니엘의 세 친구가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7)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믿는 자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8)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리에 함께 하도록 이 말씀을 주신 줄 믿습니다. 이 말슴 믿고 나아갈 때 풀무불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은 고난이 없는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현재에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얻게 되는 영광의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시련의 원리에 적용됩니다(요 16:20-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수치를 영광과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고난 또한 영광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불행해 보이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종일 방직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큰오빠는 잔칫집에서 얻어온 상한 음식을 먹고 숨졌고 둘째오빠는 굶주린 가족을 위해 피와 쌀을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희망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역경을 극복하면 반드시 희망의 날이 올 것이다.” 소녀는 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웠습니다. 그녀는 국내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오스트리아로 유학, 빈의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교 교수로 금의환향했습니다. 바로 창원대 이점자 교수라 합니다. 그녀는 고난과 시련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며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더욱 아름답습니다(벧전 2:19, 2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시련이 복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나 인생이 고난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욥기에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를 통하여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욥 5:6, 7)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난을 받습니다. 더더욱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시 34:19). 그러나 성경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고 말씀함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이야기라 합니다. 한 광고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여 광고 카피를 맡겼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소질만 발견된다면 채용해서 교육을 시킨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한 학생이 작성한 광고 문안이 기존 카피라이터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사장은 당장 정식 채용하겠다고 했습니다. 보수도 후히 주었습니다. 계속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지켜봅니다. 그러나 사장은 곧 실망합니다. 재질이 특출한 것으로 인정했던 그가 회사에 정식 채용되자 그토록 독창적이던 카피가 나와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때문에 사장은 그때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학생의 생활환경을 세심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 찌그러져 가는 판자 집에서 부양해야 되는 가족도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회사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이를 안 사장의 뇌리에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사장은 "여보게, 자네는 오늘부터 예전처럼 아르바이트로 우리 일을 해주게. 좋은 카피는 언제나 받아들이지." 결국 다시 아르바이트로서 광고 문안을 작성합니다. 생활은 예전처럼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다시 전과 같은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 결과 일본 상업계에 손꼽히는 카피라이터로 성공합니다. 시련이 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련을 받으면 복이 있음은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이 임하여 시련을 이기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에서 우승한 미국의 로라 윌킨슨이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하자 코치는 윌킨슨을 향해 올림픽 출전불가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에 수십번씩 한 성경구절을 묵상하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픽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윌킨슨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성구는 빌립보서 4장 13절이었습니다.“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희망적인 성구 하나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운동선수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박해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격려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평범한 소년이 네덜란드의 유트레이트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소년의 학교성적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졸업을 앞두고 불미스러운 사고까지 저질러 퇴학을 당했습니다. 소년은 네덜란드나 독일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스위스의 취리히공과대학에 입학, 졸업했습니다. 청년은 `고등학교 중퇴'라는 불행한 과거로 인해 취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한가한 시간을 학문연구에 투자했습니다. 고통스런 과거를 분발의 계기로 삼아 무섭게 연구했습니다.`무직의 시간'을 `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한 그의 연구업적은 곧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마흔 여덟살에 불츠불크 대학교 총장에 임명됐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빌헬름 뢴트겐. X_레이를 발명한 세계적인 과학자 입니다. 그에게 `퇴학'이라는 고통은 성공의 자극제였습니다. (성공은 시련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따라오게 하셨습니다(벧전 2:21, 2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통해 영광의 보좌에 앉게 하십니다.
어떤 트럭 운전기사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깊은 산길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산길은 매우 험하고 꼬불꼬불했습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천천히 산기슭의 가파른 길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극히 좁은 길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밑은 천길 낭떠러지였습니다.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됐습니다. 순간 그의 눈앞에 큼지막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당신도 이 길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이곳을 안전하게 통과해 갔습니다” 그는 그 말에 안도감을 얻고서 다시 침착하게 운전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좁은 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을 때도 언제나 넓고 평탄한 길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가파른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고 지극히 위태롭고 좁은 길목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보다 앞서서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시련을 이미 감당해 왔음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함께 히시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나가면 우리도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붙잡힌 동포들을 바라보며 시련과 고난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 있으나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련을 받으면 복이라고 믿고 나갈 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이 영이 함께 하시어 이겨 낼수 있도록 역사할 줄 믿고 시련의 때를 이겨 내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