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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신앙 (창12:1-4)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구약시대에 살았던 신앙의 위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홍수 심판때 유일하게 살아 남은 노아가 나와 있고, 죽지 않고 들림 받은 에녹이 소개되어 있고, 통일왕국을 이룩한 다윗이 나와 있고,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 기구한 운명 속에서 인생을 살아 간 야곱 등 쟁쟁한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를 살아간 신앙의 위인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서 사람들은 흔히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보기 드물게 깊은 신앙심을 지닌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잘 살고 못살고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역사성입니다. 이를테면 신앙의 역사가 3대, 4대씩 이어져 내려오는 신앙의 전통을 이어 받는 일 입니다. 내 아버지가 장로였고, 내 조부께서도 장로였고, 내 증조부께서는 순교자였다고 한번 가정을 해 보십시요.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유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기간 내에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의 복을 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면에서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빛나는 신앙의 선조였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신앙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마침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요소 입니다. 이를테면 아브람함의 신앙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깊은 신앙인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앞으로 한달 동안 4,5회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요소는 "꿈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꿈이 있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는 신앙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하되 이 환상적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깊어질 수 있고, 보다 예민한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마치 개척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의지가 있어야 하듯이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신앙인만이 가질 수 있는 보다 높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하게 되고, 영적인 세계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또 그곳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얀 백말을 타고 눈 덮인 알프스 산정을 돌려다 보고 있는 나폴레옹의 그 기고만장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넘어보지 못한 눈 덮인 알프스 산, 나폴레옹은 그 눈 덮인 산꼭대기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 속에는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저 산을 넘어 보지 못했지만 나는 언젠가는 저 눈 덮인 산을 넘으리라" 하는 메시지입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태도입니까. 이런 사람이라야 창조를 하고, 개척을 하고, 꿈을 이루고, 미래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보이는 세계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육신적인 것에만 몰두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저 산 너머에 대한 관심이 있겠습니까. 없으니까 평생을 산 아래만을 쳐다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습니다.
보십시요. 컬럼버스가 미지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배를 타고 무작정 탐험의 길을 떠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 따위는 무섭지 않습니다.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배가 뒤집히면 어떻게 하나, 가다가 해적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염려가 앞서면 그 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컬럼버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도전과 미래를 정복하려는 환상이 그런 염려들을 모두 능가하고 뒤덮어 주었습니다.
한번은 선원을 모집해서 배를 타고 함께 탐험의 길을 떠납니다. 그때 컬럼버스는 뱃머리에 우뚝 서서 망원경을 들고 먼바다의 지평선을 응시하면서 새 세계를 발견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를 젓는 사람들도 새 세계를 발견해 내는 일에 동참을 한다는 마음으로 힘있게 노를 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이 항해를 마치고 집에 가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그것이 근심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생각 끝에 돌아가면 구둣방을 해서 먹고살자 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밝아 졌습니다. 그러다 조금 후에 또 다시 근심이 서려 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누가 먼저 구둣방을 차리면 어떻게 하나 그것이 근심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남들은 지금 새 세계를 발견한다는 희망과 꿈과 환상에 사로 잡혀서 힘있게 노를 젓고 있는데 이 사람은 구세계를 잊지 못하고 거기서 탈출하지 못해서 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후에 컬럼버스의 일기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기록되기를 "그날 새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 동참했던 선원들 가운데서 이 사람의 이름은 빼라"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새세계를 발견할 만한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딘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의 눈에는 저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미래고, 환상이고 없습니다. 이렇게 감각이 무딘 사람은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줘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 줘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곁에다가 오셔도 느끼지를 못 합니다. 감각이 무뎌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깊이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구태의연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잠이 많은 사람을 보십시요. 누가 나갔다 들어 왔다 해도 모르고 잠을 잡니다. 무뎌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메시지가 들려온다 하면 알아듣겠습니까. 그렇지만 좀 예민한 사람을 보십시요. 잠을 자다가도 무슨 소리만 나면 벌떡 일어납니다. 곁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잠을 깹니다. 감각이 예민해서 그렇습니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잤어도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났지만 엘리 선지자는 무뎌져서 알아듣지를 못 했습니다. 그것이 그 한번으로 끝이라면 괜찮은데 그것이 모든 생활로 연결이 되어서 엘리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영감에 무뎌져서 끝내는 졸다가 넘어져서 고개가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특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어도 젊은이처럼 언제나 저 산 너머에 관심을 갖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감각이 아주 예민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고향 땅에서 살고는 있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현실을 탈출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제 3의 영역에 눈을 뜨고, 마음을 두고, 그곳에 뜻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꿈과 환상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는 말 한마디에 미련 없이 우상의 도시인 고향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 입니다. 다 늙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거나 내일에 대해서 염려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소중히 간직한 채 유유히 길을 떠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같은 환상과 꿈이 있으니까 나이를 극복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가 현실적인 사람 같았어 보십시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그런 약속을 주지도 않으셨겠지만
행여 주어진다 해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먼저 이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합니다. 저 영적인 세계에 눈을 돌리고, 그곳에 마음을 두고, 그곳에 뜻을 두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신앙인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지나치게 현실위주로 아래만을 보고 살아가게 되면 이런 환상적인 안목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가도 이런 환상에 사로잡히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안목에는 오직 현실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위도 보이질 않고, 옆도 보이질 않고, 오직 내 집과 나만 보일 뿐입니다. 저 높은 곳을 보고 싶어도 그 곳을 올려다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다, 재림이다, 천국이다 하는 이야기는 이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버스 안에서 청년 두 사람이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은 천국이 있다고 우겼고 또 한 청년은 천국 따위는 있지도 않다고 우깁니다. 한 사람은 천국은 분명히 있다고 주장했고, 또 한 청년은 이 세상 천지에 천국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침 그 옆에 목사님 한 분이 서서 그 두 청년의 논쟁을 듣고 있습니다. 들어보니까 그 논쟁은 끝이 없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천국 따위는 절대로 없다고 우기는 청년에게 한 마디를 했습니다. "자네 이 다음에 지옥 가게", 그랬더니 이 청년이 화를 내면서 왜 나를 보고 지옥 가라고 하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이 없다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지 않느냐고 하니까 아무 소리 못하더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바라보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그것이 실상으로 나타날텐데 바라보는 어떤 환상도 없고, 꿈도 없다면 그에게 어떤 실상이 나타날 것입니까.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이 환상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면에서 아주 짙은 환상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경외서를 보면 아브라함의 고향 갈 대아 우르라는 곳은 우상도시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고 하지 인했어도 아브라함은 도시가 너무 혼탁해서 떠나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데 그 약속이 환상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는 고향을 떠나라, 그러면 내가 네 자손을 땅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 그러십니다.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환상의 눈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에게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황량한 들판에 널려 있는 돌덩어리들도 그냥 예사롭게 보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주석자의 표현으로는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쳐다보면서 언젠가 저렇게 많은 자손들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쳐다보는 그 눈길이 얼마나 소망 적이었겠습니까.
또 낮이면 뙤약볕이고 물기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지만 그런 곳에서 살면서도 어찌 그가 피곤했겠습니까. 저 넓은 들판에 널려 있는 돌멩이들이 그냥 예사롭게 보였겠습니까. 혹시 길을 가다가 돌에 채어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아마 신이 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을 걸리게 한 그 돌멩이도 장차 생겨날 자손의 머리통 같이 보였을 것이니 어디서 불평이 나올 것입니까. 이같은 환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슨 불만이 있고 불평이 있고 살아가기가 고달프다고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꿈을 가지라는 것이고 환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같은 환상도 지니고 꿈도 지닌 깊은 영감의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실에 고정된 눈이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눈으로 바뀌고, 오늘 현실에 부딪치는 일에만 골몰하지 말고, 내일 우리에게 주어질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꿈꾸는 생활입니다. 부활, 천국, 십자가, 심판, 재림, 모두가 꿈입니다. 불신자들이 들을 때는 이것들은 모두 꿈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그러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보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찌 부활이 이해될 것이며, 천국이 믿어질 것이며, 재림이 믿어지고, 어찌 그런 눈에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보일 것입니까.
로마 교황이 일본을 방문해서 대학생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 일본 대학생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오늘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그 철없는 말을 듣고나서 교황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육신의 배만 부르다고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또 다른 양식 즉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한 사람은 하늘의 양식을 말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육신의 양식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신앙의 세계를 알 것입니까, 아니면 영적인 세계를 알 것입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된 것은 이같은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 나이에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마침내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환상이 있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깊은 영감을 지닌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신선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살며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