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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힌 신앙 (누가복음 9:28-36)
흑인 민권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의 영이 당신의 삶 속에 파고 들게 하십시오. 삶의 난관과 도전에 답하기 위해 당신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이라는 배’가 마지막 항구에 도달하기 까지는 거센 폭우와 무서운 바람, 그리고 심장을 멎게 하는 포악한 파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깊고 강건한 신앙이 없다면 불가피하게 몰아닥칠 절망과 패배에 대해 당신은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결정적인 장면이 빠져버린 드라마처럼 당신의 인생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긴장이 가득한 골짜기를 벗어나 내면의 평화가 깃들어 있는 정상으로 날아 오를 수 있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밤 한가운데서도 반짝이는 희망의 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당신 안에서 평안을 발견하기까지 결코 잠잠할 수 없나이다”
이렇게 예수를 발견한 사람들은 예수가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증거합니다. 저도 어려서 예수를 만났는데, 그 이후의 삶을 돌이켜 보면, 예수 없는 저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살아온 인생은 너무 아름답고 고마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를 빼면 남는 것이 있습니까? 예수가 우리 삶의 일부입니까? 전부입니까? 예수를 ‘내 삶의 이유’요, ‘전부’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1. 우리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 곧 구원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장차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고난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8일이 지나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는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학자들은 아무런 언급도 없는 이 8일 동안을 ‘침묵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한참 들떠있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으니, 아마도 8일 동안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아무 말 없이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참 기도를 하시던 예수께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그 신비한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이 놀라 어쩔 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훌륭한 스승이요 선지자라고 알기는 했지만 이런 체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깜짝 놀랄 정도의 권위 있는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비롯한 숱한 기적도 보면서 예수의 위대함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변화산에서의 경험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30절에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두 사람 이야기가 동일한 어구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각각 한번씩 나옵니다. 예수의 부활한 빈무덤을 보도하는 누가복음 24:4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예수의 승천을 기록하는 사도행전 1:10에도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라는 동일한 어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며 예언자였던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된 사람들이었는데,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실 때 그 곁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제일 위대한 인물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영광 곁에 서 있었다는 것은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무디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뉴욕에서의 어느 날 - 아, 그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입 밖에 내기조차도 조심스럽다.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며, 나는 단지 하나님이 그의 자태를 나에게 드러내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전도를 계속했다. 설교는 전과 거의 같았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진리를 표현한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 나는 결코 축복의 체험 이전의 나날들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저는 교회에 처음 가자마자 예수는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구세주요, 나의 생명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체험이 저의 일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에 대해 많이 듣기보다는 예수를 직접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베푸신 기적을 보며 대단하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그 말씀과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v시간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재빨리 나서서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 28:33)
제자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섬기겠다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큰 실수를 했습니다. 어찌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같은 수준으로 말할 수가 있으며, 산 아래의 세상과 역사는 어떻게 하고 그 신비한 세계 속에만 머물겠다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 한 것도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였는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여기에 눌러 살자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할 때 마침 구름이 산을 뒤덮었습니다. 구름에 파묻혀 앞뒤 분간을 못하게 되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고난 때문에 그동안 근심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 영광스러운 산 위에 초막을 짓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산 아래 내려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체험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눅 9:2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한 말을 존중해주는 사람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 같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주님도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어떤 백부장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병들어 죽게 된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 장교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으로 유대인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조차도 이방인인 그 백부장을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점령군 장교였지만,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 앞에 감히 나오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유대인 가운데 존경받는 장로들을 보내어,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친구들을 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6-8)
이 백부장은 점령군 장교로서 거들먹거릴 수도 있는데, 유대인들을 선대하고 회당까지 지어 주었고, 예수님께도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도다”(눅 7:9)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그대로 믿는 신앙, 이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 제자들도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훌륭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세상을 치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곤란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러운 귀신이 들린 아들을 고치기 위해 산 아래 남아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찾아왔는데,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 산을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눅 9:38-40)
산에서 방금 내려오신 예수님은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라”고 하시고는 그 소년 속에 있는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산 위에 초막을 짓고 머물러 있었다면 그 아이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야 베드로와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는 낮고 낮은 곳까지 내려가셔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러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별세하는 낮은 자리에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상은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린 소년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부분에서 제 정신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장래는 결코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로지 당리당략과 집권에만 혈안이 되어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언행을 일삼고 있습니다.
정치가 그 모양이니 경제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생경제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익 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도처에 부정과 부패가 아직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실상이 이러니, 사회에서 진실과 정직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온통 거짓과 허위가 판을 칩니다. 윤리와 도덕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기초인 가정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흔들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산 아래의 있는 국민들의 삶은 이처럼 도저히 소생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나라를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 지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처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난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놀라운 체험을 간직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갔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체험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과 함께 동행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처럼,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 이 자리가 여러분의 ‘변화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에 나와 무릎을 꿇고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체험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주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치유해 나가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