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
종교와 신앙 (민 22:1-14)
오늘날 신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애처럼 조그만 일에도 두려워하고 가슴 조마조마하며 살아가는 것이 요즘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신들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인간의 두려움을 감싸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인간의 공포심에서부터 등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과학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는 해나 달이 가려지는 일식이나 월식이 있는 날이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는 해가 가려져서 대낮에 컴컴해지고 달이 자취를 감추는 것들이 아주 큰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천둥이나 번개가 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거나 유성이 떨어지면 나라에 큰 일이 생길 것으로 여긴다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과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그러한 두려움들을 다 벗어버리고 살고 있습니까? 사실 과학이 첨단을 걷고 있는 요즘에도 인간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식이나 월식을 보고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식, 월식이 왜 일어나는지 과학적으로 잘 배웠기 때문입니다. 천둥 번개 친다고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벼락맞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천둥 번개도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천둥 번개가 칠 때 자신의 죄 때문에 벼락을 맞을까 두려워하면서 벌벌 떤다면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유성이 떨어져도 하나의 천체의 현상으로 보지 그것 때문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모든 자연의 현상들과 천체의 현상들이 과학에 의해서 그 모습을 다 드러냈다고 해서 인간이 두려움을 벗어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두려움은 과학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나라의 대덕연구단지라고 하면 최첨단의 과학단지입니다. 거기에는 과학의 박사들만 모여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신과 과학은 전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덕연구단지를 준공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최첨단의 과학기지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고사를 지냅니까? 자기들의 연구단지가 잘못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것 아닙니까? 즉 그들 속에는 자기들의 꿈이요 소망인 연구단지가 행여 잘못될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두려움입니다.
또 아무리 물리학 박사, 전기공학 박사라고 할지라도 4라는 숫자는 왠지 기피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미국은 13일의 금요일을 그토록 싫어한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재앙이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입니다. 결국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우주의 신비가 벗겨지고 자연의 실체를 알아간다고 해도 인간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천둥 번개가 칠 때 그 두려움이 나타나고,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면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그런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고 할지라도 뭔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궁합을 미리 보는 것도 결혼 후의 잘못된 부부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결혼식 날짜를 가리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습니까? 장래 일을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당을 건축할 때 무엇을 합니까? 고사는 지내지 않지만 기공예배라는 것을 드립니다. 기공예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배당 짓는 것이 순조롭도록 도와주시고 완공될 때까지 사고없이 잘 끝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 아닙니까? 돼지머리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은 고사 지내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배당 지으면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을 기공예배라는 것을 통해서 달래는 것입니다. 물론 말이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모두가 하나님이 잘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예측 불허의 앞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덕단지의 과학자들 가운데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 그들이 과연 누구를 향해서 고사를 지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평소에는 신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다가도 두려움이 발생하면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물론 기독교, 불교, 이렇게 종교의 이름은 없고 신의 이름도 없다고 할지라도 막연하게나마 신을 찾아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종교심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종교심은 두려움 속에서 더욱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언제나 신과 더불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이 발생할 때 신에게로 숨고자 합니다. 그런데 신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에게로 숨는 것입니다. 신을 움직일 수 있고 신과 대화할 수 있고 신을 기분 좋게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숨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무당입니다. 무당은 신과 대화하며 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당에 의해서 복과 저주가 조절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무당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당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당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습니다.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니기 때문에 나름대로 무당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고사를 지내는 것, 궁합을 보는 것, 결혼 날짜 이사 날짜를 따지는 모든 것이 무당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무당의 자리에 다른 것을 대체해 놓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에게 '당신 무당을 믿는가?'라고 하면 백이면 백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당은 미신이라고 하면서도 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사는 미신이 아니고 그냥 풍습이고 문화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 불안감을 고사라는 것을 통해서 해소해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무당을 믿지 않습니다. 무당은 미신이라고 펄쩍뜁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 옛날 무당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옛날 사람들은 무당은 신의 비위를 맞추고 신의 복과 저주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두려움을 무당을 통해서 보호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치 어린애들이 무서울 때 엄마 치마폭으로 숨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는 두려움에 살아가는 신자라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로 숨어들고 있습니까? 목사에게로 숨어드는 것입니다. 목사를 통해서 보호받고자 합니다. 목사는 신의 비위를 맞추고 신의 복과 저주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철저하게 목사에 의해서 자신을 보호받고자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주제가 종교와 신앙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철저하게 분리됩니다. 종교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신앙이어야 만이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신앙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은 오히려 배척을 해버립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가운데 발람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21:21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아모리 땅을 지나갈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모리 땅에는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왕 시혼은 도리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아모리를 쳐서 그 땅을 점령하고 바산 땅까지 점령합니다. 그것을 본 모압왕 발락에게 두려움이 생길 것은 당연합니다. 그 두려움에 대한 발락의 행동은 점술가인 발람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부탁합니다.
6절에 보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합니다. 발락은 저쪽을 저주해 버리면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으로 저쪽의 신을 저주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의 심성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이러한 종교를 가지고 기독교가 신앙이라고 우기는 데서부터 교회는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입니까? 신앙입니까? 종교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엇하나 의지해서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자하는 그런 심성으로 교회를 나오고 하나님 찾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내 이익 말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하나님을 잘 의지해서 하나님 덕분으로 자신의 일이 잘 해결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입니다. 종교와 신앙의 차이는 한마디로 종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신앙은 하나님에게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 때는 종교가 아닌 신앙을 가진 자만 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쫓겨날 자는 종교를 가진 자이고 남을 자는 신앙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마지막때 남을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의해서 쫓겨난 아모리나 바산도 종교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이 밀려들어올 때 인간의 종교는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발락의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통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발락은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이 주어지고 저주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목사를 향한 시각과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사가 축복하면 복이 주어지고 저주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설령 그렇게 알고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목사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종교에 빠진 많은 신자들이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목사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를 무당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은 신자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입니다. 발락이 자신의 두려움을 의지하고 맡기기 위해서 복술의 예물, 즉 복채를 가지고 발람에게 나오는 것 같이 신자들이 목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급급해하고 행여 목사에게 잘못보일까봐 전전긍긍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한국교회안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왔습니까? 목사를 눈치를 보려고 나왔습니까? 목사를 섬기려고 나왔습니까? 교회에서 봉사하려고 나왔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신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곳에 내가 도구로 쓰여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발락은 복을 육신에 이익이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반면에 저주는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복은 확장되는 것이며 저주는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개념에 빠져 있다보니까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면서 복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복을 말하면 그 반응은 진짜 복을 쫓아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참된 복을 저주의 모습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자신들이 상상하는 저주의 모습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이기 때문에 도저히 복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복을 받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자의 특징이 뭐냐면 복을 받은 자가 들어올 때 복을 받지 아니한 자, 즉 종교인들은 다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락이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기존의 것이 쫓겨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복을 받은 자들이 자기에게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신앙적으로 자꾸 타락해져 가는 이유도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기존의 것은 그냥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복으로 다가오는 것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종교성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복을 밀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어지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새로운 복을 거부하는 종교성은 결국 그리스도까지 거부합니다. 주님이 나타나는 순간 내가 땀흘려서 모아놓았고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재산, 명예, 내 이름 등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인간의 무지가 두려움을 낳습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은 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서 소멸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을 찾고 의지하고 목사를 의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복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모릅니다. 복에 대한 무지가 종교를 낳고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참된 복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희생을 아는 것입니다. 희생을 아는 상태가 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희생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복을 받은 자는 필연코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죄가 곧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은 약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고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가지 잘한 것을 가지고 열가지 잘못한 것을 가리워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그 무화과 나뭇잎이 지금으로 말하면 도덕일 수 있고, 윤리일 수 있고, 종교열성일 수 있고, 착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다른 무엇으로 적당히 가리고서는 깨끗한 척 양심 바른척하고 대중들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순순히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를 싫어하겠습니까?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감추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죄를 감추었던 사람들은 뭔가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얘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싫어하고 마음 불편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얘기 말고 좀 긍정적인 얘기를 해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사는 그 요청에 따라서 사람들 마음을 부담없이 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점술가인 발람이 8절에서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는 그러한 수준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신 대로 말해주겠다는 수준도 되지 못하고 말을 해봐야 그 말은 결국 뇌물을 먹은 아부꾼의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잘못된 복의 이해에서 나옵니다.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약자가 되기를 싫어하고 수치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데서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종교화된 기독교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냐? 신앙이냐?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라지고 신앙만 남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신앙은 참된 복을 받은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발락이 발람을 찾는 식으로 하나님을 찾지 말고 목사도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뭘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받은 자라고 합니다.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깊이깊이 인정하면서 나보다는 희생하신 분을 더욱 앞세우고 그분만 높이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신자가 진정한 신앙인이며 이렇게 기존의 자신의 모든 것을 쫓아낸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같이 두려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죽으면 천당 가니까 좋다라고 살아가는 사람을 무엇으로 위협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