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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온전히 바친다(잠3:9-10 ) (잠3:9-10)
이사야 43장 7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사람된 본래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시편 19편 1절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전 피조물의 피조적 본연(本然)이 하나님의 영광선포를 위한 수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전 피조세계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영예로운 본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전 12:13).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영감의 성경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잠 3:9-10). 우리가 받은 모든 물질 소득의 십분의 일을 성별시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백적 표시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물질 헌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시적 표식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십일조 교훈에 대한 두 번째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실제론적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Ⅰ. 십일조의 여러 유형
1. 반대 유형
①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요 구원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적 규례는 없어져야 하고,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롬 6:14). ② 재물의 소유주는 인간 자신이라는 주장입니다. ③ 또한 나의 수입이 너무 적다는 이유입니다. ④ 반대로 나의 십일조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드릴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⑤ 자기 십일조에 대한 산출근거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⑥ 교회가 헌금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⑦ 십일조는 구원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그것을 율법화 할 수는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혀 성경 교훈과 모순되는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2. 마지못해서 드리는 유형
① 마지못해서 억지로, 의무감으로 내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즐겨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엡 6:6-7, 고후 8:7). ② 하나님의 응징(벌)이 두려워서 내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신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③ 자기 기분대로 내는 십일조 유형입니다. 형편 따라 적당하게 사전에 준비 없이 내는 십일조입니다. 자기가 급한 대로 우선적으로 다 쓰고, 여유가 있거나 나머지 부분을 십일조라는 이름을 붙여서 냅니다. 그러나 십일조 헌금은 최우선의 제물이 되어야 하고(마 6:33),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함이 되어야 합니다(잠 3:9). ④ 공명주의나 체면, 눈치껏 내는 십일조입니다. 자기의 교회 직분상, 또 타인과 비교해가면서 이른바 체면세우기식(?)의 십일조입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십일조입니다.
3. 기복적 십일조의 유형
이는 일종의 상리적 축복관념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뇌물(?)을 드리는 심정이나 십일조를 축복받는 공로처럼 여기는 유형입니다. 결코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상거래 행위나 기복적 공로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4.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목적으로 드리는 유형
물론 십일조 헌금이 교회 재정운영에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존속시키고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주님 자신이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이유로 십일조를 내는 자는 자신이 교회의 주인역(主人役)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드리는 십일조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의 지고하신 명령에 감심으로 순종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영광의 수단으로 드린다는 사상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사상입니다(고전 10:31).
이런 의미에서 아드리안 로저스(A. Rogers)는, “십일조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통로이다. 왜냐하면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윌리엄 C. 번즈(W. C. Burns)가 중국선교를 위하여 떠날 때 누군가 그를 비꼬듯이 “중국인 모두를 개종시킬 모양이죠?”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단호히 대답하기를 “아니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중국으로 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립니까?”라고 한다면 “아니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립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예배행위의 종목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Ⅱ.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 문답
1. 십일조가 연보의 전부인가?
아닙니다. 십일조는 모든 연보의 기본입니다. 성경에는 그 외에도 여러 류의 감사행위가 많습니다.
2. 십일조 계산은 총수입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순이득에서 할 것인가?
성경은 소득의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눅 18:12). 또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 모든 경우의 소득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3. 십일조의 액수가 너무 적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나, 또 너무 많아서 고액일 경우에는 어찌하는가?
양자 다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적거나 많거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십일조를 드려야 할 창고가 교회뿐인가?
그렇습니다. 교회뿐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말 3:10). 그렇다면 ‘나의 집’, ‘나의 창고’가 비단 교회만을 가리킴인가? ① 신학교나 기타 자선사업단체나 선교기관, 농촌 모(母)교회에 자기 십일조를 나누어 보낼 수 있지 않은가? ② 심지어 십일조 중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특정한 교역자나, 자기가 벌여놓은 복음사업을 위해서, 아니면 교회 각종 기관에 월정회비나 교역자들 접대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종류는 십일조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공금(公金)입니다. 그러므로 소유권이나 사용권도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몸된 기관인 교회에 바쳐야 하고, 교회는 공적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경우 대부분은 공명심이나 이기심, 기복적인 마음에서 십일조를 자기 중심으로 사용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욕을 좇는 스승을 두고 따르는 위험에 빠집니다.
울트(E. C. Wolt)는 “나는 온전한 십일조 헌금을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 드림으로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타이완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고, 스위스랜드에 있는 병원의 환자를 돌보고, 동시에 하이티 섬과 인도네시아의 방언으로 신약성경을 번역하며, 베트남과 한국의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음을 기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5. 십일조는 목사의 생활비로, 다른 연보는 일반경상비로 사용함이 옳은가?
전혀 불합당한 말입니다. 신약의 목사는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일 수가 없습니다. 목사들이 교인의 십일조를 개인화 함은 일종의 탐심입니다.
6. 십일조를 드릴 여유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함이 옳을까?
질문 자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성경은 의인의 자식은 걸식하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떤 차별대우나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영적인 가난이 아닌가? 십일조 생활은 내가 살아가는데 물질이 소용되는 것만큼 언제든지 따르기 마련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주께 드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7. 빚더미 속에 앉아 있을 때에도 십일조를 드림이 마땅한가?
마땅히 드려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챤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여러 경우에 부채를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빚더미 속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8. 용돈을 부모에게서 받아쓰는 어린이들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아직까지 재정적으로 생산성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사실상 적은 액수를 부모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또 그것은 이미 부모가 십일조를 드린 후에 주어지는 십분의 구 중에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소유권이나 인간의 청지기 의식, 그리고 축복의 비결을 가르치는 신앙 교육적 차원에서 어린이들에게도 십일조 생활을 교육해야 합니다.
9. 퇴직금이나 유산을 받았을 때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당연히 드려야 합니다. 종신토록 받을 퇴직금은 종신토록 주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유산은 유언에 따를 것이나, 특별한 유언이 없을 때에는 그 유산을 받아 자기 소유가 되는 재산 중에서 십일조를 구별시킴은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 영(S. Young)은 말하기를 “우리가 드리는 모든 헌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에 대한 보은 중심이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J. Wesly)는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개종작업이 일어나야 할 부분은 돈지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M. Luther)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로 변화체험을 해야만 한다. 먼저는 심령이요, 그 다음은 돈지갑이다. 신자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받는 영적 고통과 괴로움은 당연하다. 이것은 믿음 있는 신자의 건강한 괴로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합니다. 십일조는 결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받은 구원에 대한 지극한 보은행위 중에 하나입니다.
누군가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첫째, 십일조를 드림으로 자기 신앙이 더욱 확고해짐을 보고 놀랐고 둘째, 자신의 물질적 생활이 넉넉해짐을 보고 놀랐고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찌 내가 이런 돈을 낼 수 있는가 하는 사실에 놀랐고 넷째, 믿음의 담력이 더하여짐에 놀랐고 다섯째, 나머지 십의 구(10/9)도 지혜롭고 규모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놀랐고 여섯째, 이 축복을 알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고 살았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놀랐다.”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축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두 가지 가훈(家訓)을 정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나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가르치겠다는 것과, 둘째로 부자가 되어도 돈을 절대로 낭비하지 말라고 가르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경외의 고백이요 표식입니다. 미국의 죤 필립스란 사람이 200년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긴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을 골라 통계를 낸 기록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예를 보았습니다.
교회를 망치고, 주의 종을 쫓아내고, 자기마저도 교회를 떠나버렸던 일본계 미국인인 마스시꼬 가문을 조사하니 그 가정에서 거지가 306명, 강도가 63명, 살인자가 7명, 매음자가 26명, 바보가 203명, 하급관리가 73명, 그 외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의 가문을 조사했더니 대학교 총장이 13명, 교수가 108명, 목사가 203명, 부통령이 1명, 전권대사가 1명, 국회의원이 21명, 기자가 81명이나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대조가 아닙니까?
오늘 주어진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한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30배, 60배, 100배로 확대 되어가는 축복의 약속이 아닌가? 십일조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30배, 60배, 100배의 재물을 얻을 첩경이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신 8:18). - 아 멘 -
출처/석원태 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