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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슬람교에 대한 자료를 살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저들의 경전인 꾸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43:63) 그리고 꾸란에서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꾸란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추앙합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수 안에 십자가가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설명해 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헬라어 원어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르’입니다. 보다 쉬운 말로 번역해 보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 관한 말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된 말씀”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 1장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로고스 곧 말씀이 이 땅에 선포된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말씀의 핵심이요 절정이 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존하게 선포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선포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선포된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지은 자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 3:10-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롬 1:1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그대로 버려두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 3: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롬 5: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셋째,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구원 받을 길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만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살후 2:13 하반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선 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버럭 화를 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에 배타적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입증해 보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선포된 것입니다. 이해시키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엡 2: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은혜로 믿어져 구원 받게 된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가 어떤 능력을 나타낼까요?
첫째, 변화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선 우리에게 변화가 나타납니다.
고후 5: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주를 위해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위대한 부흥사 가운데 한 분으로 김익두 목사님을 손꼽습니다. 이 분은 원래 황해도 안악시장을 주름 잡던 아주 못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미국 선교사 스왈런 목사님의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받기까지 전력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찾아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더랍니다. 이 때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니야 나 지금 약 먹기 때문에 술 못 마셔”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데?” “응 신약과 구약이야”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갈 2:20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예수가 살고 내가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구나”라고 깨닫게 됐습니다. 그 후 김익두는 엉뚱하게도 김익두가 죽었다고 부고장을 발송했습니다. 깡패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김익두는 멀쩡히 살아서 문상객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깡패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고장을 돌린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예수가 주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함께 예수를 믿기로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내 중심으로 살던 사람을 주님 중심으로 살도록 변화시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승리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롬 6: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방탕한 생활을 하시던 중에 나이 40에 회심하고 돌아와서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늦게 목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워낙 술고래였었기 때문에 짓궂게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신 뒤에도 술 마시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까?” “이제 전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 졌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여전히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술 집 50미터 전방에만 가도 술 생각이 간절합니다.”
계속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선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서 우유를 사서 마십니다. 그러면 술 생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우유를 사서 마시면 배가 불러오면서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어도 계속 죄의 유혹은 따라다닙니다. 술에 대한 유혹, 음란에 대한 유혹, 방탕에 대한 유혹, 거짓과 술수에 대한 유혹... 우리 힘으로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라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 충성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고후 4:7-1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환란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주시 화산동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군산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우 기념비가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의 기념비입니다. 이분은 한국에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입니다. 1896년 군산에서 주로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후에 결혼하여 전주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서문 밖에서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선교부가 이곳에 병원을 짓고 본격적인 의료선교를 하게 됐는데 그곳이 바로 전주 예수병원입니다.
이 데이비스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전도의 열정이 강해서 전북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전도해서 한해에 1885명을 전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분은 몸을 돌보지 않고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한 이분은 어린이를 사랑해서 혼신을 다해 어린이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전주 예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린이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다가 약해진 몸이 열병에 전염이 되어 41세의 나이로 1903년 6월 20일 이 땅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기념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이분이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배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전도하고 가나한 사람들을 돌보던 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을 해도 끝까지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고 헌신하고 충성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주간을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의 능력을 덧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