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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1 ) (요한복음 3:13-16)
귀한 손님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창문을 열고 집안을 청소하고 가지런히 정리 정돈했습니다. 손님이 오실 시간이 되어서 창문을 닫고 이것 저것 준비하는데, 초대하지 않은 왕파리 세 마리가 들어와 왕왕거립니다. 왕파리가 왕왕거리면 정말 시끄럽습니다. 파리채를 찾아 파리를 잡습니다. 어떤 파리는 잘 잡히는데 왕파리 중에서도 초고속으로 날아다니는 잽싼 파리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천장에 붙어 있어서 의자를 갖고 가면 그 사이에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 버리고….
파리를 다 잡지 못했는데 시간이 되어 손님이 오셨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왕파리가 왕왕거리며 시끄럽게 다녔습니다.
여러분, 파리가 그렇게 잡히지 않았다고 계속 삽니까? 아닙니다. 그때 파리채에 맞은 파리도 죽고 파리채에 맞지 않은 그 왕파리도 죽습니다.
파리의 생명이 얼마나 됩니까? 파리는 37일이면 죽습니다. 두 달 사는 파리가 없습니다. 파리는 하루살이에 비하면 오래 살지만 한 달 7일만 살면 죽습니다. 파리채로 잡지 않고 그냥 두어도 죽습니다. 파리가 죽지 않으려고 파리채를 피해 요리조리 초고속으로 달려보아도 37일만 살면 죽습니다.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 같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전쟁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죽는 것을 보고 파리 목숨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은 평소에도 파리 목숨입니다.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모든 사람이 애쓰지만 그래도 다 죽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오래 살려고 일억 수천만 원짜리 특별 침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죽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건강 식품이다 뭐다 하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봅니다. 에어로빅도 하고, 등산도 하고, 이것 저것 운동도 하고 별것을 다 하지만 그래도 죽습니다.
참 오랜만에 창원의 몇 분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을 모시고 가서 추어탕을 대접해 드렸습니다. 추어탕과 함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고추와 된장이 나왔습니다. 저는 고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추와 된장만 있으면 밥을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그래서 고추를 된장에 찍어 맛있게 먹는데, 목사님 한 분이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지 목사님, 고추는 그렇게 드시면 안 돼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럼요. 고추는 끝을 잡고 꼭지 부분부터 드셔야 돼요. 고추는 이렇게 달려 있기 때문에 고추에 친 농약이 다 고추의 끝 부분에 내려와 모여 있대요.”라고 하시며 고추의 꼭지를 떼셨습니다.
고추 제일 끝에서부터 1cm까지는 농약이 많아서 먹으면 큰일난답니다. 고추 끝 부분을 먹으면 농약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제가 “저는 이 때까지 그것을 다 먹었는데 어떻게 하지요?”하면서 그 목사님 얼굴을 보니, 고추 끝을 드시지 않은 그 목사님이나 저나 별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나니 고추 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고 고추 하나 먹을 때도 이렇게 신경을 쓰며 애쓰고 노력하지만, 또 다이어트도 하지만, 200년을 삽니까? 300년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세월이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제 그제가 봄이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만 해도 더워서 고생했는데 벌써 가을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 14절에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는 어느 도시에 가서 일년을 살며 사업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한 달 안에 죽을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잘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회장님이 이야기하시기를, 소나타와 그랜저가 큰 차이가 나듯이, 사람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대학을 나온 같은 회사원이라도 일을 시켜 보면 어떤 사원은 그랜저처럼 일하고 어떤 사원은 소나타처럼 일한답니다. 그런데 결국엔 일을 못하는 사람도 죽고, 일을 잘 하는 사람도 죽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서울 대학에 가려고 애쓰고 하버드 대학에 가려고 애쓰지만, 그 대학에 들어가도 죽고 떨어져도 죽습니다. 결국 인간은 똑같이 누구나 흙이 됩니다.
파리가 왕왕거리지만 다 없어지듯이, 꽃이 아름답지만 다 떨어져 흙이 되듯이, 사람들도 “내가 누구네.”하고 으스대지만 결국 다 썩습니다. 영원히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죽고 나서 그냥 흙이 되어 없어지면 좋은데,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그 심판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 법정의 심판입니다.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사람을 죽여도 세상 법정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 법정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법정에서는 형을 주어 감옥에 보내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보내십니다. 감옥은 입구도 있고 출구도 있지만, 지옥은 입구뿐입니다. 지옥에는 출구가 없어서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옥에는 불이 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한증탕에 들어가셔서 누웠는데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뒤늦게 사람들이 알고 화상을 입은 그분을 병원으로 옮겼지만 생명이 위독하다고 합니다.
뜨거운 한증탕에도 오래 있지 못하는데 지옥에 어떻게 있겠습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난롯불 위에도 5분간 앉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지옥불은 난롯불보다 얼마나 더 뜨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옥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지옥에서는 죽지도 못합니다.
지금 제가 연속극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한 마디도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자살해도 됩니다.
그러나 죽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고민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최고 스승이요, 최고 지도자요, 엄청난 권력가요, 재산가입니다. 하지만 그는 늙음과 죽음, 그리고 죽음 후의 세계를 생각하니 막막하고 공허했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은 없는가?’하고 생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병자를 어떻게 말씀 한 마디로 일으키시나? 죽어서 장례식을 행하고 있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어떻게 죽은 청년이 살아나나? 나면서부터 장님 된 사람에게 손을 대시니 그 장님이 어떻게 눈을 뜨나? 예수님께서 ‘고요하라!’하시니 험한 바다가 어떻게 조용하게 되나? 예수님께서 축복기도를 하신다고 어떻게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까? 어떻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까? 이분은 사람이지만 사람보다 더 귀한 메시야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앞으로 오신다고 예언하신 메시아시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유명한 선생인 니고데모가 밤에 30대 초반의 예수님께 나아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큰 선생님이여,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인 줄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신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깊은 마음을 아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제 마음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고민을 덜어 주시기 바랍니다. 근심을 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속을 다 아십니다.
니고데모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하늘나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나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서 24절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에녹이 너무 귀여우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무덤이 없습니다.
또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엘리야도 죽게 하지 않으시고 회리바람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제게도 그런 복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휙 하고 하늘로 들림 받아 올라가면 톱 뉴스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니엘, 요셉 같은 사람들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낙원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말씀의 뜻은 에녹이나 엘리야나 아브라함이나 엘리사나 모세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 은혜로 하늘에 올라갔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성탄절에 이 세상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나셔서 사시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오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실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서야 ‘아! 그 밤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구나.’라고 깨닫고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무덤에 갇히신 예수님께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도 니고데모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민수기 21장 4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에서 홍해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데 길이 너무 험하니 불평합니다.
저도 추석 때 차가 너무 밀려 어느 터널에서 40분간 갇혀 있으니 불평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운전해 가다 보면 터널도 지나고 아스팔트도 지나고 때로는 비포장 도로도 지나가게 됩니다. 비포장 도로를 만나면 “제기랄! 미치겠네.”하며 불평한다고 길이 좋아집니까? 불평하면 자기만 열 받습니다.
따라 합시다.
“길이 좋아도 길이 나빠도 그냥 달리자.”
날씨가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좋은 날, Fine day가 좋지만, 언제나 날씨가 좋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비가 와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소낙비가 오든 가랑비가 오든 폭우가 쏟아지든 비가 와야, 물이 있어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가 와도 감사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형편대로 살아야 합니다. 2억, 3억짜리 자동차를 타다가도 사업이 부도나서 망했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전거를 타야 합니다. 사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까?
별장을 세 개 두고 살다가 사업이 망해서 월세 방에 들어가 살게 되어도 미칠 필요 없습니다. 월세 방에서 살면 됩니다.
따라 합시다.
“환경에, 분수에 맞게 살아가자.”
불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대개 결혼하고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면 후회합니다.
‘아이고, 내 눈이 나를 찔렀지. 내가 사기를 당했지.’
그러나 신비로운 것은 상대방도 ‘아이고, 내가 속았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속았어도 그냥 살면 됩니다. 속았다고 헤어지면 그것이 이혼입니다.
여러분 중에 결혼하고 나서 ‘잘 했군. 잘 했어.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정말 잘 했네.’라고 생각하셨던 분이 계십니까?
속았어도 그냥 사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자기 뼈가 마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지만 불평은 자기 뼈를 마르게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삶의 자세를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환경이 조금 어려우니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잘 되는 것도 없네. 하나님을 믿으니 험한 길만 나오네.”
그리고 매일 먹는 만나에 대해 불평합니다.
“이 거친 음식, 이 박한 음식은 이제 싫다. 지겹다.”
만나는 농사를 지어서 얻은 곡식이 아니라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떡가루처럼 뿌려 주시는 신비로운 음식입니다. 그 신비로운 것을 먹으면서도 불평하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불뱀을 보내십니다.
즐겁게 살고 감사하며 사는 집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보내시지만, 불평하고 싸우며 사는 집에는 하나님께서 뱀을 보내십니다.
뱀이 오면 놀랍니다. 놀랄 일이 옵니다.
뱀이 물면 죽습니다. 죽는 일이 옵니다.
불평하면 마귀 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불평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고 원망하니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는데, 그 뱀이 사람들을 뭅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퉁퉁 부어 죽습니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고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죽어가니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을 차립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심히 목회하시는 목사님께 교인 세 사람이 늘 함부로 말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사님께 늘 불평하고 함부로 말하던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은 철판에 깔려 죽고, 두 사람은 무서운 병으로 급사했습니다. 그 후 교회가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죽기 싫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그 교회를 세워 주신 줄로 믿습니다.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모세여, 하나님과 당신 앞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뱀을 물리쳐 주세요. 뱀이 떠나가게 해 주세요.”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모세는 급하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외쳤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놋뱀을 쳐다 보라. 바라본즉 살리라.” 할렐루야!
“여보, 어서 나와 보세요. 아들아, 어서 나와서 놋뱀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게 하셨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산대.”
그 말에 “그래요?”하며 놋뱀을 바라본 자는 신비롭게도 바라보는 순간 놋뱀으로부터 하나님의 전자파가 임해서 뱀의 독이 다 빠져나가고 해독되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독사에 물려 퉁퉁 부어 죽어가면서도 “쓸데없는 소리! 뭐? 놋으로 만든 뱀을 본다고 나아? 말도 안 돼!”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신비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가리키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은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았듯이 나도 나무에 달리는 날이 온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날이 오는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할렐루야!
오늘도 구원받는 사람은 십자가를 보면 ‘아! 저기에 십자가가 있네. 오, 주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멸망 받을 사람은 십자가를 보지도 않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해도 그 뜻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쟁이들, 교회에 십자가는 왜 그렇게 달아 놓지? 밤마다 발갛게…. 저 십자가만 없어도 좋을 건데, 서울의 밤이 온통 발갛네.”하고 불평이나 하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여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의 독이 없어지고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 멸망합니다.
살인은 큰 죄입니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간음도 큰 죄입니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딸을 시집보냈는데 사위가 딸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면 좋겠습니까? 아들을 장가보냈는데 며느리가 아들을 두고 다른 남자를 몰래 만나면 좋겠습니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귀한 집 딸을 데리고 살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고 다닌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저주감입니다. 또 그보다 더 악한 일은 길가는 여자를 강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죄를 지었어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의 독이 없어지고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1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를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되어도 놋뱀만 바라보면 꿈처럼 낫게 되었듯이, 30년, 50년, 70년간 지은 죄가 너무 크고 죄의 독이 너무 많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라도 오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강간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착한 일을 하고 살아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라고 하면서 책을 쓰고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오랜 세월에 건설되었지만 나는 앞으로 50년만에 기독교를 허물겠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 안에 성경이 한 권도 없도록 만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을 스위스 성서공회에서 사들여 성경 창고로 써 그 집의 방과 마루에는 성경이 가득했습니다. 또 그는 죽을 때 “아!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지옥으로 떨어진다.”하며 덜덜 떨다가 죽었습니다.
프랜시스 뉴톤도 무신론자인데 “나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무서운 저주의 고통, 죄의 고통을 당하는구나.”하며 떨다가 죽었습니다.
출처/지용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