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0
십자가 상의 예수님 (누가복음 23:39-49)
시카고의 위턴 대학(Wheaton college)의 헬라어 교수인 ‘하우톤’(Gerald Hawthorne)교수는 그의 책 바울의 신학사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는 “16세기 이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이 더욱 활발하게 연구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in),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through) 자기 자신을 인류에게 나타내시고, 자기자신을 보여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고자 하거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구원의 기초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학의 시작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상은 기독교 사상의 중심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표증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양 옆에는 두 강도의 십자가도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그리고 백부장은 “그는 진실로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그리스도인의 장식이요, 어떤 나라에서는 국기에 십자가를 그리고, 십자가는 사회봉사정신의 표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녹십자가, 적십자가, 청십자가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원래 잔인한 사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상의 사형법은 페르시야에서 시작하여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의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십자가 사형은 워낙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의 정부가 있는 이태리에서는 금지되고, 로마 시민에게도 시행하지 못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원래 그 정신이 이 땅은 신성한 것으로 전제하고, 흉악범을 땅에 닿지 못하게 달아 죽이고, 그 시체도 땅에 묻지 않고 공중의 새가 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형 집행은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네 명의 집행관이 그를 채찍으로 사형장소까지 인도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눕혀 못을 박고 공중에 세우는데 대개는 3일이나 일주일, 또는 보름 정도의 시간까지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잔인한 사형법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같은 잔인한 십자가 형틀에서 처형되고 죽어가셨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며 무엇을 위해서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는 두 강도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보고 회개한 강도이고,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회개치 아니한 강도였습니다. 혹자는 이 세 십자가상의 사람이야 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표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끝까지 회개치 아니한 강도의 이름은 ‘게스타’라고 하고, 회개한 강도의 이름은 ‘데마스’라는 사람이였다고 합니다. 게스타는 남의 물건을 강제로 도둑질한 사람이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속깨나 썩게한 사람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회개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가룟유다와 같은 이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강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인간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실 즉 “회개하는 것” 그 한 가지 조건으로 구원받고, 받지 아니하는 것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끝까지 합리화하는 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고집 부리고, 교만하고 변명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하기는 시기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회개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를 보면 회개는 시기가 없습니다. 어느 때든지 누구든지 회개하면 하나님은 이를 받아 주시고 낙원을 약속하실 것입니다. 회개한 한 강도는 예수님이 어릴 때 피난 길에서 만났던 사람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강도 두목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강도를 만나 어렵게 되었을 때 어린 아기 예수님이 너무나 예쁘고 귀여워서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예수님께 “나를 기억하여 달라”는 부탁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회개하는 일이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해의 십자가, 사랑과 공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음의 십자가요,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광과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랑의 십자가요, 영원한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토마스 엘스킨(Thomas Elskin)의 작품 ‘잘루시스’는 예수님의 대속적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가르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백성들의 문란한 도덕 생활을 걱정하는 왕이 칙령으로 간음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제일 먼저 어기는 자의 두 눈을 뽑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제일 사랑하는 왕자가 이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는 그의 사랑과 공의의 중요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왕은 자기 아들의 한 눈을 뽑고, 다시 자기의 한 눈을 아들 눈 대신에 뽑았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은 그의 사랑과 공의에 탄복하고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자식을 대신하여 눈을 뽑은 것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독일의 진센돌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감격하여 그의 전 재산과 생애를 바쳐 헌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에 책임있게 응답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강동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