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
하나님의영광을 위해 살자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창세기 1:31을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든 창조물이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과 더불어 교제하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땅에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다운 모습대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영광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습니다(창 2:8). 이곳은 낙원입니다. 에덴 동산이 낙원이었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지으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아담과 하와가 더불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을 때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16, 17에서 다쉼?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아담의 책임이었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책임도 주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이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 본래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최대의 행복을 얻기 위한 최소의 희생도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하고 사단의 유혹에 끌려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첫째 아담이 불순종한 범죄는 계속해서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드려야 할 인간의 책임을 잊어버리게 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처럼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 했고, 또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름답게 지으신 이 땅과 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다시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책임이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간성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빛을 의미합니다. ‘꽃이 아름답다’‘의복이 아름답다’는 것은 빛이 있을 때 그 빛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야 말할 수 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아름답다’고 표현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영광이 주어지고 지위가 높아진 사람을 보고 빛이 난다고 합니다. 빛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이 빛이 우리 마음의 근심을 몰아 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직 땅이 혼돈한 상태에 있을 때 맨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1:23에도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빛을 내는 발광체는 많이 있습니다. 수력 발전으로 전등을 켜기도 합니다. 방사능 치료나 핵이라는 것도 다 빛을 이용한 것입니다. 빛은 사람에게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분별할 수 있는 모든 빛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공부를 잘해서 졸업식 때 대통령상을 타고 우등상을 타면 그 영광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달음질을 잘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 집안도 빛납니다. 어떤 빛은 하루도 못 가고, 어떤 빛은 한 순간만 사람들의 박수 갈채가 넘치다가 사라집니다. 과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 류 관순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한 상징적인 빛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한 순간의 빛이 아니라 영원토록 비치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기 때문에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 1:5), 우리 또한 빛 가운데 거하라고 하십니다(1:7).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하셨고, 미태복음 5:16에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흑암의 권세 속에 묻혀 있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1-3). 특히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5:8). 어두움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말합니다(5:3). 에베소서 5:11에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 교회당 안에 그냥 켜 있는 전등을 보고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자꾸 끄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있던 분들이 “목사님 왜 자꾸 전등을 끄고 다니세요”하면서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전기가 아까워서 그런다고 했죠. 그랬더니 여기는 전등을 끌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 실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나라였습니다. 정말 축복받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이 망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민의 80%가 이혼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은 마약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금은 전세계를 통제하고 있지만 그들 사회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부흥이다 해서 물질적으로 풍성해진 것 같지만 우리의 전신 문화는 이미 병이 들어 있고 사회는 사회대로 사회악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두움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마저도 어두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빛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9, 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0:31에 바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는 심히 서글픈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분쟁하며 싸우는 교회였습니다(고전 1:10). 한국의 정치사는 정당 간의 싸움으로 얼룩지고 있으며, 사업가들도 경쟁을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사회 속의 여러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도 온통 싸움뿐입니다. 시장에 가보면 자기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상인들끼리 싸웁니다. 수출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고 덤핑 수출을 합니다. 결국 다 같이 망하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는 어떻습니까? 고린도 교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관용과 최고의 인내와 최고의 희생과 헌신을 말해 주고 있지만 십자가가 걸린 교회당 안에서 십자가 찬송을 부르며 싸움질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파당짓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2과 3:4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교회 내에서도 목사파, 장로파가 있고 교파 싸움이 치열합니다. 같은 교단 속에도 이북파, 호남파, 영남파, 무슨파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습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음란이 성행했으며(고전 7장), 우상의 제물로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고전 8장). 그것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보면 은사 문제로 왈가왈부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보다는 자신의 영광으로 가로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단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태선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충서도 잘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고 난 뒤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그의 추종 세력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모든 문제를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성도 하나 하나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광채가 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빛을 받아야 그 빛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밝게 보입니다. 미국으로 여행하는 길에 알라스카에 기착하게 되면 밤 한 두 시인데도 날이 새는 듯 훤해진 것을 봅니다. 태양이 수개월동안 계속해서 비추기 때문에 어둡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하늘의 빛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과거 50일간 연속 부흥회를 인도하고 계속해서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신앙의 부흥은 물론 생활의 부흥을 일으킨 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라, 빛 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비추시고자 하시는 빛을 저를 통하여 반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빛으로 아담을 세웠지만 아담은 스스로 흑암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여전히 흑암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노아 때의 홍수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창세기 12:1에 하나님은 인류의 빛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나는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불순종하여 타락된 인간의 모습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쳐 준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3:6, 7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고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갈 3:26)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이란 세월 동안 흑암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란 빛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인간에게 완전한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아래서 얼마간 빛을 얻었으나 그 율법 속에 스스로 갇혀 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60:2에 “ 보라 어두움이 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요엘서 2장을 봐도 흑암이 땅을 뒤덮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엄청난 흑암의 고통을 맛봐야 했습니다. 아사야 선지자는 흑암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빛을 전해 줍니다. (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왕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 오리라.”
하나님은 인류에게 참 빛을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빛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2:16은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4:15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흑암 속에 있는 그들에게 영적인 빛을 비춰 준 것만이 아니라 육신의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통하여 자신의 현실도 비춰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었으나 그 얼굴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강한 빛으로 그의 육의 눈이 희미해 졌으나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된 광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를 보십시오.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들대로 방향을 잃어 버렸습니다. 국가 경제는 말할 수 없는 부채를 짊어지고 있지만 사업가들은 자기들의 재산 증식을 위해 눈이 벌겋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흐르는 세대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목표와 방향을 잃어 버린 채로 자기 욕심에만 끌려 다니는 세대입니다. 시편 107:4에 보니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길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요14:6).예수그리스도는 또한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목표와 방향을 찾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자는 흑암 속에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빛이 되어야 합니다. 왜 교회 내에서 범죄가 발생하며 교회가 세인들의 욕을 먹고 있습니까? 빛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빛 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없어지고 사람들의 욕심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 봐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자가 아닌가?”“어떤 말 속에서도, 어느 좌석에서도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자였는가 ?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보여주었던가?”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흑암의 이용자가 되고 맙니다. 가정에서나 구역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쓸데없이 교회 험담이나 하고 어느 목사, 어느 전도사, 어느 잡사의 흉만 보다가는 스스로 흑암의 자리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목적없이 비판하는 곳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도록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교회의 염려나 형제의 염려를 발하기에 앞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행동을 하면서도 혹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나 않을까 조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8에 “근신하라 깨어라”고 베드로가 한 말은 어떤 행동으로든 사단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 더 당부한 부탁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운다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4:4을 보니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은사 활용도 경쟁식으로 하지 말고 덕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14:17에도 덕 세움을 강조합니다.
베드로후서 1:5에는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집사가 술병을 들고 다니면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일날 아침 장로가 골프채를 메고 다니는 것은 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벧후 1:4)
시편 119:105에는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우리는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비춰 오면 우리의 마음에는 소망이 넘칩니다. 따라서 얼굴에는 기쁨의 광채가 납니다.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이 비춰 오면 불화가 변하여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를 변화시킨 이 빛이 이 민족 모두에게 비춰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춰서 우리는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감사와 찬송으로 이 빛을 온 세상에 전하는 작은 불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창세기 1:31을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든 창조물이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과 더불어 교제하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땅에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다운 모습대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영광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습니다(창 2:8). 이곳은 낙원입니다. 에덴 동산이 낙원이었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지으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아담과 하와가 더불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을 때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16, 17에서 다쉼?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아담의 책임이었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책임도 주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이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 본래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최대의 행복을 얻기 위한 최소의 희생도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하고 사단의 유혹에 끌려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첫째 아담이 불순종한 범죄는 계속해서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드려야 할 인간의 책임을 잊어버리게 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처럼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 했고, 또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름답게 지으신 이 땅과 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다시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책임이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간성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빛을 의미합니다. ‘꽃이 아름답다’‘의복이 아름답다’는 것은 빛이 있을 때 그 빛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야 말할 수 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아름답다’고 표현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영광이 주어지고 지위가 높아진 사람을 보고 빛이 난다고 합니다. 빛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이 빛이 우리 마음의 근심을 몰아 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직 땅이 혼돈한 상태에 있을 때 맨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1:23에도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빛을 내는 발광체는 많이 있습니다. 수력 발전으로 전등을 켜기도 합니다. 방사능 치료나 핵이라는 것도 다 빛을 이용한 것입니다. 빛은 사람에게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분별할 수 있는 모든 빛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공부를 잘해서 졸업식 때 대통령상을 타고 우등상을 타면 그 영광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달음질을 잘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 집안도 빛납니다. 어떤 빛은 하루도 못 가고, 어떤 빛은 한 순간만 사람들의 박수 갈채가 넘치다가 사라집니다. 과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 류 관순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한 상징적인 빛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한 순간의 빛이 아니라 영원토록 비치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기 때문에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 1:5), 우리 또한 빛 가운데 거하라고 하십니다(1:7).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하셨고, 미태복음 5:16에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흑암의 권세 속에 묻혀 있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1-3). 특히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5:8). 어두움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말합니다(5:3). 에베소서 5:11에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 교회당 안에 그냥 켜 있는 전등을 보고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자꾸 끄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있던 분들이 “목사님 왜 자꾸 전등을 끄고 다니세요”하면서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전기가 아까워서 그런다고 했죠. 그랬더니 여기는 전등을 끌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 실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나라였습니다. 정말 축복받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이 망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민의 80%가 이혼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은 마약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금은 전세계를 통제하고 있지만 그들 사회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부흥이다 해서 물질적으로 풍성해진 것 같지만 우리의 전신 문화는 이미 병이 들어 있고 사회는 사회대로 사회악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두움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마저도 어두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빛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9, 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0:31에 바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는 심히 서글픈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분쟁하며 싸우는 교회였습니다(고전 1:10). 한국의 정치사는 정당 간의 싸움으로 얼룩지고 있으며, 사업가들도 경쟁을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사회 속의 여러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도 온통 싸움뿐입니다. 시장에 가보면 자기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상인들끼리 싸웁니다. 수출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고 덤핑 수출을 합니다. 결국 다 같이 망하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는 어떻습니까? 고린도 교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관용과 최고의 인내와 최고의 희생과 헌신을 말해 주고 있지만 십자가가 걸린 교회당 안에서 십자가 찬송을 부르며 싸움질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파당짓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2과 3:4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교회 내에서도 목사파, 장로파가 있고 교파 싸움이 치열합니다. 같은 교단 속에도 이북파, 호남파, 영남파, 무슨파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습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음란이 성행했으며(고전 7장), 우상의 제물로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고전 8장). 그것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보면 은사 문제로 왈가왈부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보다는 자신의 영광으로 가로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단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태선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충서도 잘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고 난 뒤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그의 추종 세력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모든 문제를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성도 하나 하나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광채가 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빛을 받아야 그 빛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밝게 보입니다. 미국으로 여행하는 길에 알라스카에 기착하게 되면 밤 한 두 시인데도 날이 새는 듯 훤해진 것을 봅니다. 태양이 수개월동안 계속해서 비추기 때문에 어둡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하늘의 빛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과거 50일간 연속 부흥회를 인도하고 계속해서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신앙의 부흥은 물론 생활의 부흥을 일으킨 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라, 빛 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비추시고자 하시는 빛을 저를 통하여 반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빛으로 아담을 세웠지만 아담은 스스로 흑암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여전히 흑암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노아 때의 홍수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창세기 12:1에 하나님은 인류의 빛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나는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불순종하여 타락된 인간의 모습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쳐 준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3:6, 7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고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갈 3:26)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이란 세월 동안 흑암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란 빛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인간에게 완전한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아래서 얼마간 빛을 얻었으나 그 율법 속에 스스로 갇혀 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60:2에 “ 보라 어두움이 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요엘서 2장을 봐도 흑암이 땅을 뒤덮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엄청난 흑암의 고통을 맛봐야 했습니다. 아사야 선지자는 흑암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빛을 전해 줍니다. (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왕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 오리라.”
하나님은 인류에게 참 빛을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빛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2:16은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4:15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흑암 속에 있는 그들에게 영적인 빛을 비춰 준 것만이 아니라 육신의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통하여 자신의 현실도 비춰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었으나 그 얼굴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강한 빛으로 그의 육의 눈이 희미해 졌으나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된 광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를 보십시오.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들대로 방향을 잃어 버렸습니다. 국가 경제는 말할 수 없는 부채를 짊어지고 있지만 사업가들은 자기들의 재산 증식을 위해 눈이 벌겋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흐르는 세대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목표와 방향을 잃어 버린 채로 자기 욕심에만 끌려 다니는 세대입니다. 시편 107:4에 보니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길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요14:6).예수그리스도는 또한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목표와 방향을 찾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자는 흑암 속에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빛이 되어야 합니다. 왜 교회 내에서 범죄가 발생하며 교회가 세인들의 욕을 먹고 있습니까? 빛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빛 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없어지고 사람들의 욕심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 봐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자가 아닌가?”“어떤 말 속에서도, 어느 좌석에서도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자였는가 ?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보여주었던가?”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흑암의 이용자가 되고 맙니다. 가정에서나 구역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쓸데없이 교회 험담이나 하고 어느 목사, 어느 전도사, 어느 잡사의 흉만 보다가는 스스로 흑암의 자리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목적없이 비판하는 곳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도록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교회의 염려나 형제의 염려를 발하기에 앞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행동을 하면서도 혹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나 않을까 조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8에 “근신하라 깨어라”고 베드로가 한 말은 어떤 행동으로든 사단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 더 당부한 부탁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운다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4:4을 보니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은사 활용도 경쟁식으로 하지 말고 덕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14:17에도 덕 세움을 강조합니다.
베드로후서 1:5에는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집사가 술병을 들고 다니면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일날 아침 장로가 골프채를 메고 다니는 것은 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벧후 1:4)
시편 119:105에는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우리는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비춰 오면 우리의 마음에는 소망이 넘칩니다. 따라서 얼굴에는 기쁨의 광채가 납니다.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이 비춰 오면 불화가 변하여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를 변화시킨 이 빛이 이 민족 모두에게 비춰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춰서 우리는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감사와 찬송으로 이 빛을 온 세상에 전하는 작은 불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