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8
메시야 나라의 여인들 (마태복음 1:1-17)
마태복음 1장 첫 부분에는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를 보면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태어나서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포함되는 존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로는 인간의 타락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의인들이 아닙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족보를 한 사람씩 따져보면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심지어 우상을 섬기기까지 한 악한 흔적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악인을 배출한 그런 불미스러운 아버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인간의 타락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간의 구원이 이 족보의 배경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메시야 나라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받을만한 여인들
오늘 우리는 메시야 나라의 다섯 명의 여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족보에 언급된 다섯 명의 여인은 매우 상징적이고 교훈적입니다. 그 다섯 명을 보면 라합이 있습니다. 가나안 태생의 기생입니다. 룻이 있습니다. 모압 여인입니다. 다말이 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야의 아내가 있습니다. 밧세바입니다. 나중에 다윗의 후예가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 이렇게 다섯 명의 여인들이 등장을 합니다. 라합과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다말과 밧세바는 간음한 여인입니다. 이렇게 메시야 나라에 등장한 다섯 명의 여인들을 보아도 약점이 있고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이런 여성들이 메시야 나라에 포함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이의를 가질 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네 가지 장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고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져 있으며 형과 아우의 서열이 무너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유다, 다윗, 레위 이런 사람들은 전부 동생들입니다. 장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셈족 사회인 유대적 사회에서 보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벽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유대 사회에서 볼 때 이것은 허물어질 수 없는 장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방 여자가 예수님의 조상에 들어왔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장벽도 유대주의에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죄인은 이방인과 여자와 세리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게 유대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과 죄인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형제간의 서열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성구는 6절입니다.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라"가 아니고 "다윗왕을 낳으니라"고 왕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연구할 때 이 대목을 놓치면 안됩니다. 왜 하나님이 메시야의 왕통을 이야기할 때 다윗에게 와서는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이렇게 표현을 했느냐 하면 메시야의 왕통이 다윗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특별히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는 다윗왕통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도 메시야의 족보인데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제 메시야 나라에 등장했던 이 다섯 명의 이 여인들을 세 가지 면으로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걸작품
첫째로 이 다섯 명의 여인을 볼수록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빚어낸 걸작품이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스스로 선교를 하셨습니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기를 자꾸 드러내는데 이 다섯 명의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자꾸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명의 여인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가 거기에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걸작품이 이 다섯 명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장벽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여인들을 통해서 무너뜨리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인간적으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고 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이 여인들의 모든 것을 품어 주셨고 이 여인들이 메시야 나라의 놀라운 걸작품으로 하나님이 지으셨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 여자들은 놀라운 집념을 가진 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연약합니다. 여성들은 감성위주의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다섯 명의 여인을 볼 때 연약한 여자들에게 놀라운 믿음의 집념이 있었습니다.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이 가졌던 믿음의 집념이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여성도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합
라합을 먼저 봅시다. 라합이라는 이 여인은 기생입니다. 그러나 이 라합은 영적인 비밀을 가지고 있는 기생이었습니다. 그가 술장사를 하면서 기생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러 온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정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그 믿음을 간직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왔던 두 정탐꾼을 숨겨주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그 믿음을 하나님이 신앙의 최고의 경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 군데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을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행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기생 라합의 믿음을 하나님이 최고의 믿음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그 당대에 가장 깊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여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나안에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숨은 비밀을 간직한 이 여인은 목숨을 걸고 정탄꾼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기로입니다. 그것이 탄로가 나면 그 길로 라합의 가족들은 다 멸절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합을 보호하셔서 여리고성이 멸망하는 그때에 온 가족들을 구원시켰습니다.
룻
두번째로 룻을 봅시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선택한 여자입니다. 어머니 나오미가 믿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자기도 일생 섬겨야 될 하나님으로 선택하고 모압에서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던 여자입니다. 이 룻이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어머니의 믿음을 그대로 본받아서 고향을 떠나서 베들레헴까지 왔던 여자입니다.
다말
그 다음에 다말이라는 여자는 오늘 우리의 관습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신랑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이 여자를 주어서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그 당시 관습을 따라서 그렇게 했는데 동생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말이 아이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관습은 여인이 아이를 얻지 못하면 노예가 됩니다. 노예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 애가 크기까지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말이 꾀를 낸 것입니다. 창녀로 분장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길목에 서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한 것입니다. 이 유다라는 사람이 창녀와 놀아나면서도 며느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게 과연 가능하냐? 아마도 다말이 분장을 기가 막히게 해서 완벽한 창녀의 노릇을 했기 때문에 상대방 눈을 속일수도 있겠지만 유다라는 사람이 신중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 후에 약조물로 다말이 요구한 게 있습니다. 창기와 관계한 그 삯으로 양을 주기로 되어 있는데 그 양을 주기까지의 약조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올무가 됩니다. 유다가 나중에 다말 앞에 꼼짝없이 며느리와 관계한 시아버지로 탄로나게 됩니다. 변명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말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아들을 얻어서 기어코 자기 자리를 확보한 이 다말의 행동은 대단한 집념입니다. 다말이 아들을 얻고자 하는 그 수단과 방법은 모든 여성들보다 탁월하고 유다는 보통 남자가 아닌데 이런 자기 시아버지를 정복한 여자입니다.
밧세바
그 다음에 밧세바라는 이 여인은 솔로몬의 어머니입니다. 무서운 왕비입니다. 다윗이 임종을 할 때 다윗 옆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왕비니까 다윗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밧세바가 다윗 옆에 있었던 것은 솔로몬이 세자 책봉을 받는 일 즉 왕위를 계승하는 그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서 임종의 자리에까지도 이 밧세바가 다윗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 여인도 목숨을 걸고 메시야를 잉태하고 출산한 집념의 여자입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은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간음한 여자였지만 영적인 면에서 보면 다른 여자가 따라갈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무서운 집념을 가진 여인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여성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성들이 갖고있는 모성애라는 것을 생명력에 비유합니다. 여성이 만약 모성애를 느끼지 못한다면 생명력이 없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남자보다 달리 반응하는 게 여성입니다. 그게 여성의 모성 본능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한 헌신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끈기가 있고 집념이 강한 경우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저는 여인의 집념이 살아있는 한 그 집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성애의 집념, 여성의 집념이 망가지면 다른 것도 다 망가집니다. 메시야 나라에 나타나 있는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은 참으로 놀라운 은사를 받은 여인들입니다. 이런 여인들처럼 신분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고 이 다섯 명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집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사모하고 기어코 그 축복을 얻고자 하는 집념을 오늘의 여성들이 꼭 배우기를 바랍니다.
주목할만한 남자들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 여인들과 관계된 남자들을 절대 외면하면 안됩니다. 라합의 남자는 살몬입니다. 살몬은 기생 라합의 집에 정탐꾼으로 왔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룻의 남자는 그 당대 최고의 믿음의 사람 보아스입니다. 다말의 남자는 유다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아들입니다. 열 두 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그 인물은 보통 인물 아닙니다. 삼 형제 중에 뛰어나도 제법인데 열 두 아들 중에 최고로 뛰어난 자가 유다입니다. 이 남자를 다말이 소유한 것입니다. 밧세바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마리아의 남자는 요셉입니다.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관계한 그 남자들은 그 당대 최고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아스 시대에 보아스 만큼 믿음이 뛰어난 인물이 성경에 묘사되지 않습니다. 살몬은 정탐꾼 가운데 포함될 만큼 용기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말할 것 없고 다윗은 그 당대 특출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그때에, 헤롯왕이 다스리던 그 시대에 요셉같은 이런 숨어있는 믿음의 남자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대 최고 신앙의 남자들과 최고 신앙의 여인들이 결합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것을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어 가시지만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 이 섭리가 놀라운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살몬을 통해서 메시야의 조상이 됩니다. 룻도 혼자서도 위대한 여자이지만 보아스를 만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말도 밧세바도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남자를 만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구속사 안에 나타난 이 교훈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면 공동체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나 우리가 선교하는 일이나 전도하는 일이나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모든 삶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귀하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되었을 때 이 여인들은 귀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메시야 나라에서 이 여인들은 존귀했습니다. 메시야 나라가 아니라면 이 여인들은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끝날 여인이고 죄인으로서 끝날 여인이고 간음한 굴레를 쓰고 살아야 될 불행한 존재들이지만 메시야 나라에서 이토록 존귀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의리와 충성보다
여기서 이런 점을 제가 하나 언급하고 싶습니다. 동양사상은 그 중심이 언제나 개인을 강조합니다. 동양의 인간 관계에서 제일 강조되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의리입니다. 의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의리를 잃어버리면 인간관계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 의리는 철저하게 보스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개인에게 의리를 저버리면 그 보스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하고도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동양의 의리는 전부 보스 중심입니다. 개인의 중심입니다. 개인의 의리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의리를 지키려고 하니깐 거짓말도 해야 되고 속임수도 있어야 되고 남에게 손해 끼치는 짓도 감수하면서도 보스에게는 내가 의리를 지켜야 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리가 있다는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다 의리가 있는 게 아니라 보스 한 사람 앞에 의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내게 마음맞는 그 사람에게 백점을 주어버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는 영점짜리도 안 되는 인격자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몹쓸 짓을 하면서도 내게는 한번 잘했다는 그것 가지고 내가 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의 인간관계는 철저히 개인주의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도 기금은 안냅니다. 자식들한테는 주고 나 좋은데 쓰지 서양처럼 돈이 있다고 좋은 일에 기금 내고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 하면 의식이나 사고 자체가 개인에게 의리 중심으로 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의리에 통하면 목숨도 내어 주는 게 우리입니다. 그러나 나와 관계없는 곳에는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동양의 인간 관계에서 두 번째 강조하는 게 충성입니다. 너 나를 위해서 죽어라. 그 충성이 개인에게 집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극이 많이 나오는데 드라마를 봐도 철저히 의리와 충성이 개인에게 얽혀 있습니다. 국가 전체에 대한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전부 개인에게 얽혀서 나라를 망치는 것입니다. 충성은 좋은데 개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충성을 강요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이 개인주의의 의리와 충성을 깨트려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교단 안에서도 이것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정직과 합리성을
그런데 서양사상을 보면 인간관계에서 제일 강조되는 덕목이 의리와 충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서양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정직입니다. 그런데 이 정직은 개인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정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문제가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그 나라에서는 안통합니다. 왜? 공동체의 정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에 맡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를 미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왜 미워합니까? 나는 철저히 개인적인 인간 관계에서 미워하는데 하나님의 나라 질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합은 못봐주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렇게 높아져 있는 여자란 말입니다.
두번째 강조되는 덕목은 합리성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합리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절대 용납 안합니다. 합리적이라야 됩니다. 누구에게나 공감이 가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합리성이 있어야 됩니다. 끼리 끼리 좋고 한쪽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서구 사람들이 강조하는 인간관계 덕목은 정직과 합리성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역을 해야 되고 이것으로 외교를 해야 됩니다. 이 두 개에 불합격되면 무역이 안됩니다. 의리와 충성으로 들이미는 것은 국제관계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국제 관계에서는 정직과 합리성을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랍의 부부가 아주 정답게 오십년을 해로했습니다. 아랍에서는 결혼한지 오십년 동안 부부가 사는 예가 거의 없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오십년 동안 산 것입니다. 그 주변에서 어떻게 오십년 동안 그렇게 같이 살았냐고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결혼을 해서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을 했는데 그만 내 남편을 태운 낙타가 한참 가다가 몸이 불편했던지 혹은 몸부림을 쳐서 신랑을 떨어뜨렸는데 그래도 이 남자가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그 낙타를 향하여 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 번" 하더랍니다. 또 낙타를 타고 가는데 이 낙타가 몸부림을 쳐서 신랑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랑이 일어나서 "두 번" 하고는 화를 내지 않고 그냥 또 타더랍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만 이 낙타가 세 번째 신랑을 흔들어서 떨어트렸습니다. 그때 이 신랑은 권총을 빼 가지고는 낙타를 쏘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이 하도 어이가 없어 어떻게 당신이 말못할 짐승을 향해서 그렇게 총으로 사살을 할 수 있느냐 하고 잔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때 이 남자가 "한 번" 하더랍니다. 그 이후로 조용히 살았답니다.
맺는 말
여기 나오는 다섯 명의 여인들은 메시야 나라에서 정직성과 합리성이 증명된 사람들입니다. 그의 믿음과 그들의 삶 속에서 이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인 조건하에서는 내세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이 여호와 앞에서 받아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정직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믿고 있는 그 약속과 하나님은 정직한 약속이었습니다. 가감이 없었습니다. 불순한 것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목숨을 걸고 순종한 것입니다. 라합과 룻과 다말과 밧세바와 마리아는 하나님을 향한 그 약속을 믿고 거기에 그들의 목숨과 생애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이 다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조건부로 순종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순종은 약속을 믿는 믿음에 목숨을 던지는 순종입니다. 메시야 나라에 존귀한 여성들입니다. 이 여성들이 이 시대 우리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
마태복음 1장 첫 부분에는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를 보면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태어나서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포함되는 존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로는 인간의 타락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의인들이 아닙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족보를 한 사람씩 따져보면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심지어 우상을 섬기기까지 한 악한 흔적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악인을 배출한 그런 불미스러운 아버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인간의 타락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간의 구원이 이 족보의 배경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메시야 나라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받을만한 여인들
오늘 우리는 메시야 나라의 다섯 명의 여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족보에 언급된 다섯 명의 여인은 매우 상징적이고 교훈적입니다. 그 다섯 명을 보면 라합이 있습니다. 가나안 태생의 기생입니다. 룻이 있습니다. 모압 여인입니다. 다말이 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야의 아내가 있습니다. 밧세바입니다. 나중에 다윗의 후예가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 이렇게 다섯 명의 여인들이 등장을 합니다. 라합과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다말과 밧세바는 간음한 여인입니다. 이렇게 메시야 나라에 등장한 다섯 명의 여인들을 보아도 약점이 있고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이런 여성들이 메시야 나라에 포함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이의를 가질 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네 가지 장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고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져 있으며 형과 아우의 서열이 무너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유다, 다윗, 레위 이런 사람들은 전부 동생들입니다. 장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셈족 사회인 유대적 사회에서 보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벽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유대 사회에서 볼 때 이것은 허물어질 수 없는 장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방 여자가 예수님의 조상에 들어왔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장벽도 유대주의에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죄인은 이방인과 여자와 세리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게 유대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과 죄인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형제간의 서열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성구는 6절입니다.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라"가 아니고 "다윗왕을 낳으니라"고 왕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연구할 때 이 대목을 놓치면 안됩니다. 왜 하나님이 메시야의 왕통을 이야기할 때 다윗에게 와서는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이렇게 표현을 했느냐 하면 메시야의 왕통이 다윗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특별히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는 다윗왕통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도 메시야의 족보인데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제 메시야 나라에 등장했던 이 다섯 명의 이 여인들을 세 가지 면으로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걸작품
첫째로 이 다섯 명의 여인을 볼수록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빚어낸 걸작품이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스스로 선교를 하셨습니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기를 자꾸 드러내는데 이 다섯 명의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자꾸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명의 여인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가 거기에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걸작품이 이 다섯 명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장벽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여인들을 통해서 무너뜨리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인간적으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고 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이 여인들의 모든 것을 품어 주셨고 이 여인들이 메시야 나라의 놀라운 걸작품으로 하나님이 지으셨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 여자들은 놀라운 집념을 가진 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연약합니다. 여성들은 감성위주의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다섯 명의 여인을 볼 때 연약한 여자들에게 놀라운 믿음의 집념이 있었습니다.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이 가졌던 믿음의 집념이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여성도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합
라합을 먼저 봅시다. 라합이라는 이 여인은 기생입니다. 그러나 이 라합은 영적인 비밀을 가지고 있는 기생이었습니다. 그가 술장사를 하면서 기생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러 온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정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그 믿음을 간직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왔던 두 정탐꾼을 숨겨주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그 믿음을 하나님이 신앙의 최고의 경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 군데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을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행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기생 라합의 믿음을 하나님이 최고의 믿음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그 당대에 가장 깊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여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나안에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숨은 비밀을 간직한 이 여인은 목숨을 걸고 정탄꾼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기로입니다. 그것이 탄로가 나면 그 길로 라합의 가족들은 다 멸절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합을 보호하셔서 여리고성이 멸망하는 그때에 온 가족들을 구원시켰습니다.
룻
두번째로 룻을 봅시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선택한 여자입니다. 어머니 나오미가 믿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자기도 일생 섬겨야 될 하나님으로 선택하고 모압에서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던 여자입니다. 이 룻이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어머니의 믿음을 그대로 본받아서 고향을 떠나서 베들레헴까지 왔던 여자입니다.
다말
그 다음에 다말이라는 여자는 오늘 우리의 관습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신랑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이 여자를 주어서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그 당시 관습을 따라서 그렇게 했는데 동생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말이 아이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관습은 여인이 아이를 얻지 못하면 노예가 됩니다. 노예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 애가 크기까지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말이 꾀를 낸 것입니다. 창녀로 분장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길목에 서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한 것입니다. 이 유다라는 사람이 창녀와 놀아나면서도 며느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게 과연 가능하냐? 아마도 다말이 분장을 기가 막히게 해서 완벽한 창녀의 노릇을 했기 때문에 상대방 눈을 속일수도 있겠지만 유다라는 사람이 신중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 후에 약조물로 다말이 요구한 게 있습니다. 창기와 관계한 그 삯으로 양을 주기로 되어 있는데 그 양을 주기까지의 약조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올무가 됩니다. 유다가 나중에 다말 앞에 꼼짝없이 며느리와 관계한 시아버지로 탄로나게 됩니다. 변명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말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아들을 얻어서 기어코 자기 자리를 확보한 이 다말의 행동은 대단한 집념입니다. 다말이 아들을 얻고자 하는 그 수단과 방법은 모든 여성들보다 탁월하고 유다는 보통 남자가 아닌데 이런 자기 시아버지를 정복한 여자입니다.
밧세바
그 다음에 밧세바라는 이 여인은 솔로몬의 어머니입니다. 무서운 왕비입니다. 다윗이 임종을 할 때 다윗 옆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왕비니까 다윗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밧세바가 다윗 옆에 있었던 것은 솔로몬이 세자 책봉을 받는 일 즉 왕위를 계승하는 그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서 임종의 자리에까지도 이 밧세바가 다윗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 여인도 목숨을 걸고 메시야를 잉태하고 출산한 집념의 여자입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은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간음한 여자였지만 영적인 면에서 보면 다른 여자가 따라갈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무서운 집념을 가진 여인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여성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성들이 갖고있는 모성애라는 것을 생명력에 비유합니다. 여성이 만약 모성애를 느끼지 못한다면 생명력이 없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남자보다 달리 반응하는 게 여성입니다. 그게 여성의 모성 본능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한 헌신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끈기가 있고 집념이 강한 경우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저는 여인의 집념이 살아있는 한 그 집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성애의 집념, 여성의 집념이 망가지면 다른 것도 다 망가집니다. 메시야 나라에 나타나 있는 이 다섯 명의 여인들은 참으로 놀라운 은사를 받은 여인들입니다. 이런 여인들처럼 신분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고 이 다섯 명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집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사모하고 기어코 그 축복을 얻고자 하는 집념을 오늘의 여성들이 꼭 배우기를 바랍니다.
주목할만한 남자들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 여인들과 관계된 남자들을 절대 외면하면 안됩니다. 라합의 남자는 살몬입니다. 살몬은 기생 라합의 집에 정탐꾼으로 왔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룻의 남자는 그 당대 최고의 믿음의 사람 보아스입니다. 다말의 남자는 유다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아들입니다. 열 두 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그 인물은 보통 인물 아닙니다. 삼 형제 중에 뛰어나도 제법인데 열 두 아들 중에 최고로 뛰어난 자가 유다입니다. 이 남자를 다말이 소유한 것입니다. 밧세바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마리아의 남자는 요셉입니다.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관계한 그 남자들은 그 당대 최고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아스 시대에 보아스 만큼 믿음이 뛰어난 인물이 성경에 묘사되지 않습니다. 살몬은 정탐꾼 가운데 포함될 만큼 용기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말할 것 없고 다윗은 그 당대 특출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그때에, 헤롯왕이 다스리던 그 시대에 요셉같은 이런 숨어있는 믿음의 남자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대 최고 신앙의 남자들과 최고 신앙의 여인들이 결합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것을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어 가시지만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 이 섭리가 놀라운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살몬을 통해서 메시야의 조상이 됩니다. 룻도 혼자서도 위대한 여자이지만 보아스를 만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말도 밧세바도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남자를 만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구속사 안에 나타난 이 교훈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면 공동체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나 우리가 선교하는 일이나 전도하는 일이나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모든 삶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귀하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되었을 때 이 여인들은 귀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메시야 나라에서 이 여인들은 존귀했습니다. 메시야 나라가 아니라면 이 여인들은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끝날 여인이고 죄인으로서 끝날 여인이고 간음한 굴레를 쓰고 살아야 될 불행한 존재들이지만 메시야 나라에서 이토록 존귀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의리와 충성보다
여기서 이런 점을 제가 하나 언급하고 싶습니다. 동양사상은 그 중심이 언제나 개인을 강조합니다. 동양의 인간 관계에서 제일 강조되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의리입니다. 의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의리를 잃어버리면 인간관계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 의리는 철저하게 보스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개인에게 의리를 저버리면 그 보스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하고도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동양의 의리는 전부 보스 중심입니다. 개인의 중심입니다. 개인의 의리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의리를 지키려고 하니깐 거짓말도 해야 되고 속임수도 있어야 되고 남에게 손해 끼치는 짓도 감수하면서도 보스에게는 내가 의리를 지켜야 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리가 있다는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다 의리가 있는 게 아니라 보스 한 사람 앞에 의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내게 마음맞는 그 사람에게 백점을 주어버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는 영점짜리도 안 되는 인격자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몹쓸 짓을 하면서도 내게는 한번 잘했다는 그것 가지고 내가 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의 인간관계는 철저히 개인주의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도 기금은 안냅니다. 자식들한테는 주고 나 좋은데 쓰지 서양처럼 돈이 있다고 좋은 일에 기금 내고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 하면 의식이나 사고 자체가 개인에게 의리 중심으로 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의리에 통하면 목숨도 내어 주는 게 우리입니다. 그러나 나와 관계없는 곳에는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동양의 인간 관계에서 두 번째 강조하는 게 충성입니다. 너 나를 위해서 죽어라. 그 충성이 개인에게 집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극이 많이 나오는데 드라마를 봐도 철저히 의리와 충성이 개인에게 얽혀 있습니다. 국가 전체에 대한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전부 개인에게 얽혀서 나라를 망치는 것입니다. 충성은 좋은데 개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충성을 강요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이 개인주의의 의리와 충성을 깨트려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교단 안에서도 이것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정직과 합리성을
그런데 서양사상을 보면 인간관계에서 제일 강조되는 덕목이 의리와 충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서양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정직입니다. 그런데 이 정직은 개인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정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문제가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그 나라에서는 안통합니다. 왜? 공동체의 정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에 맡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를 미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왜 미워합니까? 나는 철저히 개인적인 인간 관계에서 미워하는데 하나님의 나라 질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합은 못봐주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렇게 높아져 있는 여자란 말입니다.
두번째 강조되는 덕목은 합리성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합리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절대 용납 안합니다. 합리적이라야 됩니다. 누구에게나 공감이 가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합리성이 있어야 됩니다. 끼리 끼리 좋고 한쪽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서구 사람들이 강조하는 인간관계 덕목은 정직과 합리성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역을 해야 되고 이것으로 외교를 해야 됩니다. 이 두 개에 불합격되면 무역이 안됩니다. 의리와 충성으로 들이미는 것은 국제관계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국제 관계에서는 정직과 합리성을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랍의 부부가 아주 정답게 오십년을 해로했습니다. 아랍에서는 결혼한지 오십년 동안 부부가 사는 예가 거의 없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오십년 동안 산 것입니다. 그 주변에서 어떻게 오십년 동안 그렇게 같이 살았냐고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결혼을 해서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을 했는데 그만 내 남편을 태운 낙타가 한참 가다가 몸이 불편했던지 혹은 몸부림을 쳐서 신랑을 떨어뜨렸는데 그래도 이 남자가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그 낙타를 향하여 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 번" 하더랍니다. 또 낙타를 타고 가는데 이 낙타가 몸부림을 쳐서 신랑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랑이 일어나서 "두 번" 하고는 화를 내지 않고 그냥 또 타더랍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만 이 낙타가 세 번째 신랑을 흔들어서 떨어트렸습니다. 그때 이 신랑은 권총을 빼 가지고는 낙타를 쏘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이 하도 어이가 없어 어떻게 당신이 말못할 짐승을 향해서 그렇게 총으로 사살을 할 수 있느냐 하고 잔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때 이 남자가 "한 번" 하더랍니다. 그 이후로 조용히 살았답니다.
맺는 말
여기 나오는 다섯 명의 여인들은 메시야 나라에서 정직성과 합리성이 증명된 사람들입니다. 그의 믿음과 그들의 삶 속에서 이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인 조건하에서는 내세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이 여호와 앞에서 받아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정직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믿고 있는 그 약속과 하나님은 정직한 약속이었습니다. 가감이 없었습니다. 불순한 것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목숨을 걸고 순종한 것입니다. 라합과 룻과 다말과 밧세바와 마리아는 하나님을 향한 그 약속을 믿고 거기에 그들의 목숨과 생애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이 다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조건부로 순종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순종은 약속을 믿는 믿음에 목숨을 던지는 순종입니다. 메시야 나라에 존귀한 여성들입니다. 이 여성들이 이 시대 우리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