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8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빌레몬서 1:1-3)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께서 빌레몬에게 쓰신 서신입니다.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에 해당하며 개인에게 보낸 서신이기도 합니다.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을 받은 개인은 디모데, 디도, 빌레몬 등입니다. 빌레몬에게 보내진 짧은 서신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빌레몬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적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을 만나며 감격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빌레몬서는?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빌레몬서를 소개하겠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골4:9,16-17). 그의 아들 아킵보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목회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빌레몬의 집에도 교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아마도 에베소에서 주님께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이 노예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가 당시 로마 제국하에 수많은 노예가 있었고 노예제도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 역시 이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 모두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바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바뀌면 세상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노예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도 노예를 사람답게 다루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삶을 바치기 시작하면서 제도나 문화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 중 하나로서 그의 주인에게서 도둑질을 하고 로마로 도망친 사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섭리적 인도로 도망친 노예가 바울과 접촉하게 되는데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빌레몬은 불순종한 노예 오네시모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개입하여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재하였으며 그의 생명을 구원받게 됩니다. 따라서 빌레몬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불순종하고 손해를 끼친 오네시모를 위해 죄값을 지불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치르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아울러 우리도 누군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짐을 대신 져주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런 역할이 아름답습니다. 사이를 이어주고 맺힌 것을 풀어주고 자신의 희생으로 누군가를 살려주는 이런 역할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 -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1절에서 이 서신의 저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옥중에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쁨으로 옥에 갇혔습니다.
9절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나이 많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늙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갇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약 55-60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혔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혀 보셨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그 선을 넘지 않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길을 떠나지 않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울타리를 지킨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혔지만 사실은 예수의 사랑에 갇힌 자입니다.
사랑에 갇혀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에 묶여 사는 것은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힘들지만 그것을 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사랑 대문에 나의 삶에 제약되지만 그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행복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갇힙니까?
욕심 때문에 갇힌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갇히고 욕심에 끌려 다니다가 자신의 풀려날 수 없는 궁지에 몰려 갇히는 일도 있기 미련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처럼 달린 사람은 없습니다. 다 자기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십자가에 달렸어도 그 가치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갇혔지만 갇히지 않은 사람
그는 감옥에 갇혔지만 결코 갇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유자입니다. 그를 감옥에 가두므로 그의 행동은 제한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도 그의 영적 상태도 결코 묶이거나 갇히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자유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2). 진리 되신 주님 안에서 살면 결코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아무 것이나 다 하고 아무 것이나 다 먹고 아무 데나 다 가지만 진정한 자유를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탐욕에 노예가 되어 사는 경우입니다. 양심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늘 불안하고 늘 갈등하고 살아갑니다. 삶의 기쁨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인데 늘 가난한 사람이 있고 다 가졌는데 만족이 없는 사람이 있듯이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갇혔지만 그가 전하던 복음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며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갇힌 상태로 인하여 절망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복음의 진보가 된다면 기뻐하였습니다.
함께 갇힌 사람들
1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
데모데가 함께 갇힌 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23-25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이들이 바울 사도와 함께 갇혀서 바울 사도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외로움을 타는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그 외로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빨리 오라고 편지한 것입니다. 마가까지 데리고 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갇히고 함께 격려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한 일에 함께 하는 사람이 됩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일하기 위해 평안하기를 부자가 되기를 높아지기를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편안함을 위한 욕심은 아닌지요? 주님은 우리가 갇혀도 가난해도 낮은 자리에서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오히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모습이 더욱 놀라운 것이지요. 갇힌 상태에서 일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출처/김관선목사 설교 중에서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께서 빌레몬에게 쓰신 서신입니다.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에 해당하며 개인에게 보낸 서신이기도 합니다.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을 받은 개인은 디모데, 디도, 빌레몬 등입니다. 빌레몬에게 보내진 짧은 서신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빌레몬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적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을 만나며 감격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빌레몬서는?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빌레몬서를 소개하겠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골4:9,16-17). 그의 아들 아킵보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목회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빌레몬의 집에도 교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아마도 에베소에서 주님께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이 노예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가 당시 로마 제국하에 수많은 노예가 있었고 노예제도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 역시 이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 모두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바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바뀌면 세상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노예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도 노예를 사람답게 다루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삶을 바치기 시작하면서 제도나 문화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 중 하나로서 그의 주인에게서 도둑질을 하고 로마로 도망친 사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섭리적 인도로 도망친 노예가 바울과 접촉하게 되는데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빌레몬은 불순종한 노예 오네시모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개입하여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재하였으며 그의 생명을 구원받게 됩니다. 따라서 빌레몬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불순종하고 손해를 끼친 오네시모를 위해 죄값을 지불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치르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아울러 우리도 누군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짐을 대신 져주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런 역할이 아름답습니다. 사이를 이어주고 맺힌 것을 풀어주고 자신의 희생으로 누군가를 살려주는 이런 역할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 -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1절에서 이 서신의 저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옥중에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쁨으로 옥에 갇혔습니다.
9절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나이 많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늙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갇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약 55-60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혔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혀 보셨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그 선을 넘지 않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길을 떠나지 않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울타리를 지킨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혔지만 사실은 예수의 사랑에 갇힌 자입니다.
사랑에 갇혀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에 묶여 사는 것은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힘들지만 그것을 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사랑 대문에 나의 삶에 제약되지만 그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행복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갇힙니까?
욕심 때문에 갇힌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갇히고 욕심에 끌려 다니다가 자신의 풀려날 수 없는 궁지에 몰려 갇히는 일도 있기 미련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처럼 달린 사람은 없습니다. 다 자기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십자가에 달렸어도 그 가치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갇혔지만 갇히지 않은 사람
그는 감옥에 갇혔지만 결코 갇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유자입니다. 그를 감옥에 가두므로 그의 행동은 제한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도 그의 영적 상태도 결코 묶이거나 갇히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자유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2). 진리 되신 주님 안에서 살면 결코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아무 것이나 다 하고 아무 것이나 다 먹고 아무 데나 다 가지만 진정한 자유를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탐욕에 노예가 되어 사는 경우입니다. 양심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늘 불안하고 늘 갈등하고 살아갑니다. 삶의 기쁨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인데 늘 가난한 사람이 있고 다 가졌는데 만족이 없는 사람이 있듯이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갇혔지만 그가 전하던 복음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며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갇힌 상태로 인하여 절망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복음의 진보가 된다면 기뻐하였습니다.
함께 갇힌 사람들
1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
데모데가 함께 갇힌 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23-25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이들이 바울 사도와 함께 갇혀서 바울 사도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외로움을 타는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그 외로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빨리 오라고 편지한 것입니다. 마가까지 데리고 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갇히고 함께 격려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한 일에 함께 하는 사람이 됩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일하기 위해 평안하기를 부자가 되기를 높아지기를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편안함을 위한 욕심은 아닌지요? 주님은 우리가 갇혀도 가난해도 낮은 자리에서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오히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모습이 더욱 놀라운 것이지요. 갇힌 상태에서 일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출처/김관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