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8
예수께서 남기신 유산 (막 16:15-16)
예수님은 공생애 삶을 3년간 살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살면서도 세상에 많은 가르침과 유산을 주셨습니다. 유산은 좋던 나쁘던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산하면 먼저 큰 재산부터 생각하는데 물질적 유산 말고도 더 좋은 유산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고 가신 유산은 그 보다 훨씬 더 소중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유산입니다. 그 유산이 몇 가지 있습니다.
“평안”
요 14:27절을 보면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유산 중 소중한 유산이 평안의 유산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평안처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이 평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알려면 이 평안을 잃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그 돈으로 이 평안을 살수 없습니다. 가정의 요소 가운데 이 평안이 최고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가정은 지옥입니다. 아이들이 자꾸만 가출하는 것도 그 가정에 이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일터에도 최고의 요소는 이 평안입니다. 일터에 이 평안이 없으면 그 일터도 지옥입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미래가 준비된 사람은 마음에 이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준비 안 되면 그 마음에는 온갖 갈등과 불안과 걱정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삶에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평안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평안의 복입니다.
2차 대전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인한 걱정이나 근심 때문에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사람은 걱정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서운 독소입니다. 사람들을 무자비 하게 무너트리는 독소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을 사정없이 죽이는 것은 암이 아니고 자동차 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걱정이고 근심이고 불안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 실직에 대한 불안감, 죽음에 대한 불안과 걱정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사정없이 넘어트리고 죽이는 독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은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려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일억 명씩이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유산으로 이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영적인 평안이고 영적인 고요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배 위에서 잠을 잡니다. 거친 파도 앞에서 제자들은 두렵고 겁나서 떨고 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더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고요이고 영적 평안입니다. 또 종말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마음도 신앙이 주는 영적인 고요이고 평안입니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을 눈앞에 두고 초연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신앙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도 이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종말 시에도 이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이 평안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고 가신 유산입니다.
“순종”
이 순종도 주님이 주신 유산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는 이 순종이 참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순종도 소극적인 순종이 아니고 절대순종입니다. 내 목숨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며 순종하는 절대순종입니다. 이 절대순종의 정신을 발휘하며 살려고 하면 내 삶에서 목숨을 바칠 만큼 소중한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절대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킬케골은 대학생 때 “나는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을 아낌없이 바치고 투자할 수 있는 절대개념, 그 목적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하고 몸부림을 쳤다고 합니다. 그 목적을 찾으면 그 목적에 내 인생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 힐티는 사람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 인생 최대의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대순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고 출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묵묵히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면 곧 바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묵묵히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십자가를 져야하는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십니다.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 14:36)하고 기도합니다. 그 자세가 바로 순종의 자세입니다.
이 순종의 자세를 가지려면 먼저 자기부정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더 오래 사는 일이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문제들은 이미 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질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종은 자기부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잡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분은 분명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명령을 어떻게 거역합니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받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번민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어떻게 해서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잡아 바칩니까. 그때 온갖 아들에게 대한 미련과 보호본능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님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아브라함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작정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이 자기부정입니다. 그 자기부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도 어느 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나를 따르라”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도 상당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경력, 성공터전, 목표, 미래에 대한 미련 모두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 고민이 이만저만이었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바울은 결단을 내리고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예수의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노라.” 그 말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오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버린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버리지 않고는 순종도 사도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부정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이생적인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미련을 가졌습니다. 끝까지 예수께서 무슨 액션을 취해주길 바라고 예수를 밀고 나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미련 없이 죽으려 하자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함으로 인생을 비극적으로 끝맺습니다. 자기부정을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삶에서 이 자기부정의 삶을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자기주장이나 갈등이나 배반들이 모두 여기서 발생합니다. 요즘 시대는 이 자기부정이 잘 안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고민이 많고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엊그제 이혼한 한 젊은 부부의 사례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기분이 몹시 상한채로 집에 돌아옵니다. 와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그만 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었습니다. 그러자 “밥도 못하고 뭐하느냐”고 부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아내가 지혜롭게 “미안해요“하고 말했더라면 그것으로 그냥 수습되었을 것인데 아내가 “뭘 그런 것 가지고 큰소리를 지르느냐”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사과는 못하고 뭘 잘했다고 대꾸를 하느냐”고 더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남자가 쫀쫀하긴”하고 또 대꾸를 했습니다. 그 순간 주먹이 날아갔고 “난 얻어맞고는 못살아”하고 그 밤에 집을 나가고 곧 바로 이혼으로 이어져 결국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자기부정이 안 되어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자기 부정이 서툰 시대입니다. 모두 자기중심입니다. 이 자기부정이라는 정신은 사명의 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삶을 성스럽게 하는 요소입니다.
남자들은 밖에서 상한 마음을 가지고 집에 까지 가지고 들어와 집에서 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 밖에서 상한 마음을 집에서 좀 표현했다고 그것도 받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가정도 아니고 부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사견입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전근대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남성들이 집에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오늘 남성들은 초긴장해야 합니다. 특히 명퇴할 즈음에 가서는 더 긴장해야 합니다. 명퇴하면 집에 3일간은 있어도 좋다고 합니다. 위로도 해 주고 음식도 신경 써서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3일만 지나면 아주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는데 특히 이사 갈 때 바짝 긴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긴장안하면 짐 다 싣고 그냥 떠나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짐 거의 다 실어졌다 싶으면 빨리 차에 올라타야 합니다. 차도 버릴 짐을 실은 차를 타면 쓰레기장으로 가 버리니까 피아노 실은 차를 타거나 아니면 아내가 좋아하는 개를 안고 있던지 해야 안전하다고 합니다.
섬김, 협동, 사랑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결혼생활은 상대를 위해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삶은 모두 섬김의 삶입니다. 거기서 순종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 순종의 유산을 보여주고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길이고 사명이다”하고 생각되었을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그 고난의 길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이 순종의 모습입니다.
“온유함”
예수님이 남기신 유산 중 또 하나는 온유함입니다. 마 11:29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진정한 온유함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이 온유함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배반자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때 눈에서 불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정의 흔들림이 없이 친구여 하고 맞아들였습니다. 군인들이 힘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십자가에서 죽이고 무덤에 뭍은 다음 돌을 굴려서 무덤입구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한번도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온갖 수모스럽게 심문하고 침 뱉고 끌고 다녀도 순순히 끌려 다녔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온유해서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께는 얼마든지 그 어려움에서 헤어나고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함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절대기준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온유함으로 모든 수모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 “인격적인 모독”을 인내하고 참아내는 일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인내력이고 참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하다 보면 뒤에서 참 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들어보면 참 기가 막힌 말들, 오해들, 그럴 것이다 하고 여겨버리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말들을 듣고도 허허 웃으며 그냥 넘겨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고 넘겨버리기가 참 어렵고 힘듭니다. 신자 중에는 목회자를 괴롭히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이 몇 명씩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별로 생각 없이 그냥 내뱉는 말들인데 사람들에게 상당히 악영향을 미치고 어떤 때는 비수같이 마음에 아픔을 주는 말들을 그냥 내 뱉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런 때도 그냥 웃으며 받아 넘겨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온유함으로 가득 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일제 때 우리 민족이 일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때는 억울했으나 별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없고 아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하며 참는 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할 수 없어서 당한 것입니다. 온유함은 힘이 있는데 그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순순히 순종해서 당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얼마든지 그들을 무찌르고 물리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응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내가 갈 길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수모의 길을 따르느라 온갖 수모를 다 겪고 인격의 모독까지 다 당하고 마침내는 그 사명의 길을 승리롭게 완수합니다. 그것이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이 온유함의 모습을 유산으로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힘 있는 나는 망하고 온유했던 예수는 죽는 것 같았는데 결국 승리했다”고 고백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전파하라”
예수님의 유산 중 마지막 유산은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분부하신 유언이고 유산입니다. 본문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게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이 삶을, 내 죽음을, 내 고난을, 내 부활을 세상에 알리고 전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왜 세상에 왔으며, 세상에 와서 왜 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며, 왜 십자가에서 죽어 땅에 묻혔다가 부활해야만 했는가를 알려라” 그 말입니다. 그 알리는 일이 전도이고 전파이고 선교이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사명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적 생애를 3년 살았습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참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유산도 주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평안이고 순종이고 온유함이고 전도하는 일입니다. 이 뜻을 받들고 따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가장 성숙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삶을 3년간 살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살면서도 세상에 많은 가르침과 유산을 주셨습니다. 유산은 좋던 나쁘던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산하면 먼저 큰 재산부터 생각하는데 물질적 유산 말고도 더 좋은 유산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고 가신 유산은 그 보다 훨씬 더 소중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유산입니다. 그 유산이 몇 가지 있습니다.
“평안”
요 14:27절을 보면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유산 중 소중한 유산이 평안의 유산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평안처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이 평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알려면 이 평안을 잃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그 돈으로 이 평안을 살수 없습니다. 가정의 요소 가운데 이 평안이 최고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가정은 지옥입니다. 아이들이 자꾸만 가출하는 것도 그 가정에 이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일터에도 최고의 요소는 이 평안입니다. 일터에 이 평안이 없으면 그 일터도 지옥입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미래가 준비된 사람은 마음에 이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준비 안 되면 그 마음에는 온갖 갈등과 불안과 걱정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삶에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평안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평안의 복입니다.
2차 대전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인한 걱정이나 근심 때문에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사람은 걱정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서운 독소입니다. 사람들을 무자비 하게 무너트리는 독소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을 사정없이 죽이는 것은 암이 아니고 자동차 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걱정이고 근심이고 불안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 실직에 대한 불안감, 죽음에 대한 불안과 걱정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사정없이 넘어트리고 죽이는 독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은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려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일억 명씩이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유산으로 이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영적인 평안이고 영적인 고요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배 위에서 잠을 잡니다. 거친 파도 앞에서 제자들은 두렵고 겁나서 떨고 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더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고요이고 영적 평안입니다. 또 종말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마음도 신앙이 주는 영적인 고요이고 평안입니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을 눈앞에 두고 초연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신앙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도 이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종말 시에도 이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이 평안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고 가신 유산입니다.
“순종”
이 순종도 주님이 주신 유산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는 이 순종이 참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순종도 소극적인 순종이 아니고 절대순종입니다. 내 목숨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며 순종하는 절대순종입니다. 이 절대순종의 정신을 발휘하며 살려고 하면 내 삶에서 목숨을 바칠 만큼 소중한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절대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킬케골은 대학생 때 “나는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을 아낌없이 바치고 투자할 수 있는 절대개념, 그 목적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하고 몸부림을 쳤다고 합니다. 그 목적을 찾으면 그 목적에 내 인생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 힐티는 사람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 인생 최대의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대순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고 출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묵묵히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면 곧 바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묵묵히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십자가를 져야하는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십니다.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 14:36)하고 기도합니다. 그 자세가 바로 순종의 자세입니다.
이 순종의 자세를 가지려면 먼저 자기부정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더 오래 사는 일이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문제들은 이미 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질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종은 자기부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잡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분은 분명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명령을 어떻게 거역합니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받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번민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어떻게 해서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잡아 바칩니까. 그때 온갖 아들에게 대한 미련과 보호본능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님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아브라함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작정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이 자기부정입니다. 그 자기부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도 어느 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나를 따르라”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도 상당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경력, 성공터전, 목표, 미래에 대한 미련 모두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 고민이 이만저만이었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바울은 결단을 내리고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예수의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노라.” 그 말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오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버린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버리지 않고는 순종도 사도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부정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이생적인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미련을 가졌습니다. 끝까지 예수께서 무슨 액션을 취해주길 바라고 예수를 밀고 나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미련 없이 죽으려 하자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함으로 인생을 비극적으로 끝맺습니다. 자기부정을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삶에서 이 자기부정의 삶을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자기주장이나 갈등이나 배반들이 모두 여기서 발생합니다. 요즘 시대는 이 자기부정이 잘 안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고민이 많고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엊그제 이혼한 한 젊은 부부의 사례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기분이 몹시 상한채로 집에 돌아옵니다. 와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그만 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었습니다. 그러자 “밥도 못하고 뭐하느냐”고 부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아내가 지혜롭게 “미안해요“하고 말했더라면 그것으로 그냥 수습되었을 것인데 아내가 “뭘 그런 것 가지고 큰소리를 지르느냐”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사과는 못하고 뭘 잘했다고 대꾸를 하느냐”고 더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남자가 쫀쫀하긴”하고 또 대꾸를 했습니다. 그 순간 주먹이 날아갔고 “난 얻어맞고는 못살아”하고 그 밤에 집을 나가고 곧 바로 이혼으로 이어져 결국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자기부정이 안 되어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자기 부정이 서툰 시대입니다. 모두 자기중심입니다. 이 자기부정이라는 정신은 사명의 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삶을 성스럽게 하는 요소입니다.
남자들은 밖에서 상한 마음을 가지고 집에 까지 가지고 들어와 집에서 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 밖에서 상한 마음을 집에서 좀 표현했다고 그것도 받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가정도 아니고 부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사견입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전근대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남성들이 집에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오늘 남성들은 초긴장해야 합니다. 특히 명퇴할 즈음에 가서는 더 긴장해야 합니다. 명퇴하면 집에 3일간은 있어도 좋다고 합니다. 위로도 해 주고 음식도 신경 써서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3일만 지나면 아주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는데 특히 이사 갈 때 바짝 긴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긴장안하면 짐 다 싣고 그냥 떠나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짐 거의 다 실어졌다 싶으면 빨리 차에 올라타야 합니다. 차도 버릴 짐을 실은 차를 타면 쓰레기장으로 가 버리니까 피아노 실은 차를 타거나 아니면 아내가 좋아하는 개를 안고 있던지 해야 안전하다고 합니다.
섬김, 협동, 사랑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결혼생활은 상대를 위해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삶은 모두 섬김의 삶입니다. 거기서 순종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 순종의 유산을 보여주고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길이고 사명이다”하고 생각되었을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그 고난의 길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이 순종의 모습입니다.
“온유함”
예수님이 남기신 유산 중 또 하나는 온유함입니다. 마 11:29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진정한 온유함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이 온유함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배반자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때 눈에서 불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정의 흔들림이 없이 친구여 하고 맞아들였습니다. 군인들이 힘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십자가에서 죽이고 무덤에 뭍은 다음 돌을 굴려서 무덤입구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한번도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온갖 수모스럽게 심문하고 침 뱉고 끌고 다녀도 순순히 끌려 다녔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온유해서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께는 얼마든지 그 어려움에서 헤어나고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함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절대기준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온유함으로 모든 수모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 “인격적인 모독”을 인내하고 참아내는 일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인내력이고 참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하다 보면 뒤에서 참 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들어보면 참 기가 막힌 말들, 오해들, 그럴 것이다 하고 여겨버리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말들을 듣고도 허허 웃으며 그냥 넘겨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고 넘겨버리기가 참 어렵고 힘듭니다. 신자 중에는 목회자를 괴롭히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이 몇 명씩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별로 생각 없이 그냥 내뱉는 말들인데 사람들에게 상당히 악영향을 미치고 어떤 때는 비수같이 마음에 아픔을 주는 말들을 그냥 내 뱉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런 때도 그냥 웃으며 받아 넘겨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온유함으로 가득 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일제 때 우리 민족이 일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때는 억울했으나 별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없고 아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하며 참는 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할 수 없어서 당한 것입니다. 온유함은 힘이 있는데 그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순순히 순종해서 당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얼마든지 그들을 무찌르고 물리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응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내가 갈 길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수모의 길을 따르느라 온갖 수모를 다 겪고 인격의 모독까지 다 당하고 마침내는 그 사명의 길을 승리롭게 완수합니다. 그것이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이 온유함의 모습을 유산으로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힘 있는 나는 망하고 온유했던 예수는 죽는 것 같았는데 결국 승리했다”고 고백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전파하라”
예수님의 유산 중 마지막 유산은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분부하신 유언이고 유산입니다. 본문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게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이 삶을, 내 죽음을, 내 고난을, 내 부활을 세상에 알리고 전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왜 세상에 왔으며, 세상에 와서 왜 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며, 왜 십자가에서 죽어 땅에 묻혔다가 부활해야만 했는가를 알려라” 그 말입니다. 그 알리는 일이 전도이고 전파이고 선교이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사명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적 생애를 3년 살았습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참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유산도 주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평안이고 순종이고 온유함이고 전도하는 일입니다. 이 뜻을 받들고 따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가장 성숙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