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8
예수님의 손 (마 23:33-36)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몸에 있는 지체는 모두 다 소중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일정때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몸의 지체 중에 하나를 끊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살펴보니까 다 소중해서 자를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아니면 발가락이라도 자르려고 보니까 그것도 잘라낼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그것을 절대가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체를 만드실 때 불필요한 것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몸의 지체는 다 소중한데 그중에서도 손이 참 소중한 지체입니다. 사람의 손은 만능입니다. 손가락은 모두 다섯 개로 구성되어있는데 왜 다섯 개인가 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손가락이 때로 6개였으면 더 편리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의 손가락을 만드실 다섯 개로 만드신 것은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손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맨 손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창조해 왔습니다. 이 손으로 오늘의 문명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위대한 일 아닙니까. 우리의 손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이 손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 손으로 사람들은 모조품을 만들고 갈취를 하고 도둑질을 하고 파괴를 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손으로 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이 손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손의 역할은 참 대단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을 보면 참 위대하게 나타납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으로 행한 손의 사역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손”
눅 5:12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찾아와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손을 나병환자의 몸에 대십니다. 그랬더니 그 나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고 소망의 손입니다. 어떤 손은 파괴하는 손이 있습니다. 병들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아프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병을 낫게 하는 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 손으로 조용히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며 병자들을 고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몸속에서 병을 고치시고 병의 근원을 고치시고 병든 영을 고치시고 상한 내 마음을 고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은 고치시는 손입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신 손”
요 13:3-8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눈 후에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참 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면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금은 아주 심각하고 정신적으로 아주 복잡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에 자신의 인생 최후의 시간에 대야에 물을 떠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가장 심오한 교훈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세상은 지금 상당한 중증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온갖 불화와 갈등과 살인과 증오와 모략과 미움으로 가득합니다. 집안에도, 교회에도, 직장에도, 나라 안에도, 심지어는 내 마음에도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할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마 이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면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부간에 관계가 참 껄끄러운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며느리의 발을 씻기며 “어른스럽지 못한 부족한 나를 용서해라”하고 말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아마 모든 갈등은 순간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사람들은 평생 이 갈등과 불화 속에서 치유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지금 상당히 갈등 속에 있는 관계의 사람들일 경우 그중 한사람이 이렇게 상대방의 발을 씻겨준다면 그 갈등도 순간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최후의 순간에 마음도 분주하고 할 일도 많았을 텐데 구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방법이 모든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니까 그렇게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 발을 씻겨주신 손으로 우리들의 추한 마음, 더러워진 생각, 고집스런 마음과 흔적들을 씻기고 계실 것입니다.
“땅에 글씨 쓰심”
요 8:1-11을 보면 한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오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사회의 관습이고 율법의 정신입니다. 사람들이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께 보이며 이 여인을 죽일까요 살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난처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지금까지 말한 그의 사랑의 교훈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여인을 용서하라 하면 지금까지 부르짖었던 공의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고 엎드려 땅바닥에 글씨를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글자는 무슨 글자였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네 자신을 알라”고 쓰지 않았겠나 하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주 흥분했을 때 1분 2분만 진정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참지 못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살인하고 파괴하고 싸우고 막말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현대인들 보다 옛사람들이 참 지혜로웠습니다. 옛날 집 구조를 보면 반드시 집에는 문지방이 높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문이 없습니다. 반드시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마다 문지방이 높습니다. 방에서 마루로 나갈 때도 마루에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지방도 상당히 높습니다. 조심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 높은 문지방을 건너갈 때 분이 삭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숨 돌리게 되고 마음의 여과장치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혜로움 아닙니까.
예수님이 흥분해 있는 사람들에게 즉시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땅바닥에 글씨는 쓰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의 손끝으로 몰렸을 것입니다. 과연 무슨 글씨는 쓰며 무슨 대답이 나올 것인가 하고 급한 마음들이 상당히 누그러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 모두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될 즈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아주 침착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 있으면 이 여인을 치라.”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여인을 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들고 있던 돌을 놓고 한사람씩 그 현장을 빠져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주는 손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주고 정신에 여유를 주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조금도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이득만 보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고 분노하고 소리치고 주장하고 그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그 손길로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느끼게 하시고 돌아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주는 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
요 11:1을 보면 죽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뭍인지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 뭍인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으면 소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매장을 사흘 되는 날 하는 이유도 혹시 소생가능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미 나흘리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가서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외치십니다. 그러며 손짓하셨을 것입니다. 빨리 나오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죽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 예수님 손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시는 손입니다. 낙심해 있는 사람을 격려하시는 손입니다. 빈 그물을 가득 채워주시는 손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몸은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바쁘게 움직이고 계실 것입니다. 찾아가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소망을 일으키시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은 지금 여러분의 손도 그렇게 잡고 일으키시려 애쓰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은 살리시는 손입니다.
“축사하시는 손”
마 14:13을 보면 예수님은 들에서 오병이어의 아주 보잘 것 없는 내용물을 들고 축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5천명이 먹고 배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손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그리고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께 온 사람은 모두 소원을 이루고 돌아갔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모두 배부른 채 돌아갔습니다. 병든 자들은 병을 고치고 돌아갔습니다. 그 주님의 손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고치시고 먹이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은 지금도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시며 사역에 충실하십니다.
“그 시대 필요한 사람을 부르시는 손”
예수님은 그 손으로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들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로 가서 고기 잡던 베드로 형제와 요한형제를 불러 제자 삼았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 신실한 동역자들을 불러내서 제자 삼았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포악했던 사울을 불러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모두 순한 양 같은 사역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신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십니다. 누가 오늘 일할까, 누가 오늘 영혼구원을 위해서 나아갈까. 누가 오늘 열방으로 복음을 들고 나갈까. 누가 오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인가, 주님은 지금도 조용히 돌아다니며 당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고 다니십니다. 그렇게 부름 받아 주님의 손에 잡힌 사람들은 한결같이 큰일을 해 내는 충성된 사역자들이 다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해서 불러냄을 받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생각해보니 예수 믿으면 좋겠다 싶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보이지 않게 주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호령하시는 손”
예수님은 두 얼굴을 가지셨습니다. 한 얼굴은 아주 온화하고 용서하고 고치시고 살리시고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인자하신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고 인자하신 모습입니까. 그런데 또 한편의 예수님의 얼굴은 심판하시는 얼굴이고 호령하시는 얼굴이고 추상같이 분노하시는 얼굴입니다. 마 21:12절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때 성전 뜰은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의분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좌판을 뒤집어엎고 짐승 떼를 내 좇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기 띤 얼굴일 것이고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누고도 예수님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를 찾았으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나무를 저주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아주 추상같은 말씀으로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 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했습니다. “너는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얼마나 준엄한 심판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냥 서서 저주했겠습니까. 그 손가락을 뻗치며 질책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질책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아”, “화 있을 진저 눈먼 인도자들이여”,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 23:33절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뱀들아, 이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질책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렇게 말씀할 때 그냥 앉아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쳤겠습니까.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소리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의 손이 너무 무섭고 권위가 있고 그 모습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손입니다. 평소에는 그 손으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렸고 상한 자를 어루만져 위로하였고 병든 자를 만지며 고치셨고 슬픔 당한 자와 함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 자비로운 손길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인들을 향해서는 당장 벼락을 내리치실 것처럼 호령하시고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얼마나 추상같은 두려운 손가락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간담을 서늘케 했던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회개하고 깨우치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렇게 힘이 있던 예수의 손은 마침내 피를 흘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이 피 묻은 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손은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 손가락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잠만 자지 말고 깨어있으라, 네 영혼이 건강한가 한번 시험해 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손입니다. 이 손에 이끌리고 인도받고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그 손에 붙잡히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몸에 있는 지체는 모두 다 소중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일정때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몸의 지체 중에 하나를 끊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살펴보니까 다 소중해서 자를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아니면 발가락이라도 자르려고 보니까 그것도 잘라낼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그것을 절대가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체를 만드실 때 불필요한 것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몸의 지체는 다 소중한데 그중에서도 손이 참 소중한 지체입니다. 사람의 손은 만능입니다. 손가락은 모두 다섯 개로 구성되어있는데 왜 다섯 개인가 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손가락이 때로 6개였으면 더 편리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의 손가락을 만드실 다섯 개로 만드신 것은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손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맨 손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창조해 왔습니다. 이 손으로 오늘의 문명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위대한 일 아닙니까. 우리의 손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이 손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 손으로 사람들은 모조품을 만들고 갈취를 하고 도둑질을 하고 파괴를 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손으로 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이 손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손의 역할은 참 대단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을 보면 참 위대하게 나타납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으로 행한 손의 사역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손”
눅 5:12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찾아와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손을 나병환자의 몸에 대십니다. 그랬더니 그 나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고 소망의 손입니다. 어떤 손은 파괴하는 손이 있습니다. 병들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아프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병을 낫게 하는 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 손으로 조용히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며 병자들을 고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몸속에서 병을 고치시고 병의 근원을 고치시고 병든 영을 고치시고 상한 내 마음을 고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은 고치시는 손입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신 손”
요 13:3-8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눈 후에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참 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면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금은 아주 심각하고 정신적으로 아주 복잡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에 자신의 인생 최후의 시간에 대야에 물을 떠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가장 심오한 교훈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세상은 지금 상당한 중증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온갖 불화와 갈등과 살인과 증오와 모략과 미움으로 가득합니다. 집안에도, 교회에도, 직장에도, 나라 안에도, 심지어는 내 마음에도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할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마 이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면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부간에 관계가 참 껄끄러운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며느리의 발을 씻기며 “어른스럽지 못한 부족한 나를 용서해라”하고 말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아마 모든 갈등은 순간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사람들은 평생 이 갈등과 불화 속에서 치유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지금 상당히 갈등 속에 있는 관계의 사람들일 경우 그중 한사람이 이렇게 상대방의 발을 씻겨준다면 그 갈등도 순간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최후의 순간에 마음도 분주하고 할 일도 많았을 텐데 구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방법이 모든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니까 그렇게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 발을 씻겨주신 손으로 우리들의 추한 마음, 더러워진 생각, 고집스런 마음과 흔적들을 씻기고 계실 것입니다.
“땅에 글씨 쓰심”
요 8:1-11을 보면 한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오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사회의 관습이고 율법의 정신입니다. 사람들이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께 보이며 이 여인을 죽일까요 살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난처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지금까지 말한 그의 사랑의 교훈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여인을 용서하라 하면 지금까지 부르짖었던 공의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고 엎드려 땅바닥에 글씨를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글자는 무슨 글자였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네 자신을 알라”고 쓰지 않았겠나 하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주 흥분했을 때 1분 2분만 진정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참지 못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살인하고 파괴하고 싸우고 막말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현대인들 보다 옛사람들이 참 지혜로웠습니다. 옛날 집 구조를 보면 반드시 집에는 문지방이 높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문이 없습니다. 반드시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마다 문지방이 높습니다. 방에서 마루로 나갈 때도 마루에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지방도 상당히 높습니다. 조심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 높은 문지방을 건너갈 때 분이 삭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숨 돌리게 되고 마음의 여과장치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혜로움 아닙니까.
예수님이 흥분해 있는 사람들에게 즉시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땅바닥에 글씨는 쓰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의 손끝으로 몰렸을 것입니다. 과연 무슨 글씨는 쓰며 무슨 대답이 나올 것인가 하고 급한 마음들이 상당히 누그러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 모두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될 즈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아주 침착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 있으면 이 여인을 치라.”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여인을 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들고 있던 돌을 놓고 한사람씩 그 현장을 빠져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주는 손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주고 정신에 여유를 주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조금도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이득만 보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고 분노하고 소리치고 주장하고 그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그 손길로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느끼게 하시고 돌아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주는 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
요 11:1을 보면 죽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뭍인지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 뭍인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으면 소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매장을 사흘 되는 날 하는 이유도 혹시 소생가능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미 나흘리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가서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외치십니다. 그러며 손짓하셨을 것입니다. 빨리 나오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죽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 예수님 손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시는 손입니다. 낙심해 있는 사람을 격려하시는 손입니다. 빈 그물을 가득 채워주시는 손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몸은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바쁘게 움직이고 계실 것입니다. 찾아가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소망을 일으키시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은 지금 여러분의 손도 그렇게 잡고 일으키시려 애쓰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은 살리시는 손입니다.
“축사하시는 손”
마 14:13을 보면 예수님은 들에서 오병이어의 아주 보잘 것 없는 내용물을 들고 축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5천명이 먹고 배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손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그리고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께 온 사람은 모두 소원을 이루고 돌아갔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모두 배부른 채 돌아갔습니다. 병든 자들은 병을 고치고 돌아갔습니다. 그 주님의 손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고치시고 먹이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은 지금도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시며 사역에 충실하십니다.
“그 시대 필요한 사람을 부르시는 손”
예수님은 그 손으로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들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로 가서 고기 잡던 베드로 형제와 요한형제를 불러 제자 삼았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 신실한 동역자들을 불러내서 제자 삼았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포악했던 사울을 불러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모두 순한 양 같은 사역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신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십니다. 누가 오늘 일할까, 누가 오늘 영혼구원을 위해서 나아갈까. 누가 오늘 열방으로 복음을 들고 나갈까. 누가 오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인가, 주님은 지금도 조용히 돌아다니며 당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고 다니십니다. 그렇게 부름 받아 주님의 손에 잡힌 사람들은 한결같이 큰일을 해 내는 충성된 사역자들이 다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해서 불러냄을 받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생각해보니 예수 믿으면 좋겠다 싶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보이지 않게 주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호령하시는 손”
예수님은 두 얼굴을 가지셨습니다. 한 얼굴은 아주 온화하고 용서하고 고치시고 살리시고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인자하신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고 인자하신 모습입니까. 그런데 또 한편의 예수님의 얼굴은 심판하시는 얼굴이고 호령하시는 얼굴이고 추상같이 분노하시는 얼굴입니다. 마 21:12절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때 성전 뜰은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의분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좌판을 뒤집어엎고 짐승 떼를 내 좇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기 띤 얼굴일 것이고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누고도 예수님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를 찾았으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나무를 저주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아주 추상같은 말씀으로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 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했습니다. “너는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얼마나 준엄한 심판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냥 서서 저주했겠습니까. 그 손가락을 뻗치며 질책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질책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아”, “화 있을 진저 눈먼 인도자들이여”,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 23:33절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뱀들아, 이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질책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렇게 말씀할 때 그냥 앉아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쳤겠습니까.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소리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의 손이 너무 무섭고 권위가 있고 그 모습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손입니다. 평소에는 그 손으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렸고 상한 자를 어루만져 위로하였고 병든 자를 만지며 고치셨고 슬픔 당한 자와 함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 자비로운 손길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인들을 향해서는 당장 벼락을 내리치실 것처럼 호령하시고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얼마나 추상같은 두려운 손가락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간담을 서늘케 했던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회개하고 깨우치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렇게 힘이 있던 예수의 손은 마침내 피를 흘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이 피 묻은 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손은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 손가락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잠만 자지 말고 깨어있으라, 네 영혼이 건강한가 한번 시험해 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손입니다. 이 손에 이끌리고 인도받고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그 손에 붙잡히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