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0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마태복음6:9-13)
최근에 이창동감독이 만든 영화 “밀양”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1985년 소설가 이청준선생의 단편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 이야기는 남편을 잃은 아내가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서 살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아내의 삶의 기쁨이었던 아들이 어느 날 유괴되어 살해됩니다. 이 절망의 자리에서 아내는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로 안정을 찾습니다. 자신을 교회로 인도했던 집사님으로부터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죄지은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대자뿐이며, 사람에게는 용사할 의무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는 이 말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마침내 결심하고 교도소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교도소 면회실에서 범인을 만난 아내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고 돌아 나와 말합니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러고 싶어도 이미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냐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용서할 결심을 하고 찾아가 만난 범인은, 교도소 안에서 예수를 믿고, 그 죄에 대해서 이미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한없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항변하는 아내의 삶은 타락으로 급전환합니다.
작가의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 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밀양’ · ‘벌레이야기’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친 주기도문 7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 가운데 ‘죄 용서를 위한 기도’는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순서상으로 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보다 나중에 나오지만, 강조의 수위를 보면 이 기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6:13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태복음6:14,15에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수없이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실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합니까?
1.먼저 이 기도의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기도는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 삶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거나, 하늘의 시민권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기도를 가르친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 이 기도를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그 자녀답게 사는 삶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 권세가 주님이 명하신 말씀을 이루지 못했다고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것저것 하라고 명령하였는데 하지 않을 때마다 너 호적에서 이름을 파내버린다고 한다면 누가 호적상으로 온전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너 정말 내 아들이 맞니?” 라고 되물으면서 “아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니니?”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3장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기시는데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발을 씻지 않으려고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자 베드로는 그렇다면 주님 발만 아니라, 목욕을 시켜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목욕과 발 씻음의 의미를 아십니까? 목욕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구원사건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손과 발을 씻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매일이 아니라, 자주, 아주 자주 손을 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일상의 삶에서 짓는 이런 저런 죄들을 손발을 씻듯 회개하고 용서받고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시민권이 박탈된다든지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구원과 관계되는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으로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합니다.
2.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할 죄들이 있습니다.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지만, 내 마음에 고통을 주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힘들게 하는 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없이 나 혼자서 지을 수 있는 죄입니다. 이런 죄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굳이 누구를 찾아가거나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당신을 몹시 마음으로 미워하였는데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믿음으로 용서하심을 받아들이고 잊어버리면 됩니다.
요한일서1:9에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런 경우에는 마치 손을 씻듯이 시간을 미루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와의 관계를 내가 회복하는 것이 됩니다. 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가하셔서 앉아서 할 일없이 저의 머리카락이나 세시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젯밤에 최목사 머리카락이 몇 개나 빠지고 또 몇 개나 났을까 해서 날마다 제 머리통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섬세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기도하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주 섬세하게 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아주 사소한 회개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3.우리 죄 중에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불이 영감이야기가 있습니다. 혹 떼러갔다가 혹 붙여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죄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서로 간에 해결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피해를 입혔다면 할 수 있는 대로 물질적인 보상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지금의 형편에서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차츰 차츰 갚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면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잘못이니 관계 속에서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에게 원망 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그 사람과 화해를 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도록 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실천함에 있어 우리는 대단히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이 죄임을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회개해야합니다. 비록 죄는 그 사람에게 지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실망시키고 아프게 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합니다. 충분히 용서받음을 확인해야합니다. 그리고 나로 인하여 상처 입은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서 용서를 구할 때에 그가 나의 용서를 받아주시도록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기도해야합니다.
그 다음에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아주 좋은 뜻으로 그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아서, 그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조치를 한다고 해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화해하러 갔다가 더 큰 불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회개하러 갔다가 죄만 더 짓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이만큼 했으면 당신도 용서를 해야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싸웁니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을 경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는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충분히 준비되고 난 다음, 성령님의 역사 속에 이 일이 이루어지면, 삶에 혁명적인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100년 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 바로 그런 역사였습니다.
하디선교사가 한국의 교인들을 무식하고, 신실하지 못하여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무시하였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다음 교인들 앞에서 회개할 때에 교이들도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대현 교회 길선주 장로가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하여 상처를 입힌 죄를 하나니 앞에서 회개하고 그 사람을 찾아가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 때 성령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내게 상처와 피해를 준 다른 사람의 죄가 있습니다.
1.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드리신 기도 중에 용서를 비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 그리고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 고통 중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7:60)
예수님과 스데반의 이 기도는 상대방이 행하고 있는 흉악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일방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가 죄인들이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일방적인 용서의 기도입니다.
2.상대방이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면 기꺼이 용서해야합니다.
한 교우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주님이 이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였는지,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떨립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괘심하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게 될 수 있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라면 용서가 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용서는 충분히 준비해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용서하겠다고 나섰다가는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먼저 내가 상처 입은 마음을 내어 놓고 하나님께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이 기도의 준비 없이 상대방이 와서 잘못했다며 사과한다고 금방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기 위하여 준비해야합니다.
마태복음18:23-35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종이 임금님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회계해야하는 시간에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 간절히 빕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다 갚겠습니다.” 이에 임금님이 그 종의 딱한 형편을 고려해서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 빚을 갚도록 독촉합니다. 그 사람이 엎드려 시간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그를 옥에 가두고 빚을 갚도록 다그쳤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그 종을 다시 불러들여서 감옥에 넣었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2,33)
이 말씀에서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 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씀이 임금과 종의 관계입니다. 만약에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라면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여 감옥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딸의 관계라면 다릅니다.
다른 하나는 용서의 과정입니다. 임금의 종이나, 이 종의 친구가 그 앞에서 간절히 용서를 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용서를 구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용서받을 의지도 없는 원수에게 용서할 사람이 스스로 찾아가서 내가 너를 용서 하려고 하는데 너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겠느냐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의 원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당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위한 모든 죄의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데 너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니?” 우리의 의사를 타진하신 다음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사랑을 다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회개하라 하십니다. 구하라 하십니다. 용서를 빌라 하십니다. 성전에 찾아와서 저 뒤편구석이지만 앉아서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고백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용서를 구하기조차 송구스러워 눈물만 흘리는 세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밀양” “벌레이야기”의 함정이 있습니다.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도된 믿음의 남용입니다. 충분히 내가 구원받고 용서받았으니 충분히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과신입니다. 교만이 낳은 슬픈 결과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용서를 빌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밀양은 상당히 신앙적인 것 같으나 비성경적인 신앙의 실수가 낳은 잘못입니다. 정작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용서하기 위하여 그를 찾아간들 싸움만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죄를 지은사람은 용서받을 생각도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도도하게 내가 그를 용서하겠다고 나서서 용서를 선언한들 그 용서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그리스도인은 용서에 대한 지나친 ‘의인 컴플렉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의 관계를 도리어 복잡하게 만듭니다. 용서를 증오로 변질시킵니다. 화해의 찬스를 더 큰 불화로 만들어갑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바르게 드려짐으로 날마다 정결한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닮아 갈 수 있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출처/최이우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