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0
용서하는 삶 (마 18:18)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극치가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이 땅에서 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풀고 살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이 땅에서 원수 맺고 살면 하늘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고 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용서에 대한 질문
본문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용서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범할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21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성경에 숫자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은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한 분밖에 안 계시는 하나님,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2'라는 숫자는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아담과 하와, 남자와 여자, 즉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4’라는 숫자는 땅을 의미합니다. 동서남북, 춘하추동, 네 생물(계 5:6)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5’라는 숫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6’은 사단의 파괴의 수입니다. 하나님은 열둘이라는 숫자로 건설해 가십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예수님의 12제자,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은 12진주 대문으로(계 21:21) 꾸며져 있으며, 그 성(城)은 일백사십사(12x12) 규빗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것을 파괴하여 꺾어버리면 ‘6’이라는 숫자가 됩니다. 사단의 수, 짐승의 수는 666(계 13:18)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7’이라는 숫자를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형제의 죄를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완전수 즉, 많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정도의 용서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이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70 x 7 = 490번을 용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끝없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용서가 아니라 끝없는 용서를 하라고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서울역 앞 남산 기슭으로 올라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돌로 지은 교회가 있는데 지금은 대우빌딩 때문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그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앞 게시판에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의 본문과 제목이 소개가 되어 있었는데, 수요예배의 설교 제목이 너무나도 재미있어 눈에 띄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18장 18절이고, 설교 제목은 “예수가 막걸리 보다 못한가?”였습니다. 너무나도 제목이 특이해서 그 곳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싸우고 원수지다가도 막걸리 한잔을 놓고 “너 한잔! 나 한잔!” 나누다 보면 화해가 되어 어깨동무를 하고 나오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번 원수지면 영원히 풀지 않으니, 예수가 막걸리 보다 못한가?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막걸리가 들어가면 화해가 되는데 예수가 들어가면 왜 화해를 못합니까? 우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끝없는 용서입니다.
본문 24~35절까지의 내용은 빚진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빚을 지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또 한 사람은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부채는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당시 장정 한 사람이 나가서 노동하면 하루의 품삯이 한 데나리온 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일평생 모아야 하는 돈이지만, 백 데나리온은 3개월 정도 모으면 갚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24~25절을 보면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부채가 얼마나 큰지 자신의 몸과 처와 자식들까지 노예로 팔아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갚을 능력이 없어 긍휼히 여긴 임금이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모두 일만 달란트 같은 죄 값을 다 사함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동관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졸들에게 붙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33~34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탕감해 주지 않다가 화를 당한 종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화를 당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용서(容恕)란 사전에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타인이 저지른 잘못이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났던 잘못의 종류라면 나는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나에게 잘못을 행하고 나서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나와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관계를 지속하도록 용서해야 합니다. 셋째는 내가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그 문제에 내가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용서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윗을 말할 때에 다윗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물매 돌을 들고 큰 골리앗 장군 앞에 나가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하나님 앞에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셋째로 다윗은 용서의 사람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후에 다윗의 인기는 점점 높이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 천 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하자 사울이 질투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한 사울을 용서합니다. 한번은 옷자락만(삼상 24:4)베었고, 또 한번은 창과 물병(삼상 26:12)만 가지고 왔으며, 그리고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왕자같이 대우(삼하 9:3)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극치가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이 땅에서 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풀고 살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이 땅에서 원수 맺고 살면 하늘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고 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용서에 대한 질문
본문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용서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범할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21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성경에 숫자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은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한 분밖에 안 계시는 하나님,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2'라는 숫자는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아담과 하와, 남자와 여자, 즉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4’라는 숫자는 땅을 의미합니다. 동서남북, 춘하추동, 네 생물(계 5:6)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5’라는 숫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6’은 사단의 파괴의 수입니다. 하나님은 열둘이라는 숫자로 건설해 가십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예수님의 12제자,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은 12진주 대문으로(계 21:21) 꾸며져 있으며, 그 성(城)은 일백사십사(12x12) 규빗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것을 파괴하여 꺾어버리면 ‘6’이라는 숫자가 됩니다. 사단의 수, 짐승의 수는 666(계 13:18)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7’이라는 숫자를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형제의 죄를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완전수 즉, 많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정도의 용서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이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70 x 7 = 490번을 용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끝없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용서가 아니라 끝없는 용서를 하라고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서울역 앞 남산 기슭으로 올라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돌로 지은 교회가 있는데 지금은 대우빌딩 때문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그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앞 게시판에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의 본문과 제목이 소개가 되어 있었는데, 수요예배의 설교 제목이 너무나도 재미있어 눈에 띄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18장 18절이고, 설교 제목은 “예수가 막걸리 보다 못한가?”였습니다. 너무나도 제목이 특이해서 그 곳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싸우고 원수지다가도 막걸리 한잔을 놓고 “너 한잔! 나 한잔!” 나누다 보면 화해가 되어 어깨동무를 하고 나오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번 원수지면 영원히 풀지 않으니, 예수가 막걸리 보다 못한가?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막걸리가 들어가면 화해가 되는데 예수가 들어가면 왜 화해를 못합니까? 우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끝없는 용서입니다.
본문 24~35절까지의 내용은 빚진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빚을 지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또 한 사람은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부채는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당시 장정 한 사람이 나가서 노동하면 하루의 품삯이 한 데나리온 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일평생 모아야 하는 돈이지만, 백 데나리온은 3개월 정도 모으면 갚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24~25절을 보면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부채가 얼마나 큰지 자신의 몸과 처와 자식들까지 노예로 팔아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갚을 능력이 없어 긍휼히 여긴 임금이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모두 일만 달란트 같은 죄 값을 다 사함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동관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졸들에게 붙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33~34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탕감해 주지 않다가 화를 당한 종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화를 당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용서(容恕)란 사전에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타인이 저지른 잘못이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났던 잘못의 종류라면 나는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나에게 잘못을 행하고 나서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나와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관계를 지속하도록 용서해야 합니다. 셋째는 내가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그 문제에 내가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용서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윗을 말할 때에 다윗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물매 돌을 들고 큰 골리앗 장군 앞에 나가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하나님 앞에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셋째로 다윗은 용서의 사람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후에 다윗의 인기는 점점 높이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 천 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하자 사울이 질투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한 사울을 용서합니다. 한번은 옷자락만(삼상 24:4)베었고, 또 한번은 창과 물병(삼상 26:12)만 가지고 왔으며, 그리고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왕자같이 대우(삼하 9:3)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