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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이단 분별
이글은 이단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단에 대해 올바른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별하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특정 교단중심적으로 작성된 글이 아니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관점으로 기술한것으로 생각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단'이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10월 28일로 못박아 놓은 잘못된 광신자들이 신앙적, 사회적으로 큰 무리를 일으킨바 있다. 이같은 일련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 등을 계기로 '이단'이란 낱말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세인(世人)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용어의 사용 빈도수와는 반비례로 그 의미는 갈수록 왜곡, 혼미해지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주 요인중의 하나가 기존 기독교계에 난무하는 이단에 대한 그릇된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고로 저울의 눈금이 잘못되면 올바른 판단과 거래의 공정성 또한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현 기독교계는 어떤 특별한 종파적 배경을 초월해서 순수하게 성경적 관점에서 본 이단의 정체를 밝힘과 아울러, 올바른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일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에 여기서는 이단의 정의, 신약에 나타난 이단들을 다룸과 동시에 이단에 대한 오해들을 상고함으로써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 한몫을 담당하고자한다.
1. 정의 - 이단이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현대 종교 연구 시리즈'를 펴냄으로써 일약 이단 문제의 권위자로 부곽된 죠쉬 멕도웰, 돈 스튜어트 두 교수는 '이단 종파'(Cults)에서 이단종파와 유사 종교들을 이같이 구분했다. 즉, "이방종교는 비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생되어온 불교, 유교등을 가리키고, 세속종교는 마르크스 주의 또는 세속적 인본주의 등을 일컫는다. 반면 이단 종파란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의 교훈을 배척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기독교 이단과 더불어 타종교와의 차이점을 지적한 적절한 분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본래 '이단'을 뜻하는 헬라어 '하이레시스'는 '선택'을 뜻하는 어휘로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을 좇는 당파나 학파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에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칭하고, 또한 나사렛 당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행 5:17,15:5, 26:5 등) 그러나 신약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는 '이단'이란 용어가 더욱 구체화되어 특별히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벗어난 이론과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키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독교 교회사를 통해 정의내릴 수 있다.
2. 신약에 나타난 이단들
여기서 우리가 제 1세기 당시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주요 이단들을 살펴보는 이유는, 곧 기독교 이단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주장하는 바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 변질된 신관을 주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 공격하는데, 예를 들면 인성과 신성을 공유하신 그분의 본성을 부정하고 중보자로서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그분의 부활과 재림등을 불신한다. 그리고 이단들은 구원관에 있어서 비성경적인 신비적 체험을 주장하고, 특히 행위를 통한 구원등을 강조한다. 덧붙여서 그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 교주를 부곽시켜 도덕적 타락을 야기시킨다.
가. 골로새서에 나타난 이단
(1) 영지주의 - 한마디로 "이원론, 즉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논리에 입각한 신비주의적 구원관을 소유한 이단"이다. 이들은 일종의 혼합주의 철학 사상으로서 모든 인류는 영적 계급, 정신적 계급, 물질적 계급 세가지로 나뉘며,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영적 계급만이 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적 세계는 30등급의아이온(aeons)으로 구성되며, 온 우주를 포괄하는 최고의 절대자는 설명될 수 없는 분으로 '신적 충만'(헬, 플레로마), 즉 신령한 빛 가운데 거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결코 성육신 하신 것이 아니라, 천상의 가장 밝은 아이온으로서 잠시 인간 예수의 몸을 빌어 활동하다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천상 세계로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는 신성은 육체와 같은 물질과 결코 연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부활도 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같은 거짓된 사상이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일부 성도들을 미혹시키려들자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이를 공박하였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2:8)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신적 충만'이 완전히 그분 안에서 실체화되었으며(1:16-18,2:9-10), 십자가에서 육체의 죽으심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역설하였다(1:20-22) 그는 또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도 주님의 재림 때 부활하게 될 것임을 골로새 성도들에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3:1-4)
(2) 천사숭배 - 영지주의와 연계해서 골로새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 사상 중의 다른 하나는 천사 숭배였다. 이들은 사람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직접 경배하는 것은 교만하므로 그분보다 열등한 존재인 천사를 경배해야 하며, 그것이 곧 겸손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같은 사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중심의 신앙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복음과 그의미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같은 사상이 헛된 과장이요, 하늘의 상급을 상실케 하는 거짓 교리임을 단호하게 지적하였다(2:18-19).
(3) 금욕주의 - 당시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초등학문 중의 하나로 단죄했던 바, 금욕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2:20-23) 이 사상의 특징은 1:21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 근접, 인정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제반 규율을 강조했다. 물론 경건한 삶을 위한 적절한 금욕과 절제는 미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금욕적인 제반 규율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지지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은 곧 이방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욕 및 고행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나.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이단적 교훈
한 마디로 행위를 강조한 율법주의를 가리킨다. 즉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사상이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 유대 종교에 익숙해 있는 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이론으로서 A.D.56년 경에 씌여진 갈라디아 서신을 살펴보면, 이미 그 교회 안에 침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이같은 행위 강조의 율법주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행위를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범죄한 후에 취한 최초의 행위는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새를 치장한 것이었다.(창 3:7)
양심의 고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은폐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온 인류가 답습한 행위 종교의 효시이다. 그리하여 이 행위 종교는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가인의 제사로 계승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범죄한 결과로서 이미 저주 받은 땅의 열매로 제사를 드렸다.(창3:17) 그런데 주목해 보라. 창세기에서 '땅이 저주받았다.'는 표현이 갈라디아에서 율법 행위 아래있는 자들이 '저주아래 있다.'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는 점을!
요건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 양과 기름으로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땅의 소산, 즉 범죄한 인간의 행위 종교와 노력의 산물을 바친 가인의 인간 공로 제사는 열납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창4:1-5) 더 나아가 이 율법주의는,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 발전되었는 바 율법주의 자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한 소치였다. 율법의 주된 의의는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므로서 구속자를 갈망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헬라의 부유층 자제를 훈육하는 가정교사로서 자제들을 학교에 까지 인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함)이 되어, 모든 죄인들의 구주되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게 한다.(갈3:19,24, 롬3:20,7:7이하)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는 도덕법과 의식법이 있어 의식법은 폐해졌으나 도덕법은 그 효력을 계속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탁월한 성경 교사로 기독교계에 알려진 독일의 에릭 사우어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율법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불가분의 단일체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법법한 자가 되나니(혹은 율법 전부를 지킬 책임이 있으니)(약 2:10, 갈 3:10). 그러므로 도덕적인 율법과 의식적인 율법을 구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의식적인 법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으며, 도덕적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도 성취되지 아니해서 지금도 꼭 준수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등 마치 두개의 율법처럼 만들기 때문이다"(세계 구속의 여명, 에릭 사우어 저, 권혁봉 역, 생명의 말씀사 P.243)
실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완전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로서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다.(갈 3:19)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사 친히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14).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렇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를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은 자이다.(롬7:4) 결국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소욕을 부정하고 성령의 인도함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권고받고 있다.(롬 8:4-6, 갈 5:16-26) 그러나 사실상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법 아래 삶으로서 율법 아래 살 때보다 더 거룩하고 수준 높은 경건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다. 요한 서신에 나타난 이단
제 1세기 말엽에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성육신(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같은 이단 사상을 일컬어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른다. 이 가현설 추종자들은 여러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약간의 강조점을 달리한다. 그 중 사도 요한과 동시대에 살았던 세린투스(Cerinthus)가 주도했던 학파는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인간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위헤 임하였다가 그가 십자가 상에서 죽을 때 그에게서 떠났다."고 까지 주장했다. 또 다른 학파는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히 허상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은 허상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또 어떤 이들은 "실제로 못박혔던 인물은 구레네 시몬이었으며, 당시 예수님은 안전한 장소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보셨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서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강조 용법을 사용하여 말씀이신 그리스도게서 실제 인간이 되셨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요일 5:6)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뿐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도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그분은 세례받으신 그분과 동일하게 진실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초대교회 역사, F.F 부르스저, 서영일 역,기독교 문서 선교회, P.313).
이제 다시금 노 사도 요한의 예언적 말씀에 귀를 기울려 보자.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2:22-23)
라. 베드로 서신에 나타난 이단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바로 실현되지 않게 되자 즉시 재림의 약속은 사람들이 고의로 만들어 낸 거짓말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들이 이들과 합세하여 하나님을 오해케 하고 십자가 상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대항하였다. 그 결과 부도덕한 성 범죄를 합리화 시키는 등 성도들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간교한 말로서 재물을 탈취하였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재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해 직접 들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강조하였다.(벧후 1: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실랄하게 비난하면서 그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내려질 것임을 선고하고, 한편으론 성도들이 이들에게 미혹당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벧후 2:1-20).
실상 예나 지금이나 재림시기에 대한 오해 로 숱한 이단들이 출현,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파멸로 끌고 갔다. 그런데 여기서 재림과 관련해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실상 재림의 시기를 오해하므로 생기게 된 이단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단의 간교한 궤계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즉 번번히 빗나간 시한부 종말론 등으로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를 완전히 부인하도록 획책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소망 중의 하나인 휴거 일시(日時)는 정확히 우리가 모르나 그분의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며(살전4:13-18), 그것도 잠시 잠깐 후면 오실 것이다.(히10:37)고로 그분의 강림 때 "주 앞에 흠도 없고 점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위해 그분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삶이 절실이 요청됨을 기억하자.
3. 이단에 대한 오해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약 이천년 정도를 지나오면서 순례하는 교회로서 모진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때로 참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박해를 받아 왔는가 하면, 역으로 거짓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정통 신앙의 고수자로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에 여기서는 이단에 대한 오해 및 잘못된 판단들과 그 문제점 등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이단에 대한 그릇된 판단 기준을 살펴보자.
가. 기존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교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도는 한국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경우 교인기리 만나면 최초로 던지는 질문이 '무슨 교파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느냐'이다. 이는 물론 쉽게 이단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라고 긍정적으로 보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중생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교제가 어느 교파 소속 교인인가 보다 훨신 중차대한 문제이다. 교파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끗느 교파에 소속되었으며, 그가 오늘날 이곳에 있다면 무슨 교파를 지지했을 것 같냐?' 반문하고 싶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파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을 감지 통탄한 바 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한 자라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2-13)
요컨대, 기존 교단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면 무조건 잘못된 교회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기실 미국 기독교계의 경우 기존 교단에 속하지 않아도 정통 신앙을 고수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들이 많다. 이같은 교회를 일컬어 '독립 교회'(Independent Church)라 부른다. 요즘 미국의 유명한 방송 설교자, 강해 설교자 중의 한 분으로서 <두란노 서원>과 <생명의 말씀사>의 번역서를 통해 한국 교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목회하는 '은혜 공동체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의 경우를 보자. 그 교회는 어떤 특정 교파에 소속 되지 않으나 2만 가량의 교인을 둔 교회로 미국에서 여타 교회의 귀감을 손꼽히는 교회 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와 비슷하게 독립 교회를 하면서 미국 기독교게, 그리고 한국에도 '영적싸움', '그리스도의 지체'등의 역서로 잘 알려진 레이 스테더만(Ray Stedman)이 목회하는 '반도 성서 교회'(Peninsula Bible Church)를 보자. 이 교회 역시 기존 교파와 무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교파를 초월해서 모이고 있는 수 많은 독립교회가 결코 이단의 시비를 받아본 적이 없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기서 한국 교계에 잘 알려진 전도자요 선교 학자로서, 교인 한 가정에 한 사람 꼴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바 있는 캐나다의 '민중 교회'(Peaple's Church)의 목회자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의 글을 되새겨 보자.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거기서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오순절교인, 플리머스 형제단, 성결교인 등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만 상봉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저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중에서)
나. 집회 시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물론 과거 사도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도 신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에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및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 또한 성령의 역사와 교회 성도 간의 친교, 사죄와 성도의 몸의 부활, 영생 등, 이 모든 주제들은 신구약 전반에 걸친 기독교 핵심 교리이다. 게다가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서 제시한 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 동안 간구해야할 기도의 요약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규 집회시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그릇된 판단 기준이 문제인 것이다.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그릇된 잣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도 신경은 단순한 암송의 단계를 넘어서 성도 전 생애를 통한 일관된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단지 자기 중심적인 기도만 일삼는 무리에게 기도의 내용과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되어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바, 성도 전 생애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기도 제목이자 약속이다. 사실상 집회 시간마다 이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과 그것을 삶 속에서 믿고 실천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요컨대, 마음으로 깊게 동의 하거나 신뢰하지 않고서도 일사천리로 줄줄이 그것을 암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 상담 경험을 통해서 하는 말이다. 물론 암송할 뿐더러 암송한대로 믿고 실천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같이 외모만 보고 사람들과 모임을 판단하는 일은 진정 무지의 소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 강단 휘장에 십자가 상징물이 없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차제에 또 한번 유치한 내용 같지만, 다루어 보자. 사실 '십자가 상징물이 없으면 이단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 보았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십자가 없는 교리와 교훈은 곧 전통 기독교 신앙을 떠난 자유주의 사상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고로 십자가는 구약의 온전한 성취인 신약 전반에 깊게 깔려 있는 바, 전통 신앙의 토대이자 주춧돌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 로마 법으로 어떤 죄인을 극형에 처할 때 쓰는 처형틀로서 저주받은 것을 상징했다(신 21:23, 갈 3:13). 실로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해주셨다(고후 5:18-21).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몸에 걸치고 다니는 악세사리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은 성도가 전 생애를 통해서 증거해야 할 전도의 중심 내용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 더 나아가 십자가는 우상으로 전락해서도 안된다. 아니, 십자가가 우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불행스럽게도 그럴 수 있다. 구약의 유다 왕 히스기야는 왕으로 등극한 후 곧 바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그때 그는 거의 만든지 800여년 간이나 된 모세가 만든 놋벰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향하고 우상숭배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수고 단지 '놋 조각'이라 칭하였다.(왕하18:4) 놋뱀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진대 십자가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로마 카톨릭은 그같은 죄악을 십 수세기 동안 자행해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심령에 십자가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그가 다니는 예배당 건물에 십자가 상징물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차대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멋진 십자가 상징물을 세운 예배당에 출석하면서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피뿌림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한 자들이 받을 형벌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강조하되,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십자가를 강조하고 전파하라.
라. 영원한 속죄(구속)를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견해
사단이 극히 간교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드는 기독교 진리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현대 기독교계를 향한 사단의 이같은 전술전략은 가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자신의 구원에 관한 올바른 확신도 없이 교회에서의 여러 봉사에 온 정성을 쏟고 있으니 말이다. 사단은, 소위 은사 체험, 즉 방언, 예언, 환상 등에 몰두하고, 병을 치유하는 등 신유집회에 관심을 쏟거나 귀신을 쫏아내는 귀신론 교리에 집중하는 자들을 결코 경계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서도 그같은 신비적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방 종교인 이슬람교도나 기독교 이단 중 하나인 몰몬교(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들도 방언 등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중병을 치료받은 기적은 자랑하지만 막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는 모르거나 거절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단은 인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평가절하시키려고 획책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극소화 시키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우리 지난 날의 죄는 완전히 처리했으나 현재 범하는 죄는 자신의 회개를 통하여 해결, 구원 받는다는 식의 변질된 복음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있다. 이 같은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이 죄책감에 괴로워 하고 탄식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같은 가르침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가히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주어진 노력의 댓가라고 본문의 내용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결국 사도 바울의 구원관을 반박하는 행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실상 그리스도의 공로가 지난 날의 죄는 해결해 주었지만, 현재 살면서 짓는 죄는 그때마다 회개하므로써 용서를 받아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만일 회개하지 못한 죄가 티끌만큼이라도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반감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밝히 말하기를, 구원은 우리 행위(회개하는 행위 조차라도)가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선물임을 명백하게 선포한다.(요 5:24, 롬 3:23, 24, 28, 4:5, 딛 3:5, 유 1:3) 주님은 온 인류의 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약 이천년전에 해결해 주셨다. 우리의 죄값을 다 갚아 주신 것이다(요 19:30). '다 이루었다'의 원어적 의미는 '다 갚았다'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구속)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여기 히브리서 9:12의 영원한 '속죄'는 구속(Redemption)이란 뜻인데, 이에 대해 금세기의 탁월한 강해 선교자로 알려진 바 있는 마틴 로이드 죤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구속이란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서 7회, 히브리서 2회, 누가복음에서 1회, 이렇게 해서 신약 전체에 10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구속'이란 값을 지불한 결과로서 해방을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마귀의 노예인 우리를 속(贖)하여 인도하여 내기 위해 오셨고 또한 그는 값을 지불하셨다. 고로 우리가 마귀로 인하여 포로로 갇혀 있던 감옥은 열리고, 노예였던 우리는 자유롭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자기의 공로로 우리를 사시고 자유롭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단번에 용서함 받았고 오직 그분에 의해 사단의 능력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 강해 1, 로이드 죤스 저, 서문강 역, CLC, P85,87)
따라서 구원받은 것(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근거로 믿음을 통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회개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강조하는 바이다. 이에 대해 확실히 해 두고자 다른 분의 견해를 살펴보자. 성경 교사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윌리암 맥도날드는 신약 주석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주님께서는 갈보리에서 구속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단번에(once for all)란 용어를 보면서 도저히 기쁨을 멈출 수 없다. 주님은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영원히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제 주님의 피는 그 효력이 무궁무진 하다. 따라서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의 죄,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죄,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게 될 사람들의 죄를 깨끗케 하기에 충분하다"(Believer's Bible Commentary, Nelson, P.1001)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현재 살면서 범하는 죄에 대해 자백과 아울러 회개하는(죄에서 돌아서는 행위) 삶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회개라는 반복적인 행위가 구원의 조건인 양 가르치는 교훈이 비성서적이라는 뜻이다. 반복하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과거에만 적용되고, 현재의 범죄는 자신의 회개라는 수단과 행위를 통해서 결국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면서 자백(혹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빛 가운데 계신 주님과 동행하려면 이같은 삶이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한 번 구원받은 자녀의 신분은 만에 하나 그가 범죄했더라도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범죄할 때 곧바로 주님과의 교제가 깨져 영적 상태가 악화 될 수는 있다. 따라서 속히 죄악을 토설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 형제들이여!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
4. 결 론
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 가운데 중요한 교리들을 더듬어 보았고, 또한 현대 한국 기독교계가 이단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있는 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미 성서적인 정통 신앙을 떠난 이단들, 예컨대 컨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등과, 교주들을 중심으로 새로 생긴 신흥종교나 재림의 날자를 지적하는 그릇된 종말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재론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 이곳에는 다루지 않았다. 사실상 여기서는 한국 기독교계 중, 기존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나 성경적인 정통신앙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 기존 교파에 소속한 사람들의 섣부른 정죄와 그 기준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므로써 올바른 분별력을 갖도록 시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특정 교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나 묵묵히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하게 믿고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고 격려하려 하였다.
이글은 이단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단에 대해 올바른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별하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특정 교단중심적으로 작성된 글이 아니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관점으로 기술한것으로 생각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단'이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10월 28일로 못박아 놓은 잘못된 광신자들이 신앙적, 사회적으로 큰 무리를 일으킨바 있다. 이같은 일련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 등을 계기로 '이단'이란 낱말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세인(世人)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용어의 사용 빈도수와는 반비례로 그 의미는 갈수록 왜곡, 혼미해지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주 요인중의 하나가 기존 기독교계에 난무하는 이단에 대한 그릇된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고로 저울의 눈금이 잘못되면 올바른 판단과 거래의 공정성 또한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현 기독교계는 어떤 특별한 종파적 배경을 초월해서 순수하게 성경적 관점에서 본 이단의 정체를 밝힘과 아울러, 올바른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일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에 여기서는 이단의 정의, 신약에 나타난 이단들을 다룸과 동시에 이단에 대한 오해들을 상고함으로써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 한몫을 담당하고자한다.
1. 정의 - 이단이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현대 종교 연구 시리즈'를 펴냄으로써 일약 이단 문제의 권위자로 부곽된 죠쉬 멕도웰, 돈 스튜어트 두 교수는 '이단 종파'(Cults)에서 이단종파와 유사 종교들을 이같이 구분했다. 즉, "이방종교는 비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생되어온 불교, 유교등을 가리키고, 세속종교는 마르크스 주의 또는 세속적 인본주의 등을 일컫는다. 반면 이단 종파란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의 교훈을 배척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기독교 이단과 더불어 타종교와의 차이점을 지적한 적절한 분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본래 '이단'을 뜻하는 헬라어 '하이레시스'는 '선택'을 뜻하는 어휘로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을 좇는 당파나 학파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에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칭하고, 또한 나사렛 당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행 5:17,15:5, 26:5 등) 그러나 신약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는 '이단'이란 용어가 더욱 구체화되어 특별히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벗어난 이론과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키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독교 교회사를 통해 정의내릴 수 있다.
2. 신약에 나타난 이단들
여기서 우리가 제 1세기 당시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주요 이단들을 살펴보는 이유는, 곧 기독교 이단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주장하는 바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 변질된 신관을 주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 공격하는데, 예를 들면 인성과 신성을 공유하신 그분의 본성을 부정하고 중보자로서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그분의 부활과 재림등을 불신한다. 그리고 이단들은 구원관에 있어서 비성경적인 신비적 체험을 주장하고, 특히 행위를 통한 구원등을 강조한다. 덧붙여서 그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 교주를 부곽시켜 도덕적 타락을 야기시킨다.
가. 골로새서에 나타난 이단
(1) 영지주의 - 한마디로 "이원론, 즉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논리에 입각한 신비주의적 구원관을 소유한 이단"이다. 이들은 일종의 혼합주의 철학 사상으로서 모든 인류는 영적 계급, 정신적 계급, 물질적 계급 세가지로 나뉘며,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영적 계급만이 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적 세계는 30등급의아이온(aeons)으로 구성되며, 온 우주를 포괄하는 최고의 절대자는 설명될 수 없는 분으로 '신적 충만'(헬, 플레로마), 즉 신령한 빛 가운데 거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결코 성육신 하신 것이 아니라, 천상의 가장 밝은 아이온으로서 잠시 인간 예수의 몸을 빌어 활동하다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천상 세계로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는 신성은 육체와 같은 물질과 결코 연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부활도 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같은 거짓된 사상이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일부 성도들을 미혹시키려들자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이를 공박하였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2:8)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신적 충만'이 완전히 그분 안에서 실체화되었으며(1:16-18,2:9-10), 십자가에서 육체의 죽으심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역설하였다(1:20-22) 그는 또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도 주님의 재림 때 부활하게 될 것임을 골로새 성도들에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3:1-4)
(2) 천사숭배 - 영지주의와 연계해서 골로새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 사상 중의 다른 하나는 천사 숭배였다. 이들은 사람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직접 경배하는 것은 교만하므로 그분보다 열등한 존재인 천사를 경배해야 하며, 그것이 곧 겸손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같은 사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중심의 신앙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복음과 그의미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같은 사상이 헛된 과장이요, 하늘의 상급을 상실케 하는 거짓 교리임을 단호하게 지적하였다(2:18-19).
(3) 금욕주의 - 당시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초등학문 중의 하나로 단죄했던 바, 금욕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2:20-23) 이 사상의 특징은 1:21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 근접, 인정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제반 규율을 강조했다. 물론 경건한 삶을 위한 적절한 금욕과 절제는 미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금욕적인 제반 규율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지지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은 곧 이방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욕 및 고행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나.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이단적 교훈
한 마디로 행위를 강조한 율법주의를 가리킨다. 즉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사상이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 유대 종교에 익숙해 있는 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이론으로서 A.D.56년 경에 씌여진 갈라디아 서신을 살펴보면, 이미 그 교회 안에 침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이같은 행위 강조의 율법주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행위를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범죄한 후에 취한 최초의 행위는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새를 치장한 것이었다.(창 3:7)
양심의 고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은폐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온 인류가 답습한 행위 종교의 효시이다. 그리하여 이 행위 종교는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가인의 제사로 계승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범죄한 결과로서 이미 저주 받은 땅의 열매로 제사를 드렸다.(창3:17) 그런데 주목해 보라. 창세기에서 '땅이 저주받았다.'는 표현이 갈라디아에서 율법 행위 아래있는 자들이 '저주아래 있다.'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는 점을!
요건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 양과 기름으로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땅의 소산, 즉 범죄한 인간의 행위 종교와 노력의 산물을 바친 가인의 인간 공로 제사는 열납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창4:1-5) 더 나아가 이 율법주의는,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 발전되었는 바 율법주의 자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한 소치였다. 율법의 주된 의의는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므로서 구속자를 갈망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헬라의 부유층 자제를 훈육하는 가정교사로서 자제들을 학교에 까지 인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함)이 되어, 모든 죄인들의 구주되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게 한다.(갈3:19,24, 롬3:20,7:7이하)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는 도덕법과 의식법이 있어 의식법은 폐해졌으나 도덕법은 그 효력을 계속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탁월한 성경 교사로 기독교계에 알려진 독일의 에릭 사우어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율법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불가분의 단일체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법법한 자가 되나니(혹은 율법 전부를 지킬 책임이 있으니)(약 2:10, 갈 3:10). 그러므로 도덕적인 율법과 의식적인 율법을 구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의식적인 법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으며, 도덕적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도 성취되지 아니해서 지금도 꼭 준수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등 마치 두개의 율법처럼 만들기 때문이다"(세계 구속의 여명, 에릭 사우어 저, 권혁봉 역, 생명의 말씀사 P.243)
실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완전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로서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다.(갈 3:19)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사 친히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14).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렇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를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은 자이다.(롬7:4) 결국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소욕을 부정하고 성령의 인도함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권고받고 있다.(롬 8:4-6, 갈 5:16-26) 그러나 사실상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법 아래 삶으로서 율법 아래 살 때보다 더 거룩하고 수준 높은 경건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다. 요한 서신에 나타난 이단
제 1세기 말엽에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성육신(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같은 이단 사상을 일컬어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른다. 이 가현설 추종자들은 여러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약간의 강조점을 달리한다. 그 중 사도 요한과 동시대에 살았던 세린투스(Cerinthus)가 주도했던 학파는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인간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위헤 임하였다가 그가 십자가 상에서 죽을 때 그에게서 떠났다."고 까지 주장했다. 또 다른 학파는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히 허상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은 허상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또 어떤 이들은 "실제로 못박혔던 인물은 구레네 시몬이었으며, 당시 예수님은 안전한 장소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보셨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서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강조 용법을 사용하여 말씀이신 그리스도게서 실제 인간이 되셨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요일 5:6)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뿐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도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그분은 세례받으신 그분과 동일하게 진실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초대교회 역사, F.F 부르스저, 서영일 역,기독교 문서 선교회, P.313).
이제 다시금 노 사도 요한의 예언적 말씀에 귀를 기울려 보자.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2:22-23)
라. 베드로 서신에 나타난 이단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바로 실현되지 않게 되자 즉시 재림의 약속은 사람들이 고의로 만들어 낸 거짓말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들이 이들과 합세하여 하나님을 오해케 하고 십자가 상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대항하였다. 그 결과 부도덕한 성 범죄를 합리화 시키는 등 성도들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간교한 말로서 재물을 탈취하였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재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해 직접 들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강조하였다.(벧후 1: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실랄하게 비난하면서 그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내려질 것임을 선고하고, 한편으론 성도들이 이들에게 미혹당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벧후 2:1-20).
실상 예나 지금이나 재림시기에 대한 오해 로 숱한 이단들이 출현,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파멸로 끌고 갔다. 그런데 여기서 재림과 관련해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실상 재림의 시기를 오해하므로 생기게 된 이단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단의 간교한 궤계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즉 번번히 빗나간 시한부 종말론 등으로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를 완전히 부인하도록 획책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소망 중의 하나인 휴거 일시(日時)는 정확히 우리가 모르나 그분의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며(살전4:13-18), 그것도 잠시 잠깐 후면 오실 것이다.(히10:37)고로 그분의 강림 때 "주 앞에 흠도 없고 점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위해 그분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삶이 절실이 요청됨을 기억하자.
3. 이단에 대한 오해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약 이천년 정도를 지나오면서 순례하는 교회로서 모진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때로 참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박해를 받아 왔는가 하면, 역으로 거짓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정통 신앙의 고수자로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에 여기서는 이단에 대한 오해 및 잘못된 판단들과 그 문제점 등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이단에 대한 그릇된 판단 기준을 살펴보자.
가. 기존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교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도는 한국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경우 교인기리 만나면 최초로 던지는 질문이 '무슨 교파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느냐'이다. 이는 물론 쉽게 이단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라고 긍정적으로 보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중생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교제가 어느 교파 소속 교인인가 보다 훨신 중차대한 문제이다. 교파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끗느 교파에 소속되었으며, 그가 오늘날 이곳에 있다면 무슨 교파를 지지했을 것 같냐?' 반문하고 싶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파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을 감지 통탄한 바 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한 자라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2-13)
요컨대, 기존 교단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면 무조건 잘못된 교회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기실 미국 기독교계의 경우 기존 교단에 속하지 않아도 정통 신앙을 고수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들이 많다. 이같은 교회를 일컬어 '독립 교회'(Independent Church)라 부른다. 요즘 미국의 유명한 방송 설교자, 강해 설교자 중의 한 분으로서 <두란노 서원>과 <생명의 말씀사>의 번역서를 통해 한국 교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목회하는 '은혜 공동체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의 경우를 보자. 그 교회는 어떤 특정 교파에 소속 되지 않으나 2만 가량의 교인을 둔 교회로 미국에서 여타 교회의 귀감을 손꼽히는 교회 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와 비슷하게 독립 교회를 하면서 미국 기독교게, 그리고 한국에도 '영적싸움', '그리스도의 지체'등의 역서로 잘 알려진 레이 스테더만(Ray Stedman)이 목회하는 '반도 성서 교회'(Peninsula Bible Church)를 보자. 이 교회 역시 기존 교파와 무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교파를 초월해서 모이고 있는 수 많은 독립교회가 결코 이단의 시비를 받아본 적이 없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기서 한국 교계에 잘 알려진 전도자요 선교 학자로서, 교인 한 가정에 한 사람 꼴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바 있는 캐나다의 '민중 교회'(Peaple's Church)의 목회자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의 글을 되새겨 보자.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거기서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오순절교인, 플리머스 형제단, 성결교인 등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만 상봉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저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중에서)
나. 집회 시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물론 과거 사도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도 신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에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및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 또한 성령의 역사와 교회 성도 간의 친교, 사죄와 성도의 몸의 부활, 영생 등, 이 모든 주제들은 신구약 전반에 걸친 기독교 핵심 교리이다. 게다가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서 제시한 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 동안 간구해야할 기도의 요약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규 집회시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그릇된 판단 기준이 문제인 것이다.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그릇된 잣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도 신경은 단순한 암송의 단계를 넘어서 성도 전 생애를 통한 일관된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단지 자기 중심적인 기도만 일삼는 무리에게 기도의 내용과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되어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바, 성도 전 생애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기도 제목이자 약속이다. 사실상 집회 시간마다 이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과 그것을 삶 속에서 믿고 실천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요컨대, 마음으로 깊게 동의 하거나 신뢰하지 않고서도 일사천리로 줄줄이 그것을 암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 상담 경험을 통해서 하는 말이다. 물론 암송할 뿐더러 암송한대로 믿고 실천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같이 외모만 보고 사람들과 모임을 판단하는 일은 진정 무지의 소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 강단 휘장에 십자가 상징물이 없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차제에 또 한번 유치한 내용 같지만, 다루어 보자. 사실 '십자가 상징물이 없으면 이단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 보았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십자가 없는 교리와 교훈은 곧 전통 기독교 신앙을 떠난 자유주의 사상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고로 십자가는 구약의 온전한 성취인 신약 전반에 깊게 깔려 있는 바, 전통 신앙의 토대이자 주춧돌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 로마 법으로 어떤 죄인을 극형에 처할 때 쓰는 처형틀로서 저주받은 것을 상징했다(신 21:23, 갈 3:13). 실로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해주셨다(고후 5:18-21).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몸에 걸치고 다니는 악세사리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은 성도가 전 생애를 통해서 증거해야 할 전도의 중심 내용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 더 나아가 십자가는 우상으로 전락해서도 안된다. 아니, 십자가가 우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불행스럽게도 그럴 수 있다. 구약의 유다 왕 히스기야는 왕으로 등극한 후 곧 바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그때 그는 거의 만든지 800여년 간이나 된 모세가 만든 놋벰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향하고 우상숭배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수고 단지 '놋 조각'이라 칭하였다.(왕하18:4) 놋뱀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진대 십자가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로마 카톨릭은 그같은 죄악을 십 수세기 동안 자행해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심령에 십자가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그가 다니는 예배당 건물에 십자가 상징물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차대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멋진 십자가 상징물을 세운 예배당에 출석하면서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피뿌림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한 자들이 받을 형벌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강조하되,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십자가를 강조하고 전파하라.
라. 영원한 속죄(구속)를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견해
사단이 극히 간교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드는 기독교 진리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현대 기독교계를 향한 사단의 이같은 전술전략은 가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자신의 구원에 관한 올바른 확신도 없이 교회에서의 여러 봉사에 온 정성을 쏟고 있으니 말이다. 사단은, 소위 은사 체험, 즉 방언, 예언, 환상 등에 몰두하고, 병을 치유하는 등 신유집회에 관심을 쏟거나 귀신을 쫏아내는 귀신론 교리에 집중하는 자들을 결코 경계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서도 그같은 신비적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방 종교인 이슬람교도나 기독교 이단 중 하나인 몰몬교(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들도 방언 등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중병을 치료받은 기적은 자랑하지만 막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는 모르거나 거절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단은 인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평가절하시키려고 획책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극소화 시키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우리 지난 날의 죄는 완전히 처리했으나 현재 범하는 죄는 자신의 회개를 통하여 해결, 구원 받는다는 식의 변질된 복음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있다. 이 같은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이 죄책감에 괴로워 하고 탄식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같은 가르침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가히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주어진 노력의 댓가라고 본문의 내용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결국 사도 바울의 구원관을 반박하는 행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실상 그리스도의 공로가 지난 날의 죄는 해결해 주었지만, 현재 살면서 짓는 죄는 그때마다 회개하므로써 용서를 받아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만일 회개하지 못한 죄가 티끌만큼이라도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반감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밝히 말하기를, 구원은 우리 행위(회개하는 행위 조차라도)가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선물임을 명백하게 선포한다.(요 5:24, 롬 3:23, 24, 28, 4:5, 딛 3:5, 유 1:3) 주님은 온 인류의 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약 이천년전에 해결해 주셨다. 우리의 죄값을 다 갚아 주신 것이다(요 19:30). '다 이루었다'의 원어적 의미는 '다 갚았다'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구속)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여기 히브리서 9:12의 영원한 '속죄'는 구속(Redemption)이란 뜻인데, 이에 대해 금세기의 탁월한 강해 선교자로 알려진 바 있는 마틴 로이드 죤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구속이란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서 7회, 히브리서 2회, 누가복음에서 1회, 이렇게 해서 신약 전체에 10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구속'이란 값을 지불한 결과로서 해방을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마귀의 노예인 우리를 속(贖)하여 인도하여 내기 위해 오셨고 또한 그는 값을 지불하셨다. 고로 우리가 마귀로 인하여 포로로 갇혀 있던 감옥은 열리고, 노예였던 우리는 자유롭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자기의 공로로 우리를 사시고 자유롭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단번에 용서함 받았고 오직 그분에 의해 사단의 능력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 강해 1, 로이드 죤스 저, 서문강 역, CLC, P85,87)
따라서 구원받은 것(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근거로 믿음을 통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회개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강조하는 바이다. 이에 대해 확실히 해 두고자 다른 분의 견해를 살펴보자. 성경 교사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윌리암 맥도날드는 신약 주석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주님께서는 갈보리에서 구속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단번에(once for all)란 용어를 보면서 도저히 기쁨을 멈출 수 없다. 주님은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영원히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제 주님의 피는 그 효력이 무궁무진 하다. 따라서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의 죄,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죄,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게 될 사람들의 죄를 깨끗케 하기에 충분하다"(Believer's Bible Commentary, Nelson, P.1001)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현재 살면서 범하는 죄에 대해 자백과 아울러 회개하는(죄에서 돌아서는 행위) 삶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회개라는 반복적인 행위가 구원의 조건인 양 가르치는 교훈이 비성서적이라는 뜻이다. 반복하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과거에만 적용되고, 현재의 범죄는 자신의 회개라는 수단과 행위를 통해서 결국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면서 자백(혹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빛 가운데 계신 주님과 동행하려면 이같은 삶이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한 번 구원받은 자녀의 신분은 만에 하나 그가 범죄했더라도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범죄할 때 곧바로 주님과의 교제가 깨져 영적 상태가 악화 될 수는 있다. 따라서 속히 죄악을 토설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 형제들이여!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
4. 결 론
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 가운데 중요한 교리들을 더듬어 보았고, 또한 현대 한국 기독교계가 이단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있는 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미 성서적인 정통 신앙을 떠난 이단들, 예컨대 컨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등과, 교주들을 중심으로 새로 생긴 신흥종교나 재림의 날자를 지적하는 그릇된 종말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재론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 이곳에는 다루지 않았다. 사실상 여기서는 한국 기독교계 중, 기존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나 성경적인 정통신앙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 기존 교파에 소속한 사람들의 섣부른 정죄와 그 기준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므로써 올바른 분별력을 갖도록 시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특정 교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나 묵묵히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하게 믿고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고 격려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