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9
전도의 기쁨 (빌1장 12~18절)
스티븐 코비는 자신의 저서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인생에서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올바른 길은 있다. 의미있는 인생은 속도와 능률로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존재 이유를 알고 있다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뚜껑 열린 스포츠카를 타고 다녀도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삶이요, 허탈하고 껍데기에 다름 아닙니다.
단련 후 정금같이 나오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절대 지배받지 않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상황이 어려울 수록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더 높은 이상과 목적에 이끌려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감옥, 오해, 비난 등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자신만이 그 일에 책임질 수 있을 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헐뜯고 탓하며 자신의 잘못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은 무심한 세태에 있습니다. 남을 탓한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대신 살아 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바로 자신밖에 없습니다.
어느 공군 조종사가 비행 훈련과정을 끝내고 난 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훈련생은 모두 58명이었습니다. 과정을 마친 후 신기종 전투기를 몰 수 있게 된 사람은 2명밖에 없습니다. 무한 경쟁 상태에서 치열한 싸움이 훈련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생도들은 위기가 닥치면 교관들을 비난하고 시스템을 비판하기 일쑤였습니다.” 불만이 잦자, 편대장은 생도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먼저 거울을 들여다 보라.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만이 바로 성공과 실패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모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정식 비행할 기회가 왔습니다. 조종간을 향해 가는 그 조종사에게 편대장이 말했습니다. “이제 귀관도 자신을 책임질 때가 되었다. 행운을 비네.” 그는 조종 순간마다 편대장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을 기억했습니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착륙 후 헬멧을 벗고 주변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처녀 비행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의존했던 유일한 사람,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입맞춤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 은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모든 면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그분의 사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기까지 핍박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사도 중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도가 되게 하시고 복음 증거자로 세우셨는데, 감옥으로 보내졌다면 그곳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면 그것은 반드시 유익함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은혜를 근거로 감옥행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까지 찾아 오셔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매임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입은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한 득실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옥에 갇힘으로 인해 이방에 복음이 전해진 역사적 사실은 이득입니다.
한편으로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특히 빌립보 사람들은 특별한 애정을 갖고 바울의 상황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익계산을 점검한 후 당당하게 유익함을 주장했습니다.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그 증거로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선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첫 번째 유익은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시위대는 로마 친위대요, 시저의 직접 관할 내에 있는 부대입니다. 시위대의 젊은 군병들은 로마의 미래를 이끌어갈 엘리트 집단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죄수를 감시할 때 함께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아마 바울에게 그런 감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루에 서너 번 교대할 때마다 젊은 군인들이 바울과 함께 발목에 착고를 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복음 전도의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로마 군인들, 죄수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로마의 법은 바울을 묶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로마의 시위대를 착고로 채워 버렸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입니다. 바울은 경비 한푼 들이지 않고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전도할 수 있도록 로마 정예 군사들도 붙여 주셨습니다. 법정에 설 때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히게 된 이유, 복음에 관한 것을 총독들과 가이사 앞에서 당당하게 변론하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로 ‘자신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증거가 되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통해 얻은 두 번째 유익은 14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예수의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환난을 겪게 되면 영적으로 침체하게 됩니다. 또 병에 걸리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 중에 어떤 분은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치료한 후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신앙생활을 못하는 겁니다. 집에 숨어 있고 가끔 목사님이 심방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에게 복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하 목사님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암에 걸리다니’하며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목사님은 암에 걸려도 교회를 위해 설교하고 봉사하시는데 자신도 얼른 교회에 가서 봉사해야겠다며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저도 당혹스러운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찾아와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는지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자매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부부 싸움하세요?”
저는 갑작스런 질문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시인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자매는 목회자도 부부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목사님 부부도 싸우는데 우리 부부가 싸우는 건 당연한 것 아니에요?”하면서 위로 받는 눈치였습니다. 그 자매가 위로 받는 것을 보니 때로 부부싸움은 필요악인가 봅니다.
◆ 고난 속에서 ‘예수 자랑’
우리가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 때로 고난이 닥쳐옵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도둑처럼 찾아와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마음 속에는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는지 아담부터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6~37)
선조들의 승리는 찬란한 영광만이 아니었습니다. 피나는 고난을 통과한 후에애 승리가 있었습니다. 계속 히브리서 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우리가 고난의 때, 낙망의 때에 진정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그 묶임을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육체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믿음으로 자유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고난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 고난은 바울과 같이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한 일로 칭찬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합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면서 칭찬을 듣는다면 오직 올바른 길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뿐입니다.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고난이 명예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만큼 세상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 믿는 자의 자랑입니다. 바울은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고 고난받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고 자랑했습니다.
◆ 은혜도 전도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매임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도 가져다 줍니다. 어떤 형편, 정황과 싸우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든다는 사실을 15~18절 말씀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순전치 못한 자들은 얌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 교회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선교 단체를 증거한 것입니다. 순전치 못한 자들은 다툼을 갖고 경쟁적으로 복음을 증거한 자들입니다.
특히 바울이 몸담고 있는 선교 단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아 가면서 동역했던 많은 무리들을 순전치 못한 자들이 꾀고 미혹해 데리고 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데, 애써 양육한 사람들을 하나 둘씩 떼어 가는 순전치 못한 자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정리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바울은 순전치 못한 자들마저 사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위에서 자신을 부르신 부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볼 줄 알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죄인도 사도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신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이루시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시면 틀림없이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하나님의 복음 전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항상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자신의 특권과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써 감옥에서도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쓰고 싶은 욕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이라는 육체의 억압을 믿음으로 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싶은 유혹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핍박에서 강해질 뿐만 아니라 승리하여 어떤 유혹에도 진실한 마음을 지켜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총이 삶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자신의 저서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인생에서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올바른 길은 있다. 의미있는 인생은 속도와 능률로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존재 이유를 알고 있다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뚜껑 열린 스포츠카를 타고 다녀도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삶이요, 허탈하고 껍데기에 다름 아닙니다.
단련 후 정금같이 나오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절대 지배받지 않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상황이 어려울 수록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더 높은 이상과 목적에 이끌려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감옥, 오해, 비난 등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자신만이 그 일에 책임질 수 있을 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헐뜯고 탓하며 자신의 잘못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은 무심한 세태에 있습니다. 남을 탓한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대신 살아 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바로 자신밖에 없습니다.
어느 공군 조종사가 비행 훈련과정을 끝내고 난 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훈련생은 모두 58명이었습니다. 과정을 마친 후 신기종 전투기를 몰 수 있게 된 사람은 2명밖에 없습니다. 무한 경쟁 상태에서 치열한 싸움이 훈련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생도들은 위기가 닥치면 교관들을 비난하고 시스템을 비판하기 일쑤였습니다.” 불만이 잦자, 편대장은 생도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먼저 거울을 들여다 보라.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만이 바로 성공과 실패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모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정식 비행할 기회가 왔습니다. 조종간을 향해 가는 그 조종사에게 편대장이 말했습니다. “이제 귀관도 자신을 책임질 때가 되었다. 행운을 비네.” 그는 조종 순간마다 편대장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을 기억했습니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착륙 후 헬멧을 벗고 주변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처녀 비행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의존했던 유일한 사람,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입맞춤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 은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모든 면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그분의 사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기까지 핍박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사도 중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도가 되게 하시고 복음 증거자로 세우셨는데, 감옥으로 보내졌다면 그곳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면 그것은 반드시 유익함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은혜를 근거로 감옥행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까지 찾아 오셔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매임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입은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한 득실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옥에 갇힘으로 인해 이방에 복음이 전해진 역사적 사실은 이득입니다.
한편으로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특히 빌립보 사람들은 특별한 애정을 갖고 바울의 상황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익계산을 점검한 후 당당하게 유익함을 주장했습니다.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그 증거로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선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첫 번째 유익은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시위대는 로마 친위대요, 시저의 직접 관할 내에 있는 부대입니다. 시위대의 젊은 군병들은 로마의 미래를 이끌어갈 엘리트 집단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죄수를 감시할 때 함께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아마 바울에게 그런 감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루에 서너 번 교대할 때마다 젊은 군인들이 바울과 함께 발목에 착고를 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복음 전도의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로마 군인들, 죄수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로마의 법은 바울을 묶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로마의 시위대를 착고로 채워 버렸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입니다. 바울은 경비 한푼 들이지 않고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전도할 수 있도록 로마 정예 군사들도 붙여 주셨습니다. 법정에 설 때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히게 된 이유, 복음에 관한 것을 총독들과 가이사 앞에서 당당하게 변론하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로 ‘자신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증거가 되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통해 얻은 두 번째 유익은 14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예수의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환난을 겪게 되면 영적으로 침체하게 됩니다. 또 병에 걸리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 중에 어떤 분은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치료한 후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신앙생활을 못하는 겁니다. 집에 숨어 있고 가끔 목사님이 심방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에게 복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하 목사님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암에 걸리다니’하며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목사님은 암에 걸려도 교회를 위해 설교하고 봉사하시는데 자신도 얼른 교회에 가서 봉사해야겠다며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저도 당혹스러운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찾아와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는지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자매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부부 싸움하세요?”
저는 갑작스런 질문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시인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자매는 목회자도 부부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목사님 부부도 싸우는데 우리 부부가 싸우는 건 당연한 것 아니에요?”하면서 위로 받는 눈치였습니다. 그 자매가 위로 받는 것을 보니 때로 부부싸움은 필요악인가 봅니다.
◆ 고난 속에서 ‘예수 자랑’
우리가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 때로 고난이 닥쳐옵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도둑처럼 찾아와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마음 속에는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는지 아담부터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6~37)
선조들의 승리는 찬란한 영광만이 아니었습니다. 피나는 고난을 통과한 후에애 승리가 있었습니다. 계속 히브리서 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우리가 고난의 때, 낙망의 때에 진정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그 묶임을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육체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믿음으로 자유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고난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 고난은 바울과 같이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한 일로 칭찬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합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면서 칭찬을 듣는다면 오직 올바른 길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뿐입니다.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고난이 명예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만큼 세상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 믿는 자의 자랑입니다. 바울은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고 고난받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고 자랑했습니다.
◆ 은혜도 전도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매임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도 가져다 줍니다. 어떤 형편, 정황과 싸우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든다는 사실을 15~18절 말씀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순전치 못한 자들은 얌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 교회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선교 단체를 증거한 것입니다. 순전치 못한 자들은 다툼을 갖고 경쟁적으로 복음을 증거한 자들입니다.
특히 바울이 몸담고 있는 선교 단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아 가면서 동역했던 많은 무리들을 순전치 못한 자들이 꾀고 미혹해 데리고 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데, 애써 양육한 사람들을 하나 둘씩 떼어 가는 순전치 못한 자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정리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바울은 순전치 못한 자들마저 사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위에서 자신을 부르신 부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볼 줄 알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죄인도 사도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신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이루시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시면 틀림없이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하나님의 복음 전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항상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자신의 특권과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써 감옥에서도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쓰고 싶은 욕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이라는 육체의 억압을 믿음으로 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싶은 유혹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핍박에서 강해질 뿐만 아니라 승리하여 어떤 유혹에도 진실한 마음을 지켜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총이 삶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