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9
내 집을 채워라 (눅 14: 15-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왜 삽니까?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인생은 아무 목표도 없이 바람따라 흘러가는 구름과 같고, 물따라 떠내려가는 부평초와 같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와 같습니까? 요즘 시중에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이 책을 읽으려고 샀기 때문에 저는 대충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의경으로 복무하는 첫 아들이 휴가를 왔을 때, 저의 집사람이 그에게 이 책을 권하였더니, 그도 다른 사람한테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이 잘 팔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용이 쉽고 문장도 간결하여 대중이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미국에서 아주 큰 교회를 만든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나라 사람은 "남들이 좋다 하면, 양잿물로 마시는 버릇", 곧 유행을 잘 따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가 홍보를 잘 하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책도 잘 팔립니다. 이 책이 잘 팔리는 이유는 이처럼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제목이 사람의 시선을 끌만하다고 생각합니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인생 목표는 "잘 살아보자"였습니다. 이런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우리는 이제 가난을 벗어나서 어느 정도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동물이 아니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빵도 중요하지만,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민주화 운동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70-80년대의 인생 목표는 "사람답게 살아보자"가 되었습니다. 빵과 자유를 얻고 나면, 사람들은 한없이 행복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표가 상당히 애매하고 희미해졌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즐거움, 레저와 오락을 좇습니다. 그리고 건강과 행복도 좇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즐거움이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건강과 행복은 또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래저래 현대인들은 인생 목표를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자유롭게 살고, 즐겁게 살면,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의 인생 목표, 아니 최후의 인생 목표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어쩌면 가난했던 옛날 조상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인지, 날이 갈수록 인격과 가정과 자연은 파괴되고, 범죄는 더욱 늘어만 갑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날로 늘어갑니다. 이렇게 살려고 우리가 피땀을 흘리며 살아왔습니까?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와 발맞추어 눈부시게 성장하고 발전한 한국교회는 이제 점점 침체해가고 있습니다. 양적인 침체는 그리 걱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영적 침체와 타락이 심해지고, 이에 따라 교인들의 사명과 열심도 날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눈앞의 이익만을 좇다가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발 밑의 먹이만을 좇다가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모른다면, 아무리 열심히 살고,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인생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인생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인생이 무슨 보람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인생의 참된 목표를 다시 세워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강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강물이 흘러가는 곳을 알 수 없듯이, 하늘 아래 살아가는 인생도 구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운명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아시며, 인생의 목표도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누가 잘 압니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잘 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본분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마 6:33)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 나라의 백성을 소집하는 일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인생 목표도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림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 먹고 자고 입고 누리고 노는 것들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요, 이 목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도 분명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만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고 모으고 만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런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불신자를 주님의 집,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잔치와 같습니다. 잔치 집에는 떡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14:15). 이 세상의 잔치 집에서 떡과 빵을 먹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한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했다고 하였습니다(14:16). 여기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는 '어떤 임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잔치는 혼인 잔치였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음식과 기쁨의 넘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잔치는 완성된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잔치를 가리켜 예수님은 "내 잔치"라고 하셨습니다(14:24). 예수님의 살과 피의 성찬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구원의 잔치, 기쁨의 잔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기쁜 소식입니다. 전도는 즐거운 잔치에 오라는 초대장입니다.
이 초대장을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보내셨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들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된, 구원받기로 계획된 첫 손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온 백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유대인이 선택을 받은 것은 바로 그들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선택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유대인은 당연히 예수님을 영접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은 누가복음 14장 17절에 나오는 "그 청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잔치에 예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적으로 초청의 대상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유대인이 한결같이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한마디로 줄인다면, '세속적 이기주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밭을 보러 간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14:18). 부동산 관리가 이유입니다.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10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거절하였습니다(14:19). 동산 관리가 이유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거절한다고 하였습니다(14:20). 세속적 관심이 이유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 곧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민족이 되어갔습니다. 점점 더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민족이 되어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니 구원의 순서를 뒤바꾸셨습니다. 유대인을 먼저 구원하고 그 다음에 유대인을 통해 온 민족을 구원하려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거꾸로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전혀 엉뚱한 사람, 유대인이 멸시하던 이방인들이 아무 조건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이제 구원은 아무 조건도 없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잔칫집 주인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잔칫집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혼인잔치에 손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의 이른 새벽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역사의 저녁까지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곧 구원의 역사요, 인류의 시간은 구원에 초대하는 전도의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잔칫집 주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제일 가까운 지역은 종들이 살고 있던 지역, 곧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이었습니다(14:21) 복음 전파의 두 번째 지역인 유다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 지역은 길과 산울 가(14:23)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와 땅 끝, 곧 '이방의 전 지역'을 말합니다(행 1:8). 마지막으로 잔칫집 주인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일차로 초대된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일컫는 유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초대에 불응하였습니다. 그러자 잔칫집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명하였습니다(14:21). 유대인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던 창기와 세리, 문둥이와 소경, 각종 질병을 앓는 자들에게 복음의 초대장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잔칫집 주인은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잔칫집을 채워라"고 명하였습니다(14:23). 이들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명할 때에 "강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강권하라"는 말은 강제로 끌고 오라는 말이 아니라, 뜨겁고 집요하고 간절하게 권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영혼을 얼마나 애타게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잃은 양을 찾는 목자처럼 잃은 영혼을 얼마나 열심히 찾으시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요 6:39).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 못 이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말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실로 바울은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행 26:24). 바울은 자신의 일생과 몸을 전도의 제물로 불살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잃은 영혼을 향한 여러분의 관심과 전도의 열심은 어느 정도입니까? 감히 예수님과 바울처럼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신 예수님처럼, 복음 전도를 위해 모든 것을 분뇨처럼 여긴 바울처럼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도록, 다만 한 영혼이라도 구원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고전 9:16)고 말하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멸망한 이웃의 피의 값을 물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화를 면하기 위해서든,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든, 우리는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 가장 큰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기 위해서든,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전도해야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전도해야 합니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왜 삽니까?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인생은 아무 목표도 없이 바람따라 흘러가는 구름과 같고, 물따라 떠내려가는 부평초와 같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와 같습니까? 요즘 시중에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이 책을 읽으려고 샀기 때문에 저는 대충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의경으로 복무하는 첫 아들이 휴가를 왔을 때, 저의 집사람이 그에게 이 책을 권하였더니, 그도 다른 사람한테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이 잘 팔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용이 쉽고 문장도 간결하여 대중이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미국에서 아주 큰 교회를 만든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나라 사람은 "남들이 좋다 하면, 양잿물로 마시는 버릇", 곧 유행을 잘 따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가 홍보를 잘 하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책도 잘 팔립니다. 이 책이 잘 팔리는 이유는 이처럼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제목이 사람의 시선을 끌만하다고 생각합니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인생 목표는 "잘 살아보자"였습니다. 이런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우리는 이제 가난을 벗어나서 어느 정도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동물이 아니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빵도 중요하지만,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민주화 운동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70-80년대의 인생 목표는 "사람답게 살아보자"가 되었습니다. 빵과 자유를 얻고 나면, 사람들은 한없이 행복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표가 상당히 애매하고 희미해졌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즐거움, 레저와 오락을 좇습니다. 그리고 건강과 행복도 좇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즐거움이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건강과 행복은 또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래저래 현대인들은 인생 목표를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자유롭게 살고, 즐겁게 살면,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의 인생 목표, 아니 최후의 인생 목표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어쩌면 가난했던 옛날 조상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인지, 날이 갈수록 인격과 가정과 자연은 파괴되고, 범죄는 더욱 늘어만 갑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날로 늘어갑니다. 이렇게 살려고 우리가 피땀을 흘리며 살아왔습니까?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와 발맞추어 눈부시게 성장하고 발전한 한국교회는 이제 점점 침체해가고 있습니다. 양적인 침체는 그리 걱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영적 침체와 타락이 심해지고, 이에 따라 교인들의 사명과 열심도 날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눈앞의 이익만을 좇다가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발 밑의 먹이만을 좇다가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모른다면, 아무리 열심히 살고,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인생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인생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인생이 무슨 보람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인생의 참된 목표를 다시 세워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강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강물이 흘러가는 곳을 알 수 없듯이, 하늘 아래 살아가는 인생도 구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운명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아시며, 인생의 목표도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누가 잘 압니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잘 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본분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마 6:33)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 나라의 백성을 소집하는 일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인생 목표도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림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 먹고 자고 입고 누리고 노는 것들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요, 이 목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도 분명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만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고 모으고 만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런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불신자를 주님의 집,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잔치와 같습니다. 잔치 집에는 떡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14:15). 이 세상의 잔치 집에서 떡과 빵을 먹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한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했다고 하였습니다(14:16). 여기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는 '어떤 임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잔치는 혼인 잔치였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음식과 기쁨의 넘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잔치는 완성된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잔치를 가리켜 예수님은 "내 잔치"라고 하셨습니다(14:24). 예수님의 살과 피의 성찬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구원의 잔치, 기쁨의 잔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기쁜 소식입니다. 전도는 즐거운 잔치에 오라는 초대장입니다.
이 초대장을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보내셨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들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된, 구원받기로 계획된 첫 손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온 백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유대인이 선택을 받은 것은 바로 그들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선택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유대인은 당연히 예수님을 영접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은 누가복음 14장 17절에 나오는 "그 청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잔치에 예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적으로 초청의 대상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유대인이 한결같이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한마디로 줄인다면, '세속적 이기주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밭을 보러 간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14:18). 부동산 관리가 이유입니다.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10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거절하였습니다(14:19). 동산 관리가 이유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거절한다고 하였습니다(14:20). 세속적 관심이 이유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 곧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민족이 되어갔습니다. 점점 더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민족이 되어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니 구원의 순서를 뒤바꾸셨습니다. 유대인을 먼저 구원하고 그 다음에 유대인을 통해 온 민족을 구원하려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거꾸로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전혀 엉뚱한 사람, 유대인이 멸시하던 이방인들이 아무 조건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이제 구원은 아무 조건도 없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잔칫집 주인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잔칫집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혼인잔치에 손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의 이른 새벽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역사의 저녁까지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곧 구원의 역사요, 인류의 시간은 구원에 초대하는 전도의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잔칫집 주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제일 가까운 지역은 종들이 살고 있던 지역, 곧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이었습니다(14:21) 복음 전파의 두 번째 지역인 유다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 지역은 길과 산울 가(14:23)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와 땅 끝, 곧 '이방의 전 지역'을 말합니다(행 1:8). 마지막으로 잔칫집 주인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일차로 초대된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일컫는 유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초대에 불응하였습니다. 그러자 잔칫집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명하였습니다(14:21). 유대인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던 창기와 세리, 문둥이와 소경, 각종 질병을 앓는 자들에게 복음의 초대장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잔칫집 주인은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잔칫집을 채워라"고 명하였습니다(14:23). 이들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명할 때에 "강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강권하라"는 말은 강제로 끌고 오라는 말이 아니라, 뜨겁고 집요하고 간절하게 권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영혼을 얼마나 애타게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잃은 양을 찾는 목자처럼 잃은 영혼을 얼마나 열심히 찾으시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요 6:39).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 못 이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말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실로 바울은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행 26:24). 바울은 자신의 일생과 몸을 전도의 제물로 불살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잃은 영혼을 향한 여러분의 관심과 전도의 열심은 어느 정도입니까? 감히 예수님과 바울처럼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신 예수님처럼, 복음 전도를 위해 모든 것을 분뇨처럼 여긴 바울처럼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도록, 다만 한 영혼이라도 구원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고전 9:16)고 말하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멸망한 이웃의 피의 값을 물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화를 면하기 위해서든,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든, 우리는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 가장 큰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기 위해서든,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전도해야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전도해야 합니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