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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하라(1) (고전 9:19-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대통령 탄핵 발의 사건 때문에 여러분도 걱정을 많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국이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백성이 받은 충격도 꽤 컸으나, 일단 마지막 공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갔으니, 담담히 지켜보십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립시다. 큰 난리가 난 것도 아니므로, 이럴수록 여러분은 주어진 일에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세운 '진보하는 교회'라는 목표에 따라서 저는 몇 주 동안 "영적인 진보를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적으로 진보하기 위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고, 기도와 성경 읽기에 힘쓰기를 권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간곡한 부탁을 얼마나 실천하고 계신지 저는 잘 모르겠고, 또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경건 생활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현상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이 이 힘든 세상에서 얼마나 활기차게 살아가는가를 보면, 여러분이 경건 생활에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제발 부탁을 드리건대, 경건 생활은 교회는 물론 여러분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있으므로, 항상 경건 생활에 힘쓰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진보하면 할수록 교회는 서서히 활기를 되찾고,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교회 부흥을 위해 인위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님의 마지막 분부를 받들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대로, 우리는 불신자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할 뿐만 아니라, 멸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부득불 전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의 시국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핑계를 대지 말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는 전도의 필요와 의무는 잘 알지만, 어떻게 전도해야 할 지를 잘 몰라 망설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방법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처음부터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혹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애쓴다고 말합니다. 물론 바울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평생을 오직 전도하는 일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바울처럼 직업적인 전도자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사람의 영혼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그러다가 여러분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저는 여태껏 교수와 목회자로서 남들에게는 "전도하라"고 가르쳐 왔지만, 막상 제 자신은 단 한 사람에게도 전도하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여기곤 하였습니다. 심판의 날에 참으로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을 것이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기도 민망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저는 "하나님, 제가 죽기 전에 친구 한 명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말로는 전도하지 못했지만, 제가 쓴 책들을 건네주곤 하였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는지, 그 친구가 요즘 교회를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니 얼마나 한숨을 돌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새벽기도 때마다 저의 매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더니, 최근에 제가 김해제일교회에 설교하러 갔다가, 뜻밖에 매형이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저히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 같은 양반이 교회에 나온 것을 보고, 정말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끈질기고 진실한 기도는 분명히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식구, 친구와 이웃 중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매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전도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무리한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일평생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겠다는 목표로 노력하십시오. 웅장한 폭포도 한 방울로부터 시작됩니다. 탕자 어거스틴이 회개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도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한 방울의 눈물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단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고 전도하신다면, 저처럼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거두실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다음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높은 자세로 전도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의 열심에 대해 말하자면, 길가에서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전도하는 분들의 열심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뜨거운 전도열은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히 고쳐야 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협박하듯이 전도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는 것까지는 참으로 좋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을 보십시오. "만약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설령 이 말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협박처럼 들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싶다가도, 그들의 험한 말투 때문에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는 협박이 아닙니다. 그러면 전도는 무엇입니까? 초대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협박하는 태도로 전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쁜 소식은 웃으면서 전달합니다.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복음으로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하면서, 믿기 전에 먼저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회개를 촉구합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 사람들에 따라서 회개와 믿음의 순서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의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해야 합니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이웃을 초대하는 사람이 "만약 잔치에 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당연히 기쁘게 초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오는 사람이 더러운 옷을 입고, 사나운 얼굴로, 미운 감정에 이를 빡빡 갈면서 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미운 감정을 털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올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 주인이 성대한 잔치는 준비해 놓았는데, 사람이 너무 적게 올까 걱정이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손님에게 정중한 초대장을 올립니다. 손님이 좋아할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을 정성껏 모십니다. 잔치 주인이 종이라서 그렇게 합니까? 잔치 주인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합니까? 아닙니다. 되도록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모시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잔치도 그렇거늘, 하물며 천국 잔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보다 더욱 낮은 자세로, 더욱 섬기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바울처럼 좋은 가문과 높은 지식과 큰 권세를 가진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되도록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종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바울은 자유롭게, 당당히 행사할 권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그는 그의 권리를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면, 죽기까지 합니다. 명예를 지키지 못하면, 아까운 목숨까지 버립니다. 최근에 우리는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덕 대우건설 전 회장의 자살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명예를 지키려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꾸로 "자신의 권리와 명예를 지키려고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낳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말입니까? 바울은 자존심도 없는 사람입니까? 바울은 권리와 명예의 가치를 모르는 머저리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권리와 명예를 포기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쉽게 생각한 것은 바로 아무쪼록 몇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이 고귀한 이름을 위해, 그분을 전하기 위해 그는 세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울처럼 그렇게 살만큼 훌륭한 성도는 아닙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독신으로 살고, 세상의 이익을 모두 포기하고, 더욱이 순교까지 감수할 만큼 우리는 대단한 성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의 정신은 배워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마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원칙이 없는 기회주의자처럼 보입니다. 수시로 변하는 주위의 상황에 민감하게 적응하는 카멜레온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비록 바울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바보가 되었고, 목숨보다 중한 자유를 버리고 마치 종처럼 살았을지언정, 복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바울이 마치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한 것은 " 꿩잡는 게 매다" 식으로 무조건 열매만을 따먹기 좋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려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려는 열린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상대방에 따라 눈높이를 달리 하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죄수의 신분을 이용하여 로마까지 건너갔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섬기려 하였고, 결국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목숨까지 내어놓을 순 없더라도, 복음을 위해 자존심 정도는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의사(아담 패치)는 환자를 살리려고 광대처럼 웃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학원 강사는 학생의 흥미를 돋우려고 온갖 옷을 걸치고 코미디언처럼 강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고귀한 일을 위해 우리가 목숨은 못 내어놓을지언정 자존심 정도는 내어놓지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람을 낚은 어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그야말로 천사도 부러워할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섬기는 자세를 가집시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아니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전도하기에 힘씁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7절의 구절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