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9
생활 전도 (벧전2:18-25)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요즘 저는 베드로전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중심주제는 고난입니다. '고난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주제입니다. 그런 주제아래 내용을 전개하면서 2장과 3장에서는 사회와 가정에서의 관계를 주로 다룹니다. 2장 11절과 12절은 이런 모든 관계를 위한 대전제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2장 13절부터 17절까지는 국가제도와의 관계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믿지 않는 정부에 대해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직장생활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고용주나 상사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 있는 이런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줍니다. 제가 2주일 전에 증거한 말씀은 제도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고, 오늘 말씀은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다음주에 나눌 말씀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우리 마음에 의구심이 떠오릅니다. '과연 순종만이 제일 좋은 미덕인가? 국가제도에 대한 견제와 비판기능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때도 있지 않은가?' 하는 고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문제는 분명히 여러 가지 차원에서 고민을 하고 성경전체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전서에서 강조하는 강조점이 그런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선을 행함으로 그들에게 삶의 본을 보여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기서 순종하라는 것을 과연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 3가지 단계를 거쳐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먼저 이 말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이 말씀에서 주로 강조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런 배경과 주된 강조점을 이해한 것에 기초하여 이 말씀을 재해석하여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절차를 통해 본문을 잘 관찰하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본문이 강조하는 주된 포인트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 단계에 걸쳐서 본문을 관찰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본문의 배경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이 말씀에 보면, '사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환'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종이라는 말과는 약간 다른 말입니다. 종은 아무런 권리도 없고 심지어는 목숨도 주인에게 맡겨진 신분이지만, 사환은 좀 더 나은 조건 속에 있었습니다. 종은 종이지만 일반적으로 가정에 소속되어 좀 더 책임감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종을 의미하는 단어인 'doulos'보다 조금 더 온화한 단어입니다. 이들은 초기에 외국에서 잡혀온 종의 후손들로서 자유롭지 못한 채 한 가정의 종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인구의 약 ⅓이 이런 노예들일 정도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18-19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없었지만 그들은 로마 법률상 대중의 주체였습니다.
로마황제의 치하에서는 노예학대나 살해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괜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책임감있는 위치에 있거나 전문적인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교육의 정도에 따라 교사나 궁중의 관리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농업, 광업, 제조업 등에도 종사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월급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돈을 모아서 자신들의 자유를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환'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아주 잘 되어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환들을 향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권면합니다. '두려워함으로'라는 말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아주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많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이방인 주인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유를 배웠으나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은 믿지 않는 주인에게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당시의 사환들이 어떤 처우와 어떤 입장에 놓여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2. 본문의 강조점과 의미
18절을 보면,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하면서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라고 권면합니다. 주인들은 종들을 선하게 대하는 사람과 종들을 악하게 대하는 사람의 두 그룹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떤 경우이든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까다로운 자들'이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직장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합리적으로 일을 지시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지시합니다. 도대체가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해도 참고 견디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인가 내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을 넘어선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반응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인가 분명한 내적인 동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이런 태도를 요구합니까? 그것은 이런 태도가 결국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 종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한다면 그 주인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어려움 중에서도 기쁨으로 사는 이유를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일터에서 믿지 않는 상사를 전도하도록 나를 불러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난을 견디라고 주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복음을 증거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불의를 참고 견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참고 견디면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21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과 살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내게 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직장의 상관을 주셨다면 그것도 역시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비록 내가 그 상관보다 직급이 낮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 사람을 전도하는 전도자로, 또한 그를 양육할 목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본으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2절부터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주님의 고난을 묘사합니다. 22절에 보면, 그 분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신 분입니다.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 입에 궤사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과 행실에서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흠이 없으신 모습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우리를 절망시키고 낙심시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강조점은 그렇게 흠이 없는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3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쟁 역사에 보면, '마카비 전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카비 가문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위협했습니다, "너는 나를 불로 태워 죽이지만 너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서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위협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능력으로 위협하지도 않았고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 분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공의로 심판한다는 말의 '심판한다'는 동사는 현재시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늘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보복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재판하실 것을 믿고 오직 인내하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4절)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언어는 단지 사환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닙니다. 더 넓게 확대해서 모든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함입니다. 그 분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5절)
양과 목자의 비유는 구약과 신약을 통 털어 성경에서 아주 두드러진 비유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인내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보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목자되신 주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목적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관들의 행동이 옳기 때문에 무조건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시정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본을 보여야 그들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자기 희생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희생을 당하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마음에 감동을 받고 변화된 것이 아닙니까? 나 같은 사람을 건지기 위해 그 모진 고초를 참고 견디셨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희생하고 섬길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이 그 행동을 보고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로 부르신 목적이요 소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인내 때문에 오늘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가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말은 많지만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 주님의 본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의 삶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로부터 "나를 따라오라!"(마가복음 4장 19절)고 직접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실 때, 재판을 받으러 가실 때 베드로는 가까이 따라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습니다 (마가복음 26장 58절).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그 발자국을 그대로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발자국은커녕 그림자조차 밟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리 주님을 부인하고 실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가르칩니다, "이것이 너희의 소명이다.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려고 너희를 부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자취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의 죽으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으라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죽으라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각자가 다른 모양의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 고난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길로, 그런 방향으로 함께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3. 적용과 권면
이제 세 번째로 당시 사회에서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것을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본문이 기록된 당시와 같은 노예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직장생활에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적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이 본문에 있는 순종을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주석가들은 여러 지침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신학자이자 주석가인 Howard Marshall의 다섯 가지 원리는 우리에게 좋은 가이드가 됩니다.
1) 우리의 모든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우리의 행동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열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관계성'이라는 것은 모든 종류의 직업적인 관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직업이 요청하는 의무들과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직업적인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행동은 고용주의 개인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업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4) 우리가 관계성 속에서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복음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5) 만약 우리가 감당하는 의무의 결과로 고통을 당한다면 그러한 고통은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우리의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1) 맡겨진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고대의 종들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는 오늘날 적용하면 의무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생활은 사실상 계약입니다. 내가 속한 직장을 위해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사도 있고 동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갑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감당하지 않는 것 때문에 전도에 지장이 됩니다. 믿지 않는 직장의 동료들이 어떤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을 판단합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교회에 가서 충성을 하는가를 보고 판단합니까? 혹시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여러분의 직장생활을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만약 직장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러분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용주나 상사들도 여러분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부당한 요구를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한다 할지라도 맡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인정할 것입니다. 직장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순복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사안을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기 희생적으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간혹 주일에도 출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야간에 근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의 모임과 시간이 겹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문제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교회에 간다고 빠지고 나면 다른 사람들만 골탕을 먹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쌓이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는 좋지 못한 평판을 듣게 됩니다.
교회의 장로인 모 대학의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일에 직장에 출근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출근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각 부서에 한 사람씩 출근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상황에서 출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다들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 때 교회의 장로인 교수님이 자원해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직장에서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자원해서 자기 희생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됩니다.
제가 군대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군대에서도 교회에 빠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낮 예배, 저녁예배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속한 분과의 이등병 두 명이 입대 후 첫 외출을 나갔다고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등병이기 때문에 정확히 시간 전에 들어오라고 열심히 교육을 시켜서 걱정을 하면서 내 보낸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저와 제 선임병사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저녁예배에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빠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일로 빠진다는 것이 마음에 편치가 않았습니다. 또 한편 이렇게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혼자만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책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리고 저녁예배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두 명의 이등병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 선임병사가 그 친구들을 혼내면서 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너희들 때문에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던 안 진섭이가 오죽 걱정이 되었으면 교회도 못 갔겠느냐?"고 하면서 혼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것이 그 분에게는 우리 분과가 당한 어려움에 동참하기 위해 목숨처럼 지키던 예배시간을 포기하는 자기 희생적인 결단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 후 그 분은 오히려 시간이 되면 제게 교회에 가라고 권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사는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희생적인 결정을 하고 그 직장의 어려움에 동참하면 그들이 여러분을 참된 신앙인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물론 매주 주일에 교회에 갈 수 없도록 요구하는 직장이라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직장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여러분이 먼저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불신자들과 섞여 사는 사회와 직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할 태도입니다.
3) 우리는 이런 모든 일의 결정 속에서 근본적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기 희생을 통해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을 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가 속한 직장과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사람은 말로 전도할 수 있지만 잘 아는 사람은 행동으로만 전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전도입니다. 삶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생활은 그 자체가 전도의 현장이고 선교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 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삶으로 본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지금의 직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기독교 인구가 일년에 15만 명씩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에게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자기의 이익을 채우는 것에만 급급한 것으로 보였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개개인대로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으로 비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아픔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 예수를 따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유익을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진 것을 모두 주면서 살았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남의 것이라도 뺏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사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기를 희생하지 못하고 내 것을 채우는데 관심을 두는 한 우리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를 희생하기 보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자기를 채우기에 급급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주변의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환경 가운데 보내주신 것은 생활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증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제일 가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것은 말로만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너도나도 이기고 싶어하고 남을 밟고서라도 앞서고 싶어하는 시대입니다. 부정을 행해서라도 자기 배를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부패한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 부패한 시대에 우리 새누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시대에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목자되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작든 크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말에 지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 삶의 실천이 없는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아니 살아 계신다 해도 우리 삶과 실제적인 상관이 없이 멀리 떠나 계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죽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바로 자신의 몸이신 이 땅의 교회, 특별히 우리 새누리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고 우리의 작은 몸짓으로 나타내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존경하지만 교회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이 세대 앞에 참으로 우리 새누리가 살아 계신 예수의 몸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희생을 자처하십시오. 당장에 대단한 희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양보하십시오. 한 번만 져주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희생을 보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기희생을 통해서 여러분은 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 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방황하고 헤매던 저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이제는 목자되신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이 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그 희생을 본받아서 그렇게 양보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이끌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말에 지친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인들의 말에 지쳐있는 사람들 앞에, 이제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 교회가 그분의 몸이신 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증거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굳건히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안진섭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