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3
주님께 끌려온 죄인 (요한복음8:1-11)
미국 사회에서 한때 히피들이 기승을 부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가정과 사회에 불만을 품고 바닷가로 거리로 골목으로 나가 노숙을 하곤 했지요. 미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히피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했습니다. 갈보리 채플의 척 스미스 목사님은 히피들에게 복음을 전한 유명한 목사 가운데 한 분입니다. 히피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주일날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남루한 옷차림에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몸에 모래를 뒤집어 쓰고 교회에 옵니다. 미국 예배당은 대부분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그들이 뿌려놓은 모래 때문에 카펫이 엉망이 되기 일수였습니다. 예배가 뭔지 몰랐던 그들은 예배 시간에 성찬용 잔을 꼽아 놓으라고 뚫어 놓은 장의자의 동그란 구멍에 엄지발가락을 끼우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을 과연 교회 일원으로 영접해야 될 것인가를 놓고 당회가 진지한 논의를 벌였습니다. 히피들이 교회에 온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며 다른 성도들을 불편하게 할 뿐이라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척 스미스 목사님이 일어나서 이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교회가 저들이 교회 오는 것을 막아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목사의 가운을 벗고 바닷가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 내 자신 히피가 되어서라도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모래 때문에 카펫이 더러워져서 저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면 나는 교회에서 깨끗이 카펫을 걷어치우겠습니다."이렇게 척 스미스 목사님은 히피들이 교회에 오는 문을 열어 놓았던 것이지요. 이런 물결들이 미국 교회 안에 넘쳐서 미국에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미군들이 주둔한 도시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매춘부들이 주일날 한 교회에 몰려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당회에서 이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노골적으로 이들이 오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어 은근히 싫어하는 눈치를 해서 그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현장을 덮친 모양입니다. 사내는 도망을 갔고 여인만 붙잡혔습니다. 여인이 개처럼 예수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그쳐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모세의 율법의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 모세의 법을 지킬 양이면 자기의 법대로 돌을 던지면 될 것이지, 왜 예수님께 끌고 왔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께 다그쳐 묻는 것인가요? 6절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정을 파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계략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비켜 가셨는가? 자신의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여인을 구원하셨는가? 어떻게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는가? 성경은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두 번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두 번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글을 쓰시자, 무슨 내용의 글을 쓰셨는지 뭇 사내들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돌을 높이 치켜들었던 손이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곳을 떠나갑니다. 오직 끌려온 여인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다시 땅에 뭔가를 쓰시고 말씀합니다. "너를 고발한 자가 어디 갔느냐 정죄하던 자들이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본문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지난 이 천년동안 대단히 유명한 본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본문이 성경에 포함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이 복음을 전해야 될 것인지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성경 사본에 보면 어떤 사본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본에는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또 시간이 지난 후에는 빠졌던 사본에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사본은 요한복음 21장 25절 다음에 본문을 추신처럼 추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본마다 다양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초대교회의 정경화 과정에서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고 교회가 이것을 설교하고 가르친다고 한다면 교회는 음행을 용인하는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죄도 용서받아야 되지만 이런 여인이 용납된다면 교회의 거룩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래서 빼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용서의 폭이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 정도를 용서하는 선에서 머물겠습니까? 거룩한 교회와 십자가의 능력이 이런 여인의 죄 하나로 인해 오염되어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왜 이런 간음하는 여자들을 용서하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바로 나를 용납하고 너를 용납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이같은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명제 하나를 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 받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모든 죄인들을 용서해야 한다. 내가 정죄하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은 "우리 주님은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지은 사소한 죄 몇 가지를 용서하셨다구요? 아니요.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큰 죄 몇 가지만 용서하셨다구요? 아니요 "모든 죄"를! 과거에 지었던 몇 가지 죄를 용서했다구요? 아니요 "모든 죄"를!. 크든 작든 적든 많든,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내가 짓고 살아가는 죄,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여인을 성전으로 끌고와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지금 소리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서 지은 죄는 작지 아니하다. 그러나 악마적인 본능으로 서기관들과 율법주의자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격을 말살하고 다른 사람들이 멸망해가고 몰락해 가는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은 죄, 그가 용서받고 그가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길을 차단한 죄, 이것은 바로 악마적인 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다그쳐 묻습니다. "선생이여"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선생 만나고 돌아가면 안됩니다. 병들어서 나오셨습니까? 의사 선생님 만나러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질병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예수님을 의사 선생으로 만나고 돌아가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가 많고, 가난하고 어려움 있어 주님 앞에 달려 나오셨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 친히 가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부자 예수 선생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오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 도덕 교사, 예수 윤리 선생님 만나고 돌아가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선생이여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자는 돌로 치라 명하셨는데 선생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악의에 찬 질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예수께서 "돌로 치라"고 대답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간 곳이 없어집니다. 또한 로마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로마법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치지 말라" 말씀한다면 예수님은 공의를 무너뜨린 자, 선지자도 아니고 메시야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사 땅에 글을 쓰셨던 것입니다. 무슨 글을 쓰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 이것은 대단히 신학적이고 대단히 심리학적이며 실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충혈된 그들의 눈동자,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 그들의 상기된 얼굴은 예수님께서 침묵 가운데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실 때에 높이 치켜들었던 그 돌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손가락이 어떤 손가락입니까?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손가락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어 아담을 만드시던 창조주의 손가락입니다. 내가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 나를 빚어 만든 손가락입니다. 예수님은 그 손가락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천군천사 나팔 불며 선악간에 심판하러 오실 때에, 양과 염소를 가르시고, 죄인과 의인을 가르시며,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가르실 손가락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책을 남기신 적이 없으시고 글을 남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왕이신 그분이 지금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 봄으로써 예수님이 무슨 글을 쓰셨는지 짐작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첫째, 헬라어 원문에 보면 글을 썼다는 말에 "카타그라펜"이라는 퍽 재미있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카타"라는 말은 "against" 곧 "대항하여"라는 뜻이고 "그라펜"은 "글을 썼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선생이여 어찌할까요"라고 예수님을 고발할 거리를 찾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항하여 글을 썼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그들의 죄목을 쓰고 그 죄를 다스릴 율법을 썼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쓰고 그들이 지은 죄를 일일이 썼을 것입니다. 죄목과 율법과 정죄와 심판의 내용을 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손가락이 직접 나타나 글을 쓰신 적이 있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두 번 글을 쓰셨듯이 하나님께서도 손가락으로 두 번 글을 쓰신 사건이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6장에 보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모세가 가져온 돌판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십계명을 쓰셨습니다.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들고 산을 내려옵니다. 이 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임재요 우리를 구원할 지침이요 등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써 주신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모세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을 향하여 십계명 돌판을 던졌습니다. 십계명 돌판이 사정없이 깨어졌습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깨뜨렸다. 너희들이 계명을 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았다는 상징적인 의미였습니다. 이는 저주요 심판이요. 정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40장에 보면 다시 손가락이 나타나 새 돌판에 십계명을 썼습니다. 똑같은 계명, 똑같은 돌판이지만 그 돌판을 괘 속에 넣고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발랐습니다. 속죄소로 덮었습니다. 이것은 용서의 복음이며 사랑의 복음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며 생명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쓰신 글은 용서의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첫 번째 손가락의 잣대로 재어지면 우리는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심판과 정죄의 잣대로 재어지고 율법의 잣대로 재어지면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벨사살 임금이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땅에 떨어진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노획한 제사용 금기명들 술잔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금촛대 저 편에서 손가락이 나타나 뭔가 휘갈겨 글씨를 쓰고 지나갑니다. 사시나무 떨 듯이 임금이 와들와들 떨며 박사와 술객들을 불러 그 글을 해석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글을 읽고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지혜자 다니엘이 나타나지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나님이 당신을 임금의 자리에 두고 왕조를 당신에게 허락했는데 당신의 무게를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라 당신의 왕국은 이제는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게요. 하나님의 심판이 당신에게 임하여 당신의 왕조를 메대와 바사에 넘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밤 페르시아가 침공해 들어와 벨사살 왕을 죽이고 그의 왕조를 멸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첫 번째 계명입니다. 첫 번째 손가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충성과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 모든 것을 저울에 달아보신다고 한다면 살아남을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첫 번째 손가락을 붙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가정들은 첫 번째 손가락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남편은 아내를 비난하고 아내는 남편을 비난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는 자식을 원망합니다.
예배 드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처럼 율법만 얻어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손가락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자학만 하다 돌아갑니다. 상처만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손가락을 만나야 됩니다. 용서를 만나고 복음을 만나야 됩니다. 은혜를 만나셔야 됩니다. 이 여인이 살아날 수 있던 길이 무엇일까요?
주님께 끌려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 이 여인이 율법에 끌려갔더라면 살아남을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에게 끌려가도 그녀는 죽었을 것입니다. 친구에게 끌려가도 살아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에 끌려가도 살아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끌려왔기 때문에 이 여인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구나 이웃들에게 상처를 끌고 가려 하지 마십시오. 상처만 깊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상처를 주님께 끌고 오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고쳐 주실 것입니다. 인생 살아가다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얽히고 설킨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주님 앞에 끌고 오십시오. 주님이 풀어 주실 것입니다.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이 나 혼자의 힘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안고 살아가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때마다 그 죄를 안고 주님 앞에 오십시오. 세상의 어떤 죄라도 주님 앞에 끌고 오면 용서 받습니다.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덮어 주십니다. 감춰주십니다.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온갖 문제, 내 약점,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실패, 내 생명, 주님께 끌고 오면 나는 하나님 자녀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끌려왔던 간음한 여인도 새로워졌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라는 이 단어는 대단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오늘 본문에 꼭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우리가 도적질하고 남을 미워하고 간음하고 사기치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근원적인 죄의 뿌리가 되는 죄까지도 너에게 없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죄없는 자는 예수님 밖에 아니 계시기 때문이니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은 모세의 율법대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은 어디에 간 것입니까? 이 여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돌로 자신을 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을 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뭇사내들이 던진 돌에 이 여인의 머리가 부셔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돌로 예수님은 당신의 머리를 치시고 머리가 깨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남정네들이 던진 이 돌로 여인의 등은 찢어지고 허리는 깨어지고 살은 찢겨져 떨어져 나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을 예수님이 맞아 주신 것이지요. 범죄했던 손과 발을 찢어야 할 그 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아 당신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힘 있는 남자들이 던질 돌로 옆구리가 터져서 피가 흐르고 뼈가 부러져야 될 그 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옆구리를 치시사 물과 피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될 돌을 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내가 터져야 될 그 머리를 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내가 찢겨져야 될 자리에 예수님은 대신 찢겨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느니라" 그가 상함으로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허물로부터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여인은 오늘은 이 골목에서, 내일은 저 골목에서, 오늘은 이 남자 품에서, 내일은 저 남자 품에서 자신의 인격을 망가뜨리며, 자신의 삶을 찢으며 개처럼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인생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모든 허물은 이제는 새로워질 수 있다. 너의 죄는 이제는 끝날 수 있다. 너의 가혹한 운명이 이 자리에서 끝날 수 있다. 너의 모든 삶의 스타일은 이 자리에서 끝장날 수 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나님 앞에서 예수 앞에서 모든 죄는 끝장 날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저주는 끝장 날 수 있습니다.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으로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망가진 인생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 받아야 됩니다. 모든 죄는 끝장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인생 살아가다 문득 문득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세상으로 그 어려움을 끌고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끌고 오면 치료 됩니다. 회복 됩니다. 새로워집니다. 여기에 와서 선생 만나고 돌아가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선생 만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드리고도 아깝지 않은 그 분, 마음껏 맡겨 드려도 하나님께서 나를 아름다운 삶으로 빛나는 삶으로 황홀한 삶으로 영원한 삶으로 바꾸어 주시는 그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에서 살든지, 율법의 손가락을 붙들고 살지 마십시오. 비판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아프게 하고 찢고 상처내고 망가뜨리는 첫 번째 손가락으로 살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손가락을 주님의 보혈의 피에 적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의 손을 붙드십시오. 회복의 손을 붙드십시오. 치료의 손을 붙드십시오. 새로워짐의 손을 붙드십시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들아 딸아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