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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10) (마 16 : 13 - 20)
1970년 1월 1일 새벽 교회에서 0시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설악산엘 갔었습니다. 백담사 산장에서 하루 밤을 잔 후 다음 날 아침 장수대라고 하는 곳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눈 덮인 내설악을 아무런 장비도 없이 평상복으로 전에 한번 백담사에서 장수대로 넘어간 적이 있다는 친구만을 믿고 정말 겁도 없이 산엘 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산에서 길을 잃어 정말 죽을 뻔 했습니다. 겨우 길을 찾아 장수대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캄캄해져 있었을 때였습니다. 만일20~30분만 늦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때 산에서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저는 길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삶이 마치 눈 덮인 한 겨울의 내설악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길을 찾지 못하면 그곳에서 길을 잃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길을 찾는 것입니다. 길은 생명입니다. 길을 찾으면 살고 길을 잃으면 죽습니다. 바른 길을 가면 살고 바르지 못한 길을 바른 길인 줄 알고 가면 반드시 죽고 망합니다.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안에 우리가 찾아야 할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참 두고 두고 생각을 해도 맞는 말씀입니다. 누가 김목사는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 안에 길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시편 기자가 시편 119편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한 말씀에 저는 정말 200% 동의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구원의 길, 승리의 길, 축복의 길, 행복의 길,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로서 그냥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와 같은 길들이 보이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길’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길’은 저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길’은 저들의 목적이 아닙니다. 길에 관심이 없이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와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미신적인 기대이고 둘째는 그냥 교회생활을 즐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길로 생각하지 않고 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적이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 안에 있는 생명의 길에는 관심 없이 그냥 교회만 다니는 분들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조직과 사회 자체에 있는 인간적인 매력 때문입니다. 그냥 교회 생활을 습관적으로 즐기지만 정작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진리와 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여러분은 왜 높은 뜻 숭의교회를 찾아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그 궁극적인 관심과 기대는 무엇입니까?
정말 예수님 안에는 너무나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정말 너무나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많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려고 하며, 가야만 하는 모든 곳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정말 길 천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길로 가려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길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좁고 험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갑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길이 아닌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길로 갑니다.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하는 까닭은 그 길이 넓고 쉽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보면 내가 가는 방향의 길은 꽉 막혀 있는데 반대편 방향의 길은 확 뚤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방향을 바꾸어 반대 길로 가지 않습니다. 길이 막혀 있느냐 뚤려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길이 막혀도 사람들은 차를 돌려 반대 길로 가지 않습니다.
운전은 그렇게 바로 잘 하면서도 인생은 전혀 엉뚱하게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길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길의 진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다만 그 길이 당장 넓으냐 좁으냐만 생각합니다. 아무리 넓어도 길이 아닌 것은 길이 아닙니다. 아무리 좁아도 길은 길입니다. 좁아도 길로 가야지 무조건 넓은 길만 간다면 절대로 바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목적지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무조건 넓은 길로만 운전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예수를 믿으면 주일 날 하루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은혜 생활을 하면 금상첨화이지만 이런 저런 형편으로 그와 같은 경건생활을 미처 하지 못하고 그냥 주일 하루 교회에만 출석한다고 하여도 정말 여러분들이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 삶의 길을 찾고 주일마다 교회를 통하여 들려주시고 알려 주시는 길을 좇아 열심히 살아간다면 백 번의 구원과 천 번의 축복을 받고도 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발 교회만 다니지 말고, 제발 말만 하지 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말씀 속에서 지혜를 얻어 그 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사는 길을 찾으려면 못 사는 이유와 까닭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못 살고 망하는 이유와 까닭을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6장 23절의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에 대해서도 아주 정확하게 그 뿌리와 원인까지 우리들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고보서 1장 15절의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살려면 절대로 죽고 망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고 망하는 일과 짓을 하면서 잘 살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죽고 망하는 일과 짓을 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멀리하여야만 합니다. 죄를 멀리하려면 먼저 내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욕심을 멀리 해야만 합니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죄를 다스릴 수 없고,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구원과 생명 그리고 성공과 축복의 길을 찾아 낼 수 없습니다.
욕심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은 욕심들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욕심을 들라면 저는 그것을 돈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자리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그는 드디어 구원의 길을 찾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또 몇 주에 걸쳐서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자신과 세상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인데 모든 물질과 자리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하게 구원할 것이라고 저는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해마다 코스타(KOSTA)라고 해외유학생들을 위한 집회에 참석합니다. 92년에 처음 그 집회에 참석한 이후 이 사역이야 말로 내가 평생을 걸고 좇아다녀야 할 소명과 사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년에 서너 나라씩 지난 10년 동안 참으로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좇아 다녔습니다.
코스타 집회에는 크게 두 종류의 강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강사와 세미나 강사입니다. 주강사란 전체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 설교나 강의를 하는 강사를 의미하고, 세미나 강사란 몇 십 명 정도의 학생들 앞에서 선택식 강의를 하는 강사를 의미합니다. 저는 지난 10 여년 동안 여러 나라의 코스타 집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언제나 소위 말하자면 주강사로 참여하였습니다.
올해도 카나다 토론토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코스타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토론토 집회는 저녁집회 설교를 맡아서 담당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강사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집회에서는 그냥 세미나 강사로만 참여하였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미국 코스타에 9번 참석하였는데 세미나 강사로만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그 동안 너무 지나친 셈이었습니다.
혹시 사람들 중에는 제가 이번에 주강사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마음 속에도 잠시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저는 그냥 미국 집회에 참석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 두 번만 강의하고 모든 시간을 학생들과 똑같이 모든 집회에 참여하여 설교와 강의를 들으며 보냈습니다.
솔직히 참 낯설었습니다. 언제나 단에 서서 전체를 향하여 설교를 하던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학생들과 같이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었습니다. 저도 벌써 코스타에서는 고참(?)이 되었습니다. 고참도 보통 고참이 아닌 거의 왕 고참 수준이 되었습니다. 후배 목사님들이 주강사가 되어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제가 주강사가 아닌데도 학생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솔직히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젊은 후배 목사님들이 훌륭하게 집회를 인도하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놓고 은퇴해도 되겠다’라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참 이 목사님 훌륭하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 미국 코스타가 제일 은혜스러웠습니다. 자신과의 중요한 싸움이 있었던 집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주강사 자리는 후배들에게 내어 드리고 세미나 강사로 열심히 은퇴할 때까지 다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과 결심을 하는 순간 제 마음 속에 찾아 온 기쁨과 평안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와 감동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유치해 보이는 생각과 일이었지만 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와 같은 자기 부인을 조금씩 조금씩 확대해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주강사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서도 그냥 세미나 강사처럼 사역을 하다가 은퇴를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느보산에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는 가나안에 일등으로 들어가야만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이유로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느보산에서 외롭게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조금도 섭섭해 하지 않고, 불평과 원을 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느보산으로 올라가면서 백성들 앞에 여호수아를 내 세웁니다.그리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여호수아가 너희들의 지도자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외롭게 혼자 느보산에 올라가 죽습니다.
저는 그 말씀 속에서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을 봅니다. 그 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길입니다. 말처럼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정말 근사하고 훌륭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그 길을 가고 싶습니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자리에 서게 되면서, 조금씩 세상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고 어려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이 들어 가는 것의 위험성, 조금씩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것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낍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 지겠구나’하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내가 점점 커지고 중요해지면서, 내게서 하나님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불신앙임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불신앙이 나에게서 소중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구원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믿음은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구든지 그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나 세상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면서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듣기는 쉬우나, 말하기도 쉬우나 살기는 정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흥함을 위하여 스스로 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내가 과연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제 아이에 대하여 저는 진심으로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저들은 흥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례요한처럼 나도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다 그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벌써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교회는 구조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세상적인 자리와 권력입니다. 누구도 그와 같은 권력과 자리에 초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와 같은 쓸데없는 것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높은 뜻 숭의교회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특별히 많은 대형교회들이 바로 그와 같은 면 때문에 타락하고 있습니다. 부패하고 있습니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생명력을 잃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점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재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며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 믿음을 소유하실 수 있게 된다면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천국이 열릴 것입니다. 미국 코스타 집회에서 앞으로 열심히 세미나 강사 해야지 결심하는 순간 제 마음 속에 주체하기 어려운 기쁨과 평안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과 평안 그리고 자유는 곧 천국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