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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을 만한 믿음 (고린도후서 8 : 9 ∼ 15)
"예수께서 가난하게 사셨으므로 우리도 가난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에 여러분 동의 하십니까?
어떤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께서 종종 하시는 말씀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수준 높은 믿음이라는 주장까지 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요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지상에서 풍요롭게 살면 안도기에 어떤 사이비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공갈 협박까지 해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런 주장은 틀렸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 반대이론도 충분합니다. 물론 예수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정말 형편없이 가난하게 사셨던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예수께서는 집도 없고, 굶주리고 헐벗으셨습니까? 사람들은 예수께서 집도 한 채 없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요1:35-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거처를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거처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두 사람의 손님을 받아들일 정도로 예수님의 거처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적어도 여섯명의 동생이 한 집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마태복음8:20절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로 예수께서 거처할 집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복음 증거를 위해 가정을 떠나 정처 없이 분주하게 다니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거처할 집이 있으셨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구주요 스승되신 예수께서 집이 없으셨으니 성도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나도 집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께서는 여행하실 때 제자들이 돈궤를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열두 제자들 대부분 식욕이 왕성한 젊은이거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수님 일행이 굶주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 일행이 문전걸식을 한 것도 아닙니다. 돈궤는 그들이 쓸 것, 입을 것, 먹을 것에 쓸 돈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돈이 항상 있었기에 요12:6절에 보면 가롯유다를 가리켜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13:29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명절에 쓸 물건을 정정당당하게 구입하셨고 때에 따라서는 그 돈으로 구제까지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 주님은 결코 헐벗고 굶주리지 않으셨습니다.
도와줄 사람을 도와주면서 당당하게 생활하셨습니다" 돈궤는 항상 돈이 차 있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돈이 조달되었을까요? 그것은 보나마나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 받은 사람들이 물질로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눅8: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물질을 바쳐 하나님의 사업을 합니다." 성경에 분명 막달라 마리아와 수산나는 물질을 드려 예수님의 복음증거를 도왔습니다.
특히 헤롯 왕의 재산을 맡은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의 돈궤는 걱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통 털어 볼 때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가난하게 사셨으니까 우리도 물질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가난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헐벗으셨다는 것도 잘못된 인식입니다. 예수께서 입으셨던 옷
은 품질이 아주 고급이었습니다. 품질이 고급이라는 증거가 요19:23-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 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했습니다.
통으로 짠 옷은 그 당시 품질이 가장 좋은 옷입니다. 이처럼 좋은 옷이기에 병정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제비뽑기까지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더기를 걸치고 계셨다면 누가 그걸 서로 차지하려고 제비뽑기를 하겠습니까?
분명 예수께서는 구차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시면서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은 교역자는 체면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구차하게 살아야한다는 것인데 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결코 가난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천지를 풍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결코 초라한 우주, 가난한 삼라만상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는 가난과 궁핍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온 천하가 풍요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궁핍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눅15:17절에서 탕자가 외치기를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라고 말합니다. 에덴동산은 풍요로운 동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부터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사이에서 가난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부러 가난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축복이 아니라 아담이래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에 대해서는 창13:1-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은 이처럼 부자로 살았습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 이삭은 어떠하였습니까? 창세기26:12-14절에는 이삭의 축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은 창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32:10절에 보면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에서 보듯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은 영혼뿐만 아니라 생활도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영혼만 풍요로워지고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 오해입니다.
북한에 있는 교인들이 남한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들 가운데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바로 이 물질적 축복 때문입니다. 삼박자 축복이라 해서 영혼이 먼저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육신이 강건해지는 말씀에 근거해서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특히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교인들은 물질의 축복하고는 거리가 먼 믿음이요 더구나 언
제 순교할지 모르는 신앙 속에 살고 있으니 그래서 조목사님의 설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의 특수한 상황임을 우린 알아야합니다.
출애굽기1: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으나 애굽사람
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창대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보내주겠다고 출애굽기 3:8절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풍요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풍요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 받을 만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복 받을 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선 순위가 정해져야 합니다.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고 그저 육신의 축복만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
입니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산책이 아니고 바로 경주입니다.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경주를 가리킵니다.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경주자를 의미합니다.
성도여러분!
왜 신앙생활 하면서 당면한 문제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까? 그 이유는 산책을 해서 그렇습니다. 경주를 해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최우선, 절대 우선이 무엇입니까? 절대 양보할 수 없고 피할 수는 없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 들쑥날쑥하는 사람을 보면 참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얼마나 바쁜 때인데, 시간을 그토록 허비합니까? 경주하는 사람은 앞만 바라보고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어째서 한가한 것입니까?
칼뱅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인간을 그 약속에 이르도록 인내하여야 한다." 경주의 지속성, 경건의 지속성을 지켜가야 합니다.
분명 성경은 약속을 받은 사람, 약속을 따라 산사람, 약속을 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은 있으나 믿음이 없으며 모처럼 받은 약속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나의 기업으로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언제나 우선순위가 바로 되어야 복받을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생각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주안에서 변화된 사람이 저주의식, 가난의식, 패배의식, 열등의식에 꽉 차있다면 결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잠4:24절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미 새들이 새끼를 부화시킨 다음에 그 새끼들에게 모이를 물어다 먹여 키웁니다.
그러느라고 어미 새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암, 수 두 마리가 부지런히, 부지런히 날아다 먹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생명력의 신비로움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새끼들 보세요. 눈도 못 뜨면서 어미새가 모이를 물고 오면 가까이 온 줄 알고 입을 딱딱 벌립니다. 이렇게 입을 벌렸을 때에 보면 몸은 작고 입만 커요, 몸뚱이는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 것들을 어미새가 차례차례 먹입니다. 제일 입을 크게 벌린 놈부터 먹입니다. 이미 받아먹은 것도 다른 새들이 입을 버릴 때는 또 찢어져라 벌립니다.
보세요! 죽기 살기로 입을 버려야 얻어먹고 얻어먹어야 삽니다. 모이를 물어다 오는 것은 어미 새가 합니다. 그러나 입을 열게 할 재주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입만 열어라 하심입니다. 걱정할 것도 많고, 문제 거리도 많으나 잊어버리고 입만 넓게 열어라 그러면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라는 말씀은 명령이기도 하고 권면이라도 합니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습니다.
자원해서 우리 자신이 열어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날짐승의 새끼들이 눈도 감은채 입을 엽니다. 이거야말로 전적인 신뢰입니다. 으레 어미새가 좋은 것으로 먹여줄 줄로 알고, 먹을 만한 것, 내게 필요한 것, 내게 합당한 것은 입에 넣어줄 줄로 알고, 입만 넓게 엽니다. 새끼들은 전적으로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래서 넓게 여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가 있고, 받지 못하고 비실비실 하다가 겨우겨우 하늘 나라에 간신히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아야 됩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입을 넓게 열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 그 인격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온전히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채우심을 믿어야하고 그렇게 믿고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이 아주 충만하게, 만족하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말씀하셨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갈3:14절에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즉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저주스러운 생각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물질의 복까지 누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복받을 만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이냐하면,
셋째, 십일조와 현물을 온전히 드리는데 있습니다.
말3:10-12절에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데가 없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있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절)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장로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시던 장로님께서 다른 사람 신원보증 관계로 물질적인 어려움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거의 생활이 어려우실 때도 십일조를 하십니다. 그 십일조는 빌려서 헌금하십니다. 내 비록 지금은 주위에 도움으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찌됐던 최소한 생활의 십일조라도 해야 한다는 지론이 셨으며, 그리 오래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의 회복해 주심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또 제가 지방에서 목회할 때 7분의 장로님이 계셨는데 십일조를 하지 않으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래 제가 물었습니다. 어찌됐던 많든 적든 소득이 있고 생활은 하시는데 왜 십일조를 안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장로님 대답이 "나는 젊어서 다 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 마지막이 참으로 복음적이지 못함을 보았습니다.
저는 세례 문답할 때 꼭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예수를 믿을 것이냐?" 하는 것과 "십일조를 하겠느냐?"하는 물음입니다. 학생들도 용돈 가운데서 라도 해야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얻은 소득일지라도 드려야 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말씀입니다. 분명 성경은 너희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였기에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십년전 십일조와 오늘 십일조가 갔다면 이것 또한 믿음이 아닙니다.
헌물이란 낙헌제물을 의미하는데 오늘날의 감사헌금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그래도 십일조생활은 잘하는데 감사예물은 거의 절도범에 가깝도록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 발생하면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감사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축복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허다한데, 그 이유는 헌물을 도적질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을 "심는 믿음" 이라고 합니다.
심는 믿음에 대하여 고후9:6-8에는 말씀하시길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타스커"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색한 크리스챤과 온전한 크리스챤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습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 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가난하게 탄식하며 사는 모습을 하나님은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까지 왜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왔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명과 목적이 있어서 청빈하게 사는 것과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기뻐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민6:24-26)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서강가족여러분!
우리 모두 복 받을 만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마음껏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