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과 충성됨  (마태복음 25:19~28)


착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이 선하시고 또 하나님의 백성도 선하기를 가르치십니다. 에베소서 2장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도 선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명심보감 첫 문장에 보면 명심보감을 대표하는 주제가 나와 있습니다. ‘자왈(子曰) 위선자(爲善者)는 천(天)이 보지이복(報之以福)하고, 위불선자(爲不善者)는 천(天)이 보지이화(報之以禍)하니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화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공자가 말한 하늘은 우주의 힘, 천리라는 개념이지 기독교의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동양의 사상과 철학은 이 착함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저 착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하신 말씀 중에 매우 뜻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착함과 함께 충성됨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착함과 충성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냥 착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무능해집니다. 충성되기만 해도 안 됩니다. 나쁜 사람이 열심내고 나쁜 사람이 일 잘하면 그것도 큰 문제입니다. 악한 사람이 나쁜 목적으로 성공하면 다른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착한 바탕에서 충성스러워야 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과업해결

그러면 ‘충성스럽다’는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충성할 때 임금님께 충성하는 신앙의 모습에서 충성의 이미지를 많이 인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충성을 잘 이해해보면 매우 은혜로운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좋다’, ‘그 사람 성품 좋다’ 하는 그것으로 결코 다 된 게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많이 만나고 또 일도 많이 하는데 사람은 아주 좋은데 일이 안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품은 아주 좋은데 일을 맡겨 보면 일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성품 좋은 데에 반드시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일을 해 내는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실력이라는 이 개념은 수능시험을 잘 보고, 국가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패스하는 그 점수를 말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실력은 그런 학문적이거나 혹은 성적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고 기독교적인 개념은 맡겨진 과업을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져 있는 과업을 내가 해결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내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내야 그게 실력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워준 십자가를 감당해야 그것이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런 실력이 필요합니다. 마냥 사람 좋고 착한 그런 영역에서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일을 해결해내야 됩니다. 걱정만 하고 있는 사람, 토론만 하고 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기독교의 실력자는 과업을 해결하는 사람이고 그게 곧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말은 일을 해결하는 결과가 따라와야 됩니다.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그게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를 가지고 충성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세 사람을 충성의 모델로 봅니다. 에스더가 유대인이 패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금식을 선포하고 온 유다백성들에게 금식을 부탁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하만의 흉계를 극복하고 유대인을 죽음에서 살려냈습니다. 그것이 에스더의 충성됨입니다.
다윗의 군대가 나발의 집을 습격하러 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음식물을 준비하고 선물을 준비해서 자기 집을 향하여 처들여오는 다윗을 마중 나가서 다윗 앞에 엎드려 나를 보고 남편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대신 사죄합니다. 결국 다윗의 마음을 풀어서 그 집이 다윗의 칼날에서 구출을 받게 하는 충성된 아비가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곡식을 사러 애굽에 갔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험합니다. 곡식을 쌓아준 그 자루 속에 자기가 사용하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넣게 했습니다. 곡식을 사서 마음 놓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요셉의 형들에게 애굽의 하인이 들이닥쳤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합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은혜를 악으로 갚느냐? 우리 주인이 아껴 쓰는 은잔을 도적맞았도다 너희들이 그것을 도적질해간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요셉의 형들이 펄쩍 뜁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그 은잔을 움친 자가 있으면 그는 죽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종이 되겠습니다.” 자루를 조사해보니까 베냐민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모든 형제들은 다시 요셉의 집으로 끌려 들어왔습니다.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그 자리에 유다가 요셉 앞에 나아가서 탄원을 올립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이까? 잔이 나온 실물이 있는 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주여, 이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아니하면 늙은 우리 아비가 흰머리로 슬피 우며 음부에 내려갈 것입니다. 나이 늙으신 우리 아버지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아니하면 충격으로 죽을 것입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올 때 내가 아버지 앞에 내 몸을 담보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가 내 몸을 담보하기로 하였사오니 제발 나를 종으로 잡아두시고 이 아이는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야, 이 잔이 있는 그 사람만 내 종이 될 것이야. 너희들은 돌아가라” “아니올시다. 주여, 이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고는 우리는 이대로 못갑니다. 우리 아버지가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유다의 그 웅변은 놀랍습니다. 드디어 요셉이 설득을 당합니다. 요셉이 방에 들어가 실컷 울고 나와서 그제서야 형들 앞에 내가 당신의 동생 요셉이라고 신분을 밝힙니다. 위기가 왔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그 사람이 충성된 자입니다.

충성은 남기는 것

여러분, 충성됨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잘 말씀하셨습니다. 20절에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충성됨은 남기는 것입니다. 모자라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남습니까? 그것은 생산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생산이 이루어져야 남습니다. 남겼다는 말은 생산했다는 말입니다. 생산은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투자해야 됩니다. 다섯 달란틀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즉시 가서 장사했다고 했습니다. 투자해야 됩니다. 다섯 개를 버려야 열 개를 거두는 생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산은 먼저 거두는 게 아닙니다. 생산은 먼저 버리는 것입니다. 먼저 희생하는 것입니다. 먼저 심는 것입니다. 먼저 배우는 것입니다. 먼저 먹어야 합니다. 소가 미치는 광우병은 왜 걸립니까? 식물성 사료를 먹어야 할 소가 동물성 사료를 먹고 소가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하다가 소가 미쳤습니다. 소는 창조 때부터 식물성을 먹고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것을 어겼습니다. 그러자 소가 미쳐버렸습니다. 여러분, 잘 먹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진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먹어야 믿음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먹으면 힘을 뺍니다. 생산이라는 것은 먼저 투자를 해야 됩니다. 국수틀을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틀 안에 넣으면 국수가 줄줄 빠져 나옵니다. 넣어야 나옵니다. 투자를 해야 생산이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은사를 주님의 일을 위해서 투자하기 바랍니다. 그래야 생산이 있는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남기는 게 충성입니다. 개인적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일에 쓰고도 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아야 충성된 교회입니다. 모자라면 불충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투자하지 아니하면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땅에 묻어 둔 것처럼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한 생산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충성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심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선교위원회 직무를 받았기 때문에 벌써부터 교단 안팎으로 수많은 선교과제가 주어지고 있고, 저를 요구하고 와서 지도해 달라, 강의해 달라, 협력해 달라, 후원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선교의 밭에 여러분이 가진 축복을 심기 바랍니다. 밭이 있을 때 심어야 합니다. 일거리가 주어질 때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심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 일거리를 두고도 우리가 그냥 살렵니까? 남는 게 없습니다. 불충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밭에 우리는 심어야 합니다. 생산은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역행해서 생산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초등학교 때 매를 맞아 가면서 구구단을 외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외웠기 때문에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배웠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생산은 그런 원리입니다. 충성됨은 남기는 것입니다. 남으려면 생산해야 됩니다. 생산하려면 심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충성됨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충성은 인정함을 받는다

착하고 충성된 자에게 어떤 상급이 주어집니까? 21절에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이 말속에 주인이 충성된 청지기에게 두 가지 인정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인정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정입니다. 첫째, 인격의 인정입니다. ‘내가 너를 신뢰하노라. 내가 더 많은 걸 네게 맡겨주마’ 여러분, 인격의 신뢰가 무엇입니까? 마음 놓고 맡겨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정도로 지금 신뢰를 얻고 삽니까? 인격의 신뢰만큼 소중한 게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종을 보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착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맡깁니다. 두 번째, 실력을 인정합니다. ‘너는 정말 일을 해낼 수 있는 실력이 있어. 이제 내가 네게 열 달란트를 맡겨도 너는 감당할 힘이 있어.’ 여러분, 이 두 가지만 인정되면 다 됩니다. 인격을 믿어주고 실력을 믿어주면 다 됩니다. 그 이상이 없습니다. 상관이 내 인격을 신뢰해주고 내 실력을 인정해주면 그 부하는 행복한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주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주인의 영광을 내 영광으로, 주인의 권위를 내 권위로, 주인의 명예를 내 명예로 누리는 그 청지기는 진정 복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하시기 전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앞뒤로 많은 교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두고 지금 충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충성되게 살고 가야 되는데 메시야의 충성이 무엇이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가 있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가 있느냐 그들의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분명합니다.

맺는 말

충성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르쳐준 그 말씀 안에 의미가 다 있습니다.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그것이 충성이라고 주님이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충성은 그 모든 영광을 내가 차지하는 게 아닙니다. 충성은 주는 것입니다. 충성은 복음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 앞에 착한 인품을 가지고 살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충성됨을 가지고 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생애는 남아야 됩니다. 그래서 주어야 됩니다. 남기기 위해 날마다 생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생산적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심을 때 심기 바랍니다. 뿌릴 때 뿌리기 바랍니다. 줄 때 주기 바랍니다. 거기에 생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착함과 충성됨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두 개의 기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의 균형을 가지고 충성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