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
평안하뇨? (마태복음 28:1-10)
논 지 : 부활을 믿는 자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된다.
가. 공포 (1-4)
1. 여자들의 무서움(1)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어두운 때,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가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막 16:1, 눅 24:1) 가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부활절 장식을 할 때 흰 백합을 사용하여 장식을 합니다. 또한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릴 때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흰 옷을 입고 참석을 합니다. 이것이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여인들을 생각하고, 그 전통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곁에 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지켜 보았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 될 때에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들이 이제 또 무덤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향하는 이들은 두려움과 슬픔에 가득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슬픔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죄 없이 죽으셨다는 억울함과 분노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권능의 예수님께서 너무 맥없이 대제사장과 총독과 같은 권력자들의 폭력에 맥없이 죽으심으로 인해서 희망이 다 사라져 버리고, 무기력과 좌절과 낙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들이 무참히 깨짐으로 인해서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울 때 여성들이 무덤을 찾아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 밤에 무덤을 찾아갈 때,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영적인 존재에게 해를 당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희롱이나 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콩알만큼 작아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몸은 잔뜩 움추러 들었습니다. 뒤에서 누가 잡아 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발걸음이 자꾸 빨라졌습니다.
2. 경비병의 무서움(4)
한편 예수님의 무덤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고는 다시 살아났다고 유언비어를 터뜨릴까봐, 총독에게 군인으로 무덤을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마27:62-66). 군인들이 무덤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살아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낸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 엄청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번개같이 빠르고 빛나고 충격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흰 옷이 밝게 빛나고 천상의 존재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2-3). 군인들은 놀라운 영광과 충격적인 현상을 보고, 무서워서 떨며 마치 죽은 사람 같이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로마 총독의 권력과 대제사장의 권력을 배경으로 가진 군인들입니다. 또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찌르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던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천사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는 무서워 떨며 기절해 버렸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여지없이 꼬꾸라진 것입니다. 극단의 공포증으로 죽은 것 같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 평안
1. 천사의 위로(5-6)
무덤에서 천사들을 만나 무서워하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5). 그리고 여인들이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죽은 시체로 무덤에 있지 않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증거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사역을 하시면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시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예수님이 없는 빈 무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천사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또 그 증거로 보여주는 빈 무덤을 보고는, 예수님께서 예전에 여러 번 말씀 하셨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빨리 달려 나갔습니다.
2. 예수님의 위로(9-10a)
1)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달려가다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평안하뇨” 인사하시면서 그 여인들 앞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총독과 대제사장과 같은 권력자에게 잡혀서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불의한 권력에게 잡혀서, 불의한 폭력에게 희생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내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정의가 불의에게 패배하고, 이 땅에는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화나 기쁨이 없는 것 같이 생각이 되었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 지내고 죽음에게 완전히 패배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권력과 폭력에 희생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불의한 권력과 폭력을 깨뜨렸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무덤을 깨뜨렸습니다. 그 무덤에서 다시 일어 나셨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영광의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에게, 사망의 권세에게 영광의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2)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여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천사들을 보고 이미 기절해 버린 무덤 지키던 군인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승리의 영광을 거두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그 권세와 권능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권력자 로마총독과 대제사장이라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수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벌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불의한 폭력을 징벌하고 복수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이미 그들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군인들과 아울러서 그 모든 폭력의 배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용서하였습니다. 불의한 폭력을 벌하기 위해서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무서워하고 낙심한 여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좌절하고 불안해 하는 그 여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에게 평안을 주어서 위로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에 대해서 복수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주어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평안을 주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Hannah Arendt 박사는 “폭력의 세기”란 책에서, 그는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이고 ‘폭력의 세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에는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600만 유태인 학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극단적인 폭력이 계속된 세기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전쟁이 많이 있었지만, 그 전에는 한쪽 지역에서만 전쟁이 일어나고, 희생도 그리 많지 않았던 반면, 20세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무기가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20C에는 문명이 급진적으로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는데, 그러한 진보와 발달이 부당한 폭력의 수단, 전쟁 무기 개발에 치중되었습니다. 불의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발달된 기술을 가지고 전쟁무기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여러분, 과학과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서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단순히 진보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는 것은 죽음을 이기시고, 폭력을 무색케 하신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실 때에 진정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권력과 폭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사람들에 평안을 주시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여인들이 얻은 평안(8,9)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 무서움에서 벗어나 평안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8).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평안하뇨’라고 인사하셨습니다. ‘평안하뇨’라는 인사는 우리 말로 치면,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같이 보편적인 인사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전에 사역하실 때에 늘 하시던 인사, “평안하뇨” 라는 예전과 똑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니까 그들이 가졌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한꺼번에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9).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을 붙들고 그 분께 경배를 올린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쳤습니다. 마음 속에 희망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 앞에 계시는 것을 봤을 때, 이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들 속에 완전한 평화, 진정한 평안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래 전에 그 당시 제가 섬기던 교회 성도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도들과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확인하고 성찬을 나누면서 은혜롭게 성지순례를 다녔습니다. 예루살렘을 쭉 돌아보고 그 다음에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니까 안내하는 분이 나사로의 무덤을 안내 해 주었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니까 돌로 된 벽만 있고 별로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 들어갔던 분부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활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좁은 무덤 안에 30여명이 가득 들어가서 부활찬송을 같이 불렀는데, 그 부활찬송을 부르는 중에 우리들의 심령 속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사로가 부활했던 것과 같이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신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 속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었고,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진정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에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다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평안이 넘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 전파의 사명 (7,10)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던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명령하고 부탁한 것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갈릴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같은 명령과 부탁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두 가지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부활기사들을 종합해 볼 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는,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 제자들과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여주셔서 그들을 평안하게 하신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세상 속에 나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부활을 믿는 평안과, 그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들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기쁜 소식을 받고 평안을 누린 사람은 그것을 혼자만 간직해서는 안됩니다. 혼자만 간직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들이 빨리 나가서 그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달려 나가지 않았습니까?(8)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불안과 두려움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고 좌절가운데 삶을 살아가고, 어떤 때에는 다가올 일에 대해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 번 베다니 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안전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고, 진정한 평안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불안과 두려움이 깨어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평안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평안을 들고 나가서 세상 속에서 평안의 소식을 전함으로서 세상 속에 평안을 만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이철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