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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의 하나님 ④:섭리 (창40:9~23)
흔히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느 미래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확실하다는 사실 외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100%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불확실한 게 비단 이 시대뿐이겠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만사 인생만사가 다 불확실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5분 뒤의 일도 정확히 모릅니다. 인간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산다고 큰 소리 치지만 실제로는 자기 맘대로 되는 게 거의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자기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럼 과연 세상만사 인생만사는 누구 마음대로 되는 걸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연히 혹은 다른 신들에 의해 되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요행을 바라고, 미신이나 우상종교에 자기 인생을 맡깁니다. 정말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10년간 무속인으로 살았던 사람의 고백입니다. 점을 보러 사람들이 오면 유도성 질문으로 대충 알아 맞출 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점쟁이가 미래를 훤히 안다면 로또 당첨으로 큰돈을 벌어야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니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고, 부적도 사지 말고, 굿도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직 점쟁이의 말이라 흥미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절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인생이라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냥 방치해 두지 않고 인간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이뤄지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가운데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느끼든 못 느끼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을 느끼며 사는 것이 곧 ‘섭리 신앙’입니다. 요셉은 섭리 신앙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나아감으로 결국 승리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섭리 신앙을 갖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섭리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창조하고 나서 피조물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절대주권(絶對主權, Sovereignty of God)으로 간섭하십니다.
우리 육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십니다. 마치 큰 기계가 전력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밀하고 큰 기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으로 우주만물과 인생만사를 움직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가리켜 섭리(攝理, Providence of God)라고 부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 드리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과 인류 역사, 개인 인생을 보존하고 통치하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 증거하는 성경 구절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삼상2:6~7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시127:1~2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하시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선한 결과입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2] 요셉의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 만남, 타이밍, 역전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 가운데 섭리하신 것들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 모습을 소개해 드립니다.
① 만남 :
인생은 만남의 연속 과정입니다. 부모 형제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고,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무수한 만남이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들이 나의 의지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내가 의도적으로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 같지만, 잘 보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과의 만남 내가 계획하고 의도한 겁니까? 그렇지 않죠. 배우자와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만나 마음에 끌려 접근해서 계속 만나다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처음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요, 계속 만나서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결국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만난 사람들은 누구 누구였습니까? 부모형제, 노예상인, 보디발과 그의 아내, 간수장, 감방 동료, 바로 왕 ... 이들과의 만남으로 요셉의 인생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나옵니까?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감방 동료 두 사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얼른 듣기에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당시에는 고위관리입니다. 바로 왕의 측근으로 음식을 담당하고 왕의 건강을 체크하는 직책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수석 비서관에 해당됩니다. 평소 신임이 두터웠을 텐데 무슨 연유인지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이 감옥에 있었는데,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왕의 심기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꿈을 꿉니다. 그 뜻을 몰라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사연을 들은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줍니다.
9절~13절을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의 꿈과 그 해석이 나옵니다. 포도나무 세 가지가 있는데 거기 달린 포도송이를 짜서 집을 만들어 바로의 잔에 드리는 꿈입니다. 요셉은 사흘 후 복직되는 꿈이라고 해석해 주었는데, 정말 그대로 됩니다. 16절~19절을 보면, 떡 맡은 관원장의 꿈과 그 해석이 나옵니다. 흰 떡 세 광주리가 있는데 광주리에 담긴 음식을 새가 쪼아 먹는 꿈입니다. 요셉은 사흘 후에 사형 당하는 꿈이라고 해석해 주었는데, 정말 그대로 됩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한 후 요셉을 도와주리라 기대했건만,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요셉이 생각나게 하셨고 결국 그 사람이 바로 왕에게 요셉을 소개하게 됩니다.(창41:9~13 참조) 결국 바로와의 만남으로 인해 요셉이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감옥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인생에 그렇게 큰 역할을 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만남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띠라 우리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최초의 개신교 교인 서상륜 장로(徐相崙 1848∼1926)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13세에 부모를 여의고 개성 인삼을 만주에 갖다 파는 인삼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32세가 되던 해에 만주에서 장티푸스에 걸립니다.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 때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납니다. 그에게 치료를 받은 서상륜은 1년 후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인이 됩니다. 그 후 로스 선교사와 함께 최초의 성경(누가복음)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귀국해서 황해도 솔내(松川)에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웁니다. 나중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만나 다른 교인 13명과 함께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바로 새문안교회입니다. 만일 그가 선교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범한 상인으로 살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만남들을 통해 천국의 백성이 되고, 더 나아가 한 민족의 교회를 시작하는 놀라운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만남은 이렇게 오묘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지만, 때로는 나쁜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잘 되는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만난 것을 생각해 보세요. 악연이죠. 그런데 그 여자 때문에 감옥에 갔고, 거기서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고, 그로 인해 바로 왕을 만나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상 줘야 됩니까? 벌 줘야 됩니까? 성경 기록에 없지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 심지어 악한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이 좋은 결과로 바꾸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 하면 됩니다.
② 타이밍 :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해 주고는 자기 이야기를 해줍니다. 14절~15절.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결백을 밝히면서 복직하면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인간적으로 요셉이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잊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창41:1 “만 이 년 후에 .. ” 2년 후에 바로 왕이 꿈이 꿉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전긍긍할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이 생각나 보고합니다. 그래서 급히 불려갔고, 꿈을 해석해 주면서 애굽에 닥칠 흉년을 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그 지혜에 감탄한 왕은 요셉을 총리에 임명합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하자마자 요셉을 출옥시켜 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자유의 몸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 인생을 마쳤을 겁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17세에 노예로 팔려간 후 13년 동안 연단 과정을 통해 애굽의 총리로 준비시키고 타이밍을 맞추신 겁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경영 수업, 감옥에서 행정 수업 등 을 감당하면서 총리 인턴십 과정을 거치게 하신 겁니다. 얼마나 오묘한 역사입니까? 요셉이 13년 동안, 특히 마지막 2년 동안 매우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맞추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 (Best Thing, in the Best Way, at the Best Time)
③ 역전 :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까 오히려 잘 되는 수가 있습니다. 역전(逆轉)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PD와 같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계속 꼬였습니다.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정말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감옥에까지 왔으니 ... 그런데 하나님은 역전의 드라마를 준비하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 왕이 그를 급히 데려오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창41: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역전의 섭리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자기를 팔았던 형들 앞에서 고백하는 간증을 보십시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작품이었고, 역전의 섭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섭리의 방법들이 다른 성경인물 가운데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룻의 인생에 나타난 섭리를 보십시오. 만남, 타이밍, 역전의 섭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흉년으로 인해 모압에 이민 간 나오미의 아들과 만나 혼인하게 됩니다. 그 남편의 사후에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오게 되고, 마침내 보아스와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와 만나게 되는 극적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룻2:3~4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Just then - NIV)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 ” 구약 이스라엘에는 가난한 자가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느라 이삭을 주으러 가는데, 많고 많은 밭 가운데 하필이면 보아스의 밭에 갑니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죠. 또 일꾼들이나 만나는 게 상례인데 마침 밭에 나와 본 보아스와 만나게 됩니다. 룻은 우연히, 즉 전혀 의도하지 않고 갔는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두 사람이 혼인하게 됨으로 후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 자격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등재됩니다. 마1:5~6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5 ...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 ”
스데반의 인생에 나타난 섭리도 놀랍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가장 빼어난 집사요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죽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볼 때 큰 손실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그를 지켜주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섭리에 관해 언급할 때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섭리하실 때 인간의 지유의지를 말살하고 로봇처럼 조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인의 횡행하는 모습이 세상에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락함으로 죄를 허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과 악인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오묘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를 당하는데, 그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울(바울)이 있었습니다. 행7:58~60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순교하는 순간 마치 예수님의 모습처럼 자기 영혼을 맡기고, 원수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아마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겁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지만, 그 전에 이미 그 마음이 허물어져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회에 스데반의 순교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섭리의 신비입니다. 스데반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게 끝난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거나 영원한 시간을 두고 보면 지극히 영광스런 것입니다. 그는 세계선교의 초석이 된 겁니다. 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인생이 된 겁니다.
이번 아프간 피랍 사건도 마찬가지 ...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선교하러, 의료 봉사하러 갔는데, 하나님은 왜 그들이 피랍되도록 방치하셨나? 배형규 목사는 왜 피살되도록 방치하셨나? 탈레반의 악행을 허용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겁니다. 아프간의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겁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순교와 고난의 과정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섭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어떤 이들은 위험한 데 가서 왜 물의를 일으켰냐고 비난하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뭘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19세기 말엽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올 때 순교를 각오하고 들어와야 하는 위험지역이었습니다. 구한말, 일제시대, 해방 직후, 그리고 6.25 전후 이 나라가 얼마나 위험했습니까? 그런데도 수많은 서구 기독교단체가 고통과 가난 가운데 있던 이 민족을 돕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학교 세워주고, 병원 세워주고, 교회 세워 주고 ... 그 결과 이만큼 살게 된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젊은 기독청년들이 하는 일들이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의 머리가 둔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명확히 모르지만, 앞으로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면 모든 게 분명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 : 신뢰, 인내, 최선
① 신뢰 :
우리는 고난의 상황이 닥쳐오면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섭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잊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혹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므로 오해가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종종 이런 회의에 빠집니다. 왜 악인이 형통하는가?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오차도 없으십니다. 단지 우리의 머리가 둔할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유대인 랍비가 타지에 여행을 갔습니다. 당나귀 한 마리, 닭 한 마리, 등잔 한 개를 갖고 떠났습니다. 어느 마을에 당도했는데, 유대인이라고 여관에서 재워주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숲 속에서 유숙하는데 한심합니다. 게다가 거센 바람이 불어와 등잔불이 넘어져 깨집니다. 마음이 심란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만사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 ” 밤사이에 들짐승이 닭을 물어가고, 도둑이 당나귀 훔쳐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또 고백했습니다. “세상만사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 ”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간밤에 적군이 침투해서 마을 주민을 모두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묵고 있던 그 숲 속으로 지나갔다는 겁니다. 등잔이 없어서 보이지 않았고, 닭과 당나귀 없어서 소리 나지 않아서 안전했던 것입니다. 그 랍비는 새삼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해서 또 고백합니다. “세상만사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 ”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잘못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때때로 이해가 안 되고,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에도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여기서 ‘맡기다’(commit)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갈’(lG)인데, ‘굴리다’(roll)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돌을 굴려버리듯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버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길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인내 :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게 되면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면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러분,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꽃을 보면, 봄에 피는 꽃도 있지만 여름이나 가을에, 심지어 겨울에 피는 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③ 최선 :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섭리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어진 환경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126:5~6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우리 삶의 현장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꼭 믿으시고, 요셉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 멋진 걸작품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