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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받으시는사람 (행 10:24-35)
오늘의 본문은 한 로마 군인 장교에 대한 믿음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인류 구원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귀중한 말씀입니다.
34 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이 받으시는(Accept)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義)를 행하는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의> 란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Righteousness 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은 헬라어 디카오수네(δικαιοσυνη)란 말입니다. <디카이오수네>란 우리말로는 정의(正義), 공정(公正), 정직(正直)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시는가 하면 자기를 경외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을 들어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모든 분야에서 회복해야 할 급선무 중에 하나는 <공정>과 <정직>이라고 봅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이것만 회복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크리스천들에게 덜 책무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1. 고넬료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의 대표자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취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내 세웁니다. 그리고 겉모습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실제로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여자 대학에서 우리 나라가 아직도 능력 본위에서 보다 여성들을 채용할 때 외모를 더 중시한다는 실험을 실제로 행한 보고서를 본 일이 있습니다. 똑같은 졸업생들 중에 인물이 예쁘고 몸매가 날씬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채용되는 비율을 보면, 실력은 많지만 외모가 모자라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통계를 낸 일이 있었습니다. 말로는 능력 위주요 성실성 위주라고 하지만 처음 대하는 겉모습의 인상이 좋아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즉 취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취할 때 외모(外貌)를 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자기를 경외(敬畏)하는 사람들을 받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국적(國籍)이 문제가 안 됩니다. 사실 국제 사회에 나가 보면 국적이 얼마나 편견을 같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취(成就)한 사람보다 얼마나 의(義)를 행하고 있느냐를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넬료(Cornelius)를 하나님이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대 장교였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은 모든 면으로 보아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이삭과, 야곱의 후손 된 자기들만이 선민(選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먼저 이 뜻을 알리고 보여 줌으로서 복음의 확장에 일조(一助)를 더하게 하였습니다.
2. 고넬료의 무엇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받으셨겠습니까?
①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보았습니다.
고넬료는 신분상 경건하게 살기가 어려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인 장교라면 당시에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자기 나라도 아닌, 유대인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의 더 큰 출세와 명예에 누(累)를 끼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로마는 세계를 정복한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강대국의 군인 장교가 그것도 식민지 영토인 가이사랴 빌립보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사회적 신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를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배란 신앙 인의 모든 것의 총화입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데서 문제는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제일로 와야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성취욕 때문에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난다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자연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고넬료는 바로 이점에서 하나님의 눈에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② 그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군인 신분으로 보면 어울리지 않는 생활입니다.
군인이라면 용감하게 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하고, 자비와 동정보다는 지배와 정복과 군림하는 것이 신분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러한 상식을 뛰어 넘었습니다. 자기의 휘하에서 많은 유대인 가난한 자들을 도왔고, 회당을 짖는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점이 하나님의 눈에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성숙한 사람은 군림보다는 봉사의 자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여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큰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 누구나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하려면 먼저 든 것이 있어야 합니다. 흔히 보면 물질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더 교만을 부립니다.
권세도, 지식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도리어 꽉 들어있는 사람들은 겸손하여 봉사하는 일로 눈을 돌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교만해 집니다.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겸손해 집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영적 은혜의 체험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야 도리어 겸손하게 봉사합니다.
③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라고 한 말씀을 보아서도 그가 얼마나 기도 생활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달라는(구하는 기도)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기도입니다. 고넬료는 후자의 속한 기도 자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의 음성을 들었고, 그 들은바 대로 현실에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皮匠)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고....너무나 똑똑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들은 그대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데리고 왔습니다. 말씀대로 믿었고, 말씀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 감동을 듣고 소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도 생활 중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들었을 때, 또 그대로 행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고넬료는 하나님이 택하여 쓰실 만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도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숨겨져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고넬료를 통하여 깨달아야할 점은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입니다.
요즘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의미는 다름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그런 경건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들어 내려고 경건의 모양만 흉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란 책망을 들었습니다. 경건은 사람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면 먼저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한 생명을 학대하고, 업신여기고, 인권을 짓밟는 일을 미워하고, 정의를 위해, 공의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넬료는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어쩌면 모두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기 성취의 요구만을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자세로부터 우리도 경건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대업(大業)을 확장시키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들어 자신의 대업을 성취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와 베드로를 들어 쓰시었습니다.
만일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아니했던들 복음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퍼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님이 주선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이방인이었고, 하나는 철저한 율법적 전통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만날 수 있는 확율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개입하였습니다. 모두 환상의 계시를 보여 주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도록 하였고, 베드로에게는 보자기 속에 들어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보이면서 잡아먹으라고 하는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세 번이나 보여 준 후,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가 없어 졌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 중에, 밖에서 “계십니까?”하는 소리와 함께 고넬료에게서 보낸 하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저들로부터 온 사정 얘기를 다 들은 베드로는 하도 신비로움에, 그리고 너무나 분명한 사실 앞에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壁)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러한 대업(大業)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십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새 시대의 새 정치를 열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큽니다. 시민 단체에서는 이번에는 바르게 국회 위원을 뽑자고 자격 없는 정치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받으실만한 인물이겠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고넬료와 같은 사람을 들어 쓰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고넬료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평소에 온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서는 눈여겨보시는 분입니다.
꾸며서는 안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먼저 경건 생활에 앞장섰기에 가족들이 그를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남을 돕는 봉사의 일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행위가 뒷받침 될 때에 효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왜 효력이 없는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보이질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신앙 인들이 되어 고넬료와 같이 복음 사역을 넓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의 본문은 한 로마 군인 장교에 대한 믿음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인류 구원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귀중한 말씀입니다.
34 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이 받으시는(Accept)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義)를 행하는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의> 란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Righteousness 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은 헬라어 디카오수네(δικαιοσυνη)란 말입니다. <디카이오수네>란 우리말로는 정의(正義), 공정(公正), 정직(正直)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시는가 하면 자기를 경외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을 들어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모든 분야에서 회복해야 할 급선무 중에 하나는 <공정>과 <정직>이라고 봅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이것만 회복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크리스천들에게 덜 책무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1. 고넬료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의 대표자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취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내 세웁니다. 그리고 겉모습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실제로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여자 대학에서 우리 나라가 아직도 능력 본위에서 보다 여성들을 채용할 때 외모를 더 중시한다는 실험을 실제로 행한 보고서를 본 일이 있습니다. 똑같은 졸업생들 중에 인물이 예쁘고 몸매가 날씬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채용되는 비율을 보면, 실력은 많지만 외모가 모자라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통계를 낸 일이 있었습니다. 말로는 능력 위주요 성실성 위주라고 하지만 처음 대하는 겉모습의 인상이 좋아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즉 취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취할 때 외모(外貌)를 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자기를 경외(敬畏)하는 사람들을 받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국적(國籍)이 문제가 안 됩니다. 사실 국제 사회에 나가 보면 국적이 얼마나 편견을 같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취(成就)한 사람보다 얼마나 의(義)를 행하고 있느냐를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넬료(Cornelius)를 하나님이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대 장교였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은 모든 면으로 보아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이삭과, 야곱의 후손 된 자기들만이 선민(選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먼저 이 뜻을 알리고 보여 줌으로서 복음의 확장에 일조(一助)를 더하게 하였습니다.
2. 고넬료의 무엇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받으셨겠습니까?
①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보았습니다.
고넬료는 신분상 경건하게 살기가 어려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인 장교라면 당시에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자기 나라도 아닌, 유대인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의 더 큰 출세와 명예에 누(累)를 끼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로마는 세계를 정복한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강대국의 군인 장교가 그것도 식민지 영토인 가이사랴 빌립보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사회적 신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를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배란 신앙 인의 모든 것의 총화입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데서 문제는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제일로 와야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성취욕 때문에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난다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자연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고넬료는 바로 이점에서 하나님의 눈에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② 그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군인 신분으로 보면 어울리지 않는 생활입니다.
군인이라면 용감하게 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하고, 자비와 동정보다는 지배와 정복과 군림하는 것이 신분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러한 상식을 뛰어 넘었습니다. 자기의 휘하에서 많은 유대인 가난한 자들을 도왔고, 회당을 짖는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점이 하나님의 눈에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성숙한 사람은 군림보다는 봉사의 자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여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큰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 누구나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하려면 먼저 든 것이 있어야 합니다. 흔히 보면 물질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더 교만을 부립니다.
권세도, 지식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도리어 꽉 들어있는 사람들은 겸손하여 봉사하는 일로 눈을 돌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교만해 집니다.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겸손해 집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영적 은혜의 체험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야 도리어 겸손하게 봉사합니다.
③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라고 한 말씀을 보아서도 그가 얼마나 기도 생활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달라는(구하는 기도)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기도입니다. 고넬료는 후자의 속한 기도 자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의 음성을 들었고, 그 들은바 대로 현실에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皮匠)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고....너무나 똑똑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들은 그대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데리고 왔습니다. 말씀대로 믿었고, 말씀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 감동을 듣고 소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도 생활 중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들었을 때, 또 그대로 행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고넬료는 하나님이 택하여 쓰실 만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도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숨겨져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고넬료를 통하여 깨달아야할 점은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입니다.
요즘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의미는 다름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그런 경건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들어 내려고 경건의 모양만 흉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란 책망을 들었습니다. 경건은 사람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면 먼저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한 생명을 학대하고, 업신여기고, 인권을 짓밟는 일을 미워하고, 정의를 위해, 공의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넬료는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어쩌면 모두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기 성취의 요구만을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자세로부터 우리도 경건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대업(大業)을 확장시키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들어 자신의 대업을 성취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와 베드로를 들어 쓰시었습니다.
만일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아니했던들 복음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퍼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님이 주선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이방인이었고, 하나는 철저한 율법적 전통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만날 수 있는 확율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개입하였습니다. 모두 환상의 계시를 보여 주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도록 하였고, 베드로에게는 보자기 속에 들어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보이면서 잡아먹으라고 하는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세 번이나 보여 준 후,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가 없어 졌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 중에, 밖에서 “계십니까?”하는 소리와 함께 고넬료에게서 보낸 하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저들로부터 온 사정 얘기를 다 들은 베드로는 하도 신비로움에, 그리고 너무나 분명한 사실 앞에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壁)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러한 대업(大業)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십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새 시대의 새 정치를 열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큽니다. 시민 단체에서는 이번에는 바르게 국회 위원을 뽑자고 자격 없는 정치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받으실만한 인물이겠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고넬료와 같은 사람을 들어 쓰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고넬료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평소에 온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서는 눈여겨보시는 분입니다.
꾸며서는 안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먼저 경건 생활에 앞장섰기에 가족들이 그를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남을 돕는 봉사의 일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행위가 뒷받침 될 때에 효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왜 효력이 없는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보이질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신앙 인들이 되어 고넬료와 같이 복음 사역을 넓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